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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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1년 8월 19일 일요일 오전 02시 28분 12초
제 목(Title): [보잉~]러시아에서 보내는 편지-07


2001년 05월 01일 (화)

지난 밤에 읽은 김산환 아저씨의 [모스끄바여! 안녕 우리는 지금 시베리아로 
간다]는 내게 충격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일이었지.
나는 이제 러시아에 온 감격과 자부심으로 남은 기간 취재에 임할 것이다.
나는 지금 시베리아로 간다! 
지바고가 그랬던 것처럼, 안나 까레니나와 레닌과 고리끼가 그랬던 것처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지구의 1/6이나 되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지바고와 라라가 애절한 사랑을 싹 틔운 곳에서, 20세기 가장 큰 사건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었던 바로 이 곳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긴 철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될까. 나는 바이칼 
호수를 건너 광활한 대지를 지나 우랄 산맥을 넘고, 톨스토이가 살던 
모스크바로, 차이코프스키가 있던 피터스버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시비르.. 오친 쁘리야뜨나~!!" (시베리아.. 정말 반갑구나~!!)

오늘은 노동절 행사가 있는 날이야. 10시부터 행사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9시부터 레닌 광장에 나와 기다리고 있어. 혹시나 행사 준비하는 모습들을 찍을 
수 있을까 해서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그냥 지나는 사람들 뿐이구나. 
날씨가 무척이나 시렵다. 내복을 두개나 입었는데도 한기를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이곳 러시아에서는 계절의 여왕인 5월도 그 화사함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다. 
너무 추워서 차 안에 들어와 앉았다. MD를 꺼내서 나의 Jazz Collection을 듣고 
있어. 'The Shadow Of Your Smile' 섹소폰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악기를 
연습하던 성당의 4층 연습실이 그리워라. 한 달 후에 돌아가면 악기 부는 
방법이 어설퍼지지 않을까. 오기처럼 혼자 악기를 연습하던 시간들. 얼마나 
애절한 그리움을 앓았던가. 지금은. 이제는.. 별로 보고싶지 않은 그 사람을 
나는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얼마나 많이 미워했던가. 그 불 같은 어린 풋사랑은 
섹소폰 소리처럼 몰아 쳤다가는.. 선율의 여운을 남기고는 소리처럼 
사라졌어라.
이제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 보니 나는 그를 잊었나 보다. 날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랑도, 그리움도 아닌.. 미움. 이제는 그저 섹소폰 소리 속에 그 모든 
것이 있을 뿐이다.
앗.. 저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시 쓸게.

그들은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를 매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전에 레닌 광장에 모여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구호를 외치는 노인들. 
시위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좀 어설픈 집회가 있었다. 그들의 얘기는 이러했다. 
"자본주의는 예쁜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길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실체는 가난하고 늙고 병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모는 악마입니다. 사회주의 
시절에 연금을 받고 살아가던 노인들과 장애인들과 실업자들은 이제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전엔 이웃이 친구였는데, 이젠 이웃이 경쟁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로 돌아가야 예전처럼 다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편히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는 그리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고 있지는 않은가 봐. 그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한 50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들 노인들 뿐이었어. 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 보지 못했어. 원래 젊은이들은 노동절 행사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후에 댄스축제엔 그 큰 레닌 광장을 
모두 메울 정도의 젊은이들이 모였지. 와.. 블라디보스톡 청춘들은 다 왔나 
보다 싶더라구. 그리고 이 추운 날씨에 어찌나 과감한 옷차림들은 하고 
나왔던지 안스러워서 겉옷이라도 벗어 주고 싶었지. 그리고 광란의 도가니.. 
색색의 조명도 없고 쩌렁쩌렁 울리는 서라운드 스피커 음악도 아니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누구의 시선도 개념치 않고 자기들끼리 
흔들고 춤추는데 한껏 빠져있었지. 이런 행사는 올해가 첨이래. 늘 썰렁하고 
칙칙하게 노동절 행사를 보냈었는데 올해부터는 매년 이런 댄스 축제를 노동절 
행사에 넣을 거라고 블라디 보스톡 시장이 직접 나와 연설했지. "맘껏 
즐기세요!!"라는 맨트를 남기고 젊은이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그는 유유히 
사라졌지만.. 경찰들까지 데려 가지는 않았어. 참으로 묘한 광경이 연출 
되었지. 요란한 화장을 하고 과감한 옷차림을 한 러시아의 젊은 청춘 남녀들.. 
그들이 온몸으로 자유를 뿜어내고 있는 그 축제장의 가장자리에 완전 무장을 한 
경찰들이 삥 둘러 서서 테두리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그 모습은 레닌 동상 
밑에서 열렬히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보다 더 이중적인 모습이었어. 
도무지 이들의 현실이라는 것이 감이 잡히질 않는 거야. 체제 간에 놓인 다리를 
완전히 다 건너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일까.

오후엔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있는 서커스 공연장에 갔어. 공연장 앞에 이런 
문구가 써있었어. "예술의 주인은 국민이다." 레닌이 한 말이래. 이러한 이유로 
서커스는 발레보다 하위예술이 아닌 것이지. 서민들은 서커스를 보면서 한바탕 
신나게 웃고 아이들은 동물들과 교감하는 법을 배우지. 공연장은 또 얼마나 
크다고.. 언뜻 보기에도 한 200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인데 그 
자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꽉 찼지. 모두가 연미복을 차려 입은 오케스트라가 
배경 음악을 직접 연주 했고, 출연자들이 한 50명 정도, 출연 동물들은 말, 곰, 
원숭이, 개, 양 등이 한 40마리 정도, 행사 요원들이 한 40명 정도. 정말 
대단한 규모지? 공연 내용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두시간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더라구. 의자가 좀 불편했는데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어. 그들의 서커스는 
위트와 유머가 넘치고 힘과 자부심이 가득했지. 200백년 이상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왔던 바로 그 러시아 서커스의 위상을 경험했던 거야. 
하지만 오전에 보았던 공산주의 자들의 집회를 봐서 였을까? 아슬아슬 힘겨운 
외줄을 타는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보며 이것이 러시아의 현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밀어 닥치는 변화의 바람. 여전히 잔존하는 체제간의 
갈등. 그 속에서 러시아의 국민들은 힘들게 균형을 잡으며 외줄을 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유구한 역사 중의 단편일 뿐이겠지. 이들의 10년, 
100년 후의 모습을 과연 어떠할까. 이들의 숨은 저력이 나는 벌써부터 
두렵구나.

블라디 보스톡의 마지막 밤. 참으로 가슴 속에 희비가 엇갈렸던 곳이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될 만 하니까 다시 떠나야 한다니.. 더욱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올 테면 오라지. 난 그 어디에서도 푸르른 날개를 퍼득이는 
보잉~이자나.

내일은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고 결국 
열차를 타게 되었구나. 정말 흥분되는 일이야. 안나 까레니나처럼 흔들리는 
열차 안에 앉아 사색하고, 창밖에 시베리아와 만나며 결국 바이칼로 달려 가는 
것이지. 아~ 도대체 그 기나길 철로 위엔 어떤 이야기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 어느 순간에서도 나의 외침에 귀 기울여 주고 있는 네가 있어서 난 두려움 
없이 그 어디에라도 뛰어 들 수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너의 존재에 감사하며 
너의 편안한 휴식을 기도할게.
나도 이제 잠들어야 겠다. 안녕. 내일 아침 일찍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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