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portsLeisure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GoSeahawks) 날 짜 (Date): 2006년 3월 10일 금요일 오전 04시 30분 54초 제 목(Title): Re: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한일전... 예 선동렬 고등학교 투수시절 노히트 노런 기록있습니다. 기억을 좀더 자세하게 하기 위해서 또 검색해봤습니다. 출처: 남도일보 [호남야구100년사]‘무등산 폭격기’에서‘나고야의 태양’으로… 한국 야구사 새로쓴‘국보’ 맨땅에서 메이저리그까지 <21> 선동렬의 발자취 80년 광주일고 대통령배대회 우승 주역 봉황대기서 생애 첫 노히트노런 달성 입력시간 : 2005. 08.09. 00:00 ‘멍게’에서 ‘무등산 폭격기’, ‘국보급 투수’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김응룡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아 삼성 사령탑에 오른 선동렬 감독이 걸어왔던 길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말들이다. 그는 이제 ‘남의 사람’이 돼버렸다.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우승 청부사에 목말라 있던 삼성에 둥지를 틀었고 최고 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를 두고 호남을 떠나 아쉽다는 얘기가 많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선동렬이란 선수를 통해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 광주일고로 무등중 졸업반이던 1978년. 그는 고교진학을 앞두고 난데없는 스카우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광주상고와 광주일고에서 서로 자신을 데려가야겠다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기 때문. 사실 선동렬의 진로는 광주상고로 이미 점찍어져 있었다. 무등중 동기생 5명을 모두 받아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는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부친이 그토록 희망하던 학교는 바로 광주일고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광주일고는 그를 포함한 3명만을 ‘덤’으로 받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부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선동렬은 결국 광주일고로 방향을 틀었고 허세환과 최상주 등과 6년째 한솥밥을 먹게 됐다. 광주일고의 마운드는 철벽 그 자체였다. 빠른 볼과 정교한 타격으로 무장한 이상윤과 고교생 치고 또래들보다 변화구 구사력이 월등히 앞선 방수원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광주일고에 선동렬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들 모습에 주눅이 든 채 1년을 보낸 선동렬은 1979년, 기라성같은 선배들이 졸업하고 남겨진 빈자리를 꿰찼다. 주전투수로 나서면서 팀을 대통령배를 제패한 것. 조창수 감독의 조련아래 커브와 슬라이더를 연마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뛰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이 때문에 전국을 호령하던 천안북일고의 이상군, 중앙고 안언학, 명지고 정삼흠 등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선동렬의 질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어 벌어진 봉황대기에서 만난 경기고를 상대로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스스로 빛나는 진주’를 대학팀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이번에도 부친의 ‘입김’에 따라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한양대를 포기하고 ‘선후배 기강이 센’ 고려대로 방향을 틀었다. ▲태극마크 달다 1982년 9월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2-2로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던 8회말, 동국대 4학년이던 한대화가 역전 결승 스리런으로 일본의 높디 높은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당시 고려대 2학년에 재학중인 선동렬은 9회까지 혼신의 역투로 팀 승리를 지켜냈다. 선동렬은 1981년 7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최우수투수로 선정돼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다. 하지만 최동원과 김시진 임호균이 버티는 상황에서 선동렬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다. 그만큼 선배들의 자리가 확고했다. 그러나 선동렬은 단 한 번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떨쳤다. 미국과의 예선전에 등판한 선동렬은 탈삼진 15개를 기록하며 한국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이에 코치진의 믿음도 배가됐다. 대만과의 경기에 또다시 투입된 그는 역시 무실점 완봉승을 거두며 일약 한국의 기둥 투수로 발돋움했다. 코치진의 격려와 찬스 때마다 터진 타선의 지원으로 선동렬은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철완을 과시하며 팀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경기가 끝난 후 시상식에서 그는 대회 최우수선수상, 최다승리투수상, 포지션별 올스타상을 휩쓸어 당대 최고의 우완투수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1년뒤 다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동렬은 이제 든든한 에이스로 거듭나 있었고 이듬해 LA올림픽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나가는 대회마다 상복도 뒤따랐다. 1983년 대륙간컵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탄 선동렬은 1984년 쿠바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최우수 방어율상을 수상했다. ▲정상에 우뚝 서다 수많은 부침 끝에 1985년 후기리그부터 프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선동렬의 첫 걸음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의 데뷔전은 1985년 7월 2일 광주에서 열린 삼성전. 7회까지 삼성 선발 김일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버텨 나갔다. 그러나 선동렬은 8회 허규옥에게 내야안타를, 이해창에 우전안타를 내준 뒤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가 기록했던 성적은 7.2이닝 9안타 5실점. 쓰디쓴 패배의 잔이었다. 좌절을 맛봤던 선동렬은 나흘 뒤 문희수를 구원, 4이닝 1피안타로 첫 세이브를 따낸 뒤 7월 11일 청보전에서 마침내 구원승으로 프로 첫 승을 신고했다. 지금도 언론매체를 장식하는 ‘무등산 폭격기’란 애칭이 그때 생겨났다. 광주로 출장 온 어느 기자가 그라운드에 낮게 깔리는 묵직한 공을 보고 이같은 닉네임을 붙였다고. 1985년 선동렬이 받아쥔 성적표는 25경기 등판, 7승4패8세이브, 방어율 1.70. 어느 하나 뒤질 기록은 아니었지만 동료 이순철에 신인왕 감투가 돌아가자 선동렬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1986년. 그는 시즌 개막전 이후 5월이 채 지나기도 전인 17경기 만에 10승을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다. 방어율은 0.89. 이후 선동렬은 20승을 향한 전력질주를 시작했고 8월 27일 빙그레전을 완투하면서 마침내 20승 고지에 올라섰다. 방어율도 0.99로 국내 투수 중 최초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이같은 선동렬의 신들린 피칭 뒤에는 경험이 풍부한 김무종의 조언과 장채근 정회열이란 찰떡 배터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야구 마운드 평정 투수 3관왕이란 승률과 방어율 다승왕을 차지하는 것.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선동렬은 이를 ‘밥 먹듯’ 혼자 독식했다. 1982년 OB 박철순이 3관왕을 차지한 것이 유일할 정도였고 3년연속 3관왕은 60년 전통의 일본은 물론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례가 없다하니 말 다 한것 아닌가. 한국 프로야구의 마운드를 점령하다시피 한 선동렬은 1990년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다. 개인통산 100승과 1천 탈삼진. 그때 27살의 팔팔한 청년이던 그는 프로 입단 6년만에 100승 고지에 다다랐고 프로야구에 십수년 몸을 담은 선배들도 달성하지 못할 탈삼진 기록을 만들어 냈다. ▲꿈에 그리던 일본 진출 1995년 11월 23일. 선동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박건배 해태 구단주는 그날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OB구단의 시즌 우승 축하회 자리를 통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한 뒤 선동렬의 해외진출 여부를 결정짓겠다”고 공표했다. ‘국보급 투수의 해외 진출 임박’이란 제하를 단 신문들이 ‘바람’을 잡으면서 선동렬의 해외진출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단주의 확실한 언질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11월 30일. 박 구단주는 구름처럼 몰려든 보도진을 향해 “마치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으로 선동렬의 해외진출을 허락한다”고 발표했다. 94년 한양대에 재학중인 박찬호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과 95년 고려대 조성민의 일본 요미우리 입단이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 왔을 것임을 감안하다면 이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선동렬에게 또다른 ‘신세계’를 열어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는 선수 말년에 접어들면서 해외 진출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 받고 싶어했다.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선동렬이었는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통하는 진정한 ‘국가대표급 투수’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는게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1996년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선동렬의 성공 신화는 그칠 줄 몰랐다. 96년 한 때 일본 타자 공략에 실패하면서 5승1패 3세이브(평균자책 5.50)를 기록, 2군으로 떨어는 불운을 겪었지만 이듬해 특급 마무리로 화려하게 재기해 65경기 무패행진을 달렸다. 일본 프로야구 4년 동안 162경기에 등판, 10승4패 98세이브에 평균자책 2.70을 남긴 선동렬은 일본 진출 3년만인 1999년 11월 메이저리그의 유혹도 뿌리친 채 주저없이 은퇴했다. That old law about "an eye for an eye" leaves everybody blind. The time is always right to do the right t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