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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8월30일(화) 21시05분43초 KDT
제 목(Title): 쓰레기통 속에...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 석정 



빗속에 집을 나섰다. 시원스런 비... 

전에도 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그 좋아하는 정도와 색깔이 다르다.

우산을 들고 모퉁이를 돌다가 비에 흠뻑 젖은 종이 상자로 된 쓰레기통을 보았다.

어느 집 대문간에 어색한 모습으로 찌그러진 쓰레기통...

흔히 보는 광경이라 별 생각 없이 지나치다가... 그 쓰레기통의 맨 위에 얹혀 있는

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칙칙한 분홍색의 빛바랜 종이에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촛불 하나. 세로 쓰기로 '촛불'이란 제목과 한자로 씌어진 석정의 이름...

요즘의 화려하고 깔끔한 책에 비하면 우중충하고 유치한 디자인이지만 저 표지는

눈에 익은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저것은... 석정 시집 '촛불'의 초판본이다.

부산의 부모님 댁(사실은 '우리 집'이라고 해야 하지만...)에서 본 일제 때의 

책 몇 권... 30년대 말의 두툼한 최 현배 '우리 말본' 초판본, '청록집' 초판본과 

더불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석정의 초판본이 이런 곳에 뒹굴고 있다니...

쓰레기통에서 꺼내어 잘 씻어 말리면 안될까... 하고 들여다보았지만 음식 찌꺼기와

담뱃재 등에 뒤덮인 그 더러운 것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때마침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어 손을 대면 허물어져 버릴 듯, 흐느껴 우는 듯한 슬픈 석정...



이런 책을 버리다니... 이 집의 주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책이 지금껏 

간직되어 온 것을 보면 원래의 주인은 시와 책을 무척 아끼는 분이었을 게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이렇게 무심히 버려져 있는 것인가. 그분의 무식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다 버린 것일까. 아니면 가정부나 파출부가

생각없이 청소하다...



브루크너는 슈베르트의 묘지를 옮기는 현장에서 그의 유골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 더러운 것에... 

그 쓰레기통 속에서 석정을 꺼내들지 못한 staire는 아직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집에 한 권 있기 때문... 이라고

해 봐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석정은 쓰레기통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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