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kM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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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okMyung ] in KIDS
글 쓴 이(By): greenie (. 푸르니 .)
날 짜 (Date): 1996년02월20일(화) 09시57분36초 KST
제 목(Title): 잃어버리기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후후~  얘가 왜 이러는 거야.  빨랑 정신차리지
않음 혼낼 거야~  하긴 뭐, 가끔씩 이럴 때가 있긴 했으니까...
   이십분이 넘게 기다리면서 웃음은 무표정--웃음과 경악의 중간단계--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동시에 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하드가 나간 것이다.  하드는 읽히지만, FAT과 화일 위치가 뒤죽박죽이 된
거다.  정리해둔 노트들, 갈무리해둔 글들, 아끼는 편지도 함께...  그리고...
난...  지난 2년 반의 일기를 잃어버린 거다.

   컴퓨터를 끄고 어두운 방안에 앉아 있었다.  하나씩 스쳐가는 그동안의 
기억들.  처음 미국에 오고, 컴퓨터를 사고, 이사를 가고, 주말과 밤에 일하고 
낮에 학교 다니던 첫 일년, 돈에 관한 생각들, 사랑의 느낌, 떨어져 있는 외로움,
생활속의 작은 이야기들, 순간의 기분들...  모든 게 적혀 있었지...


   다음날은 월요일, 개강 전날.  위로를 받고 싶었던 그날 밤 전화에서, 난 잊을
수 없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난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다섯 주가 지난 지금...  조금씩 정리가 된다.  흐뭇하고 행복한 기억은 고운
그대로, 찢어지고 밟힌 기억은 잔인한 그대로 간직하고...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계속 살아 나가는 거야...  찢긴 기억의 파편이 고운 추억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행복한 추억들이 가슴의 상처를 덮어 주겠지
...  그때까진, 차분히 기다리는 거야.

   곱게 키운 아이들을 하나씩 떠나 보내듯, 작별에의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허전한 빈 방에서 떠올리기엔 부족함없는 추억들을 남기고 간 걸로...  난 행복을
느껴야 할까봐.


   나의 고운 벗 꼬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치만 너라면, 소중한 추억을
그런 일에서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어.  걱정같은 거 너무 많이 하지 않을께.
그만 슬퍼하라구 꼬옥~ 안아줬음 좋겠다...

   '잃어버림'이란 추억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눈물로 아쉬워하지만...  떠나
보낸 건 추억 자체는 아니니까...  우린 그 빈 자리를 고운 기억들로 채울 수 
있을 거야.  :)

   늘 그렇듯, 행복을 찾아 나가길 바래...  누군가가 항상 널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  

   건강하렴~  비타민두 잘 챙겨먹구~  보구 싶다... 



      푸르니          "A hen is only an egg's way of making another egg."

                                    Samuel Butler, 1835-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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