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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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1년 8월 14일 화요일 오전 02시 14분 20초
제 목(Title): [보잉~]러시아에서 보내는 편지-05~06


2001년 4월 29일(일)

블라디 보스톡 역 앞. 난 온통 회색 빛인 이 도시가 싫다. 어둡고 낡은 건물들. 
지저분한 거리. 무표정한 사람들. 물자 부족으로 인한 낮은 생활수준. 오래된 
자동차들. 맛없는 빵과 버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높기만 한 물가. 
스텝들간의 갈등.
어딜가나 경찰들과 마피아의 눈치를 보며 촬영을 해야 하고, -이곳은 등록만 
하면 총기 소지가 자유롭고 또 경찰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기 때문에 
마피아가 성행 한단다.-  도무지 블라디 보스톡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톨스토이나 차이코프스키같은 거장이 태어나가 송장한 
러시아가 이곳이 맞는지.. 아님 아직 내가 섣부른 판단을 내려 버린 건지. 내가 
알아 내지 못한 대단한 무언가가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까.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구차한 인생들이 여기 모여 있다. 재래 시장에서 만난 
연변 동포들.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말을 하는데도 우리와 다른 사람을 
살아가는 우리의 형제들. 하루에 3천원 더 벌려고 불법체류를 하면서, 
경찰들에게 삥 뜯겨 가며 시장의 한 구석에서 야채를 팔고 음식을 만드는 나의 
동포들. 그들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 걸까. 

이 지저분한 생활공간 속에서도 스스로를 치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러시아 
여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짧은 스커트. 진한 화장. 나름대로 멋을 낸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19세기 말. 유럽 여인네들의 풍류를 언뜻 엿보아 본다.

도대체 난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진정한 개척의지로 취재에 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대충 시간만 때우면서 돈이나 벌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러시아 
여행이라는 훈장을 달 요량으로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걸까. 이제는 나의 
정체성을 밝히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는.. 내가 바라는 나는 없다.
타국에서의 방황..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나는 울고 싶어라.

한 손엔 1루불 짜리 동전 두개와 한 손엔 해바라기씨를 움켜쥐고 나는 목이 
메었다. 역 앞에 있는 레닌 광장. 그곳에서 함께 춤추었던 젊은이들. 그들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나를 불러 내 손에 동전 두개를 쥐어 주었다.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광장 바닥에 내 얼굴을 그려주던 여덟 살 짜리 꼬마 마이샤는 
내게 해바라기씨 몇 알을 주었다. -해바라기씨는 이들에게 보편적인 군것질 
거리지. 다른 과자들은 값이 비싸서 해바라기씨를 많이 먹는다.- 얼마나 인정 
넘치는 젊은이들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아침까지 이곳 러시아의 궁색한 모습들이 너무나 싫었는데, 오늘 
오후에 느낀 이들의 인정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풍요로웠다. 아.. 나의 섣부른 
판단이 또한 부끄러웠다. 
나는 이들의 소식을 한국에 전하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이땅에 온 것이다. 
신피디와의 불신과 불편한 환경은 나를 좌절 시키는 요인이 되어서는 않된다. 
그들의 소박한 웃음과 작은 선물. 레닌 광장에 내리는 황혼. 그들이 이땅에 
있다. 나는 결심했다. 그들의 웃음과 따뜻한 마음을 꼭 고국에 전하리라. 
그들의 선물은 휴지에 곱게 까서 필름 통에 보관했다. 러시아 일정 중에 내가 
좌절할 때마다 이것은 나를 절망에서 구해 줄 것이다.

저녁에 호텔에 들어와 울샴푸를 꺼내 속옷을 빨았다. 빨래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난 젖은 팬티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엄마 냄새를 맡았다. 엄마와 
통화한지 이틀이 지났다. 걱정 하실텐데.. 1분 통화료가 우리 돈으로 7000원 
정도니 무서워서 도무지 국제 전화를 할 수가 없다. 오늘 밤엔 엄마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기침도 뚝..!

2001년 4월 30일(월)

맨땅에 헤딩.. 바로 신피디의 스타일이다. 오전 내내 고기잡이 보트를 섭외 
하러 돌아다니다가 정오가 조금 지나서야 겨우 모터보트를 하나 섭외해서 
바다로 나갔다가 30분도 안돼서 돌아왔다. 파도가 너무 심해서 촬영을 할 수가 
없다나. 이렇게 흔들리는 화면을 쓸 수가 없단다. 내 생각엔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고기잡이를 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력이 담긴 생생한 그림이 
나오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흔들이면 흔들리는 대로 그것이 얼마나 현장감 
넘치는 그림이냐는 말이다. 나는 촬영을 계속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꾹 
참았다. 그것은 월권이기 때문이었다. 피디가 할 일이 있고, 리포터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거자나.  하여튼 맘에 맞는 파트너와 함께 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오후에는 또 어떻고.. 'SBS 철의 실크로드 대탐험'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현수막을 차에 붙이고 그 차가 달리는 샷을 찍기 위해 다섯 시간을 허비했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곳에는 얘기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 할 상대도 없으니 너에게 쓰는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내가 투덜투덜 댄다고 귀찮아 하지 
말아 주길 바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혼자서 끙끙대고 앓아 누웠을 나를 좀 
이해해 다오.

서울의 모든 것이 그립다. 특히 너와 함께 걷던 학교 정대 후문의 안암동 거리. 
그 활기찬 젊은이들의 밝은 기운과 붉고 푸른 화려한 간판들. Prowstar의 
향긋한 Cafe Mocha와 조용한 네 표정과 나른한 오후의 햇빛과 그 속에 있는 
내가 그립다. 그 때의 그 여유로움이. 느긋한 커피 향이 이렇게 고마운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단다. 자꾸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면 더 힘들어 지기만 하는 데도 
저절로 생각이 나는 것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도착하고 다음날 너와 잠깐 통화 하고서는 계속 연락 두절 상태구나. 내 소식 
궁금하진 않은지.. 난 생에 가장 독한 기침을 앓고 있다. 지난 밤엔 기침 
때문에 밤새 잠을 못자고 있다가 새벽이 가까워서야 겨우 눈을 좀 붙였지. 
불면의 밤들이 계속되면서 몸이 점점 무거워 짐을 느낀다. 아침이면 힘겹게 
눈을 뜨고, 억지로 화장을 하고 맛없는 아침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그리고 또 다시 이 회색 빛 도시로 나오지. 
내일은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설레임 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내게 힘이 되어 
다오. 끝까지 푸르를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다오. 

내일은 5월 1일 노동절이야.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절이 대단히 커다란 의미를 
갖지. 이제는 체제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노동절은 여전히 큰 명절이지. 
전승기념일(5월9일) 다음으로 커다란 행사들이 열리니 말야.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아직은 모르지만 분명 어떤 술렁임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내일은 내게도, 네게도 더 멋진 일들이 일어나길 빌며.. 이만 잘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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