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oGang ] in KIDS 글 쓴 이(By): lache (김남일) 날 짜 (Date): 1994년07월31일(일) 01시07분47초 KDT 제 목(Title): 철길위에 뿌려진 두 시간의 오후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시작되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문이 잠겨 있었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만 내가 가진 열쇠는 하나 뿐이다. 하지만 집 문의 자물쇠는 둘이다. 그런데 둘 다 잠겨 있었다. 마침 시사저널이 와 있길래( 동생이 정기 구독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걸 돈 주고 볼 리가 없다. ) 그걸 읽으면서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사 저널을 다 읽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학교로 다시 돌아갈까 하고 전철역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서점에나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책이 사고 싶어졌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다섯 번 정도 빌려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사고 싶어졌다. 바보스러운 이야기이긴 해도 좋은 책이다. 색깔도 좋고 종이질도 좋다. 게다가 책의 두께와 무게도 꼭 맞아서 손에 들면 아주 좋은 느낌이 든다. 이걸 세로로 들고 사람의 경골을 치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촌 문고에 가야 겠다고 마음 먹고 전철을 탔다. 그런데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 도중 갑자기 이 전철이 정말로 2호선 전체를 돌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혹시 중간에 잠시 쉬었다가 좀 건너뛰고 집 앞의 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 이번 기회에 한 번 확인해 보자. 어차피 시간을 때우려고 하는 것이므로 별로 상관없잖아? 게다가 전철은 에어콘이 가동중이어서 시원했다. 그렇게 되어서 나는 언제나 내가 타곤 하는 자리에 멍청하게 서있었다. 신도림 역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탔는데 이 아주머니가 바구니( 쇼울더 백인지도 모르겠다. )에 개를 넣고 있었다. 작은 개가 아닌 그럭 저럭 큰 개였다. 털도 많았다. 아주머니는 개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체온이 36.5도이지만 개는 40도 정도 된다. 36.5도 물체가 둘이 붙어있어도 더운 여름인데 40도 물체하고 36.5도 물체하고 붙어 있으니 당연히 덥지. 흐음. 팔자 좋은 개로군. 생각하고 계속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아마 미시족이었던 모양이다. 머리카락도 빨갛다. 강백호의 인기를 실감했다. 아주머니는 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내가 서 있는 앞자리 )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개가 귀엽다는둥, 순해서 물지 않는다는 둥. 그리고 값이 40만원이라는 둥. 나에게도 누가 개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팔아서 사운드 카드하고 씨디 롬 드라이브하고 살텐데. 돈이 좀 남으면 고속 모뎀도... 그런데 왜 저렇게 큰 개를( 그리 크지 않지만 그리 작지도 않다 ) 이런 더운 날씨에 데리고 다닐까 생각하다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이유를 알아냈는데 털을 잘라주기 위해서 데리고 나온 것이다. 음, 털 깎는데 2만원 정도라고 한다. 내 머리카락도 자를 때 2만원 정도 줬던가? 전철은 신촌 역을 지났다.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더워서 다들 집에 있는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학교 안에 있거나. 전철이 시청에 가까와질 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도 나처럼 전철 여행중인가? 내리지 않고 타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전철 안의 사람수가 증가한다. 그렇게 여러 역을 지나서 그 아주머니 옆에 어떤 아저씨가 앉게 되었는데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 좀 아니꼬왔나 보다. 개 팔자 좋다고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청 역 쯤에서 아줌마가 내렸다.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던 한 쌍의 남녀가 자리에 앉았다. 이 남녀는 일본어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기심으로 잠시 관찰을 해 본 결과 여자는 일본인이고 남자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재미있다. 오늘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구나. 하긴 나도 재미있는 사람 축에 끼일런지도 모른다. 외관상으로는. 남자는 여자에게 뭐라고 설명해 주고 있었고 여자는 가끔 물어보기도 하면서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마 남자가 여자를 안내해 주고 있었나 보다. 자리에 앉을 적에 내 얘기를 조금 하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긴 남자라고. 하지만 나는 모른척 했다. 결국 그들의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아간 것 같았다. 두 사람을 관찰하면서 창 밖을 보았다. 내가 처음 보는 곳이 잔뜩 나왔다. 역 이름도 생소하다. 뚝섬도 있었고 구의도 있었고... 이상한 다리도 보았다. 마치 소풍같다. 서울이라는 곳이 상당히 넓구나. 건국대 역을 지날 때 한국의 대학교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하고 그리고 서강대등등을 얘기했다. "와따시가 아노 서강 다이가끄노 각세에데스. 기이떼르 쯔모리와 나깠딴데스께도... 스이마셍."이라고 말을 하려다가 바보같아서 관두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를 보면서 나오코가 저렇게 생겼을까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다. 혹시 미도리와 닮지 않았을까하고 다시 살펴보았지만 역시 알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잠실 역에서 내렸다. 또 다른 어떤 남녀가 내 앞에 앉았다. 둘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철의 소음과 다른 사람들의 대화로 전철안은 좀 소란스러웠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말을 빨아 들이는 진공 청소기 같았다. 내 머리 속은 심해처럼 고요했다. 전철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초롱아귀가 머릿속에서 헤엄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장님 아저씨가 하모니카를 불면서 지나갔다. 처음에는 애니 로리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계속 들어보니 다른 곡이었다. 그 아저씨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전철의 제일 앞 칸에 타고 있었다. ) 이미 여러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았을 것이므로 다시 간다면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반대방향으로 간다면 방금 지나친 곳을 바로 지나게 되므로 시간 간격이 너무 적다. 따라서 방금 마주친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될 확률이 높게 된다. 야, 이건 마치 디스크 스케쥴링같은데. 그 아저씨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전철에서 내린 것이다. 아마 다음 전철에 탈 것이다. 그러면 이전에 마주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과연. 흐음. 아아. 이제는 다리가 아프다. 나는 어떤 이유로 차를 탈 때에 자리에 앉지 않는다. ( 어떤 이유인지는 잊어버렸다. 아마 멀미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 바퀴 돌아 구로공단 역에서 내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없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한 번 더 돌아볼까 하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두었다. 지금쯤이면 집에 누군가 와 있을 것이다.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진 하루였다. 전철 여행으로 얻은 것은 다리의 통증뿐이다. Frantic Lachesis s921025@ccs.sogang.ac.kr PS. 누구 비두로기 테입 가진 사람 없나? 아니면 복사해 줄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