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U ] in KIDS 글 쓴 이(By): chang (장상현) 날 짜 (Date): 2002년 12월 9일 월요일 오후 10시 42분 37초 제 목(Title): 민호기 교수님을 생각하며 며칠 사이에 과학원 김영재박사와 민호기 교수님 부음을 같이 듣는군요. 민호기 교수님.. 수업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지만, 탁구를 좋아했던 관계로 그리고 같은 건물에 있었던 관계로 비교적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오랜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에 들르면 꼭 모교를 찾을 때마다 후생관 탁구장에 올라가 교수님을 찾곤했었죠. 그때마다 어김없이 나이를 잊으신채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탁구부와 탁구를 치고 계셨고 나를 보면 반가와하시며 손을 내미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나도 이젠 늙었어..." 하시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군요. 덩치에 어울리지않게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던 분이었고, 그걸 큰 목소리로 감추시던 분이었죠. 수업시간에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던 여학생을 남학생인 줄 착각하고, "오늘은 여학생은 결석했군"했다가,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고 부끄러워서 5분간 말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신 분이었습니다. 절대로 맥주집에 가시지 않는다고 하셔서 왜 그런가 했더니, 아주 오래전에 교수님들과 술을 드시러 갔다가, 교수님이 앉을때 의자가 부서져서 바닥에 주저 앉고 마셨답니다. 특이하게 생긴 거구의 남자가 바닥에 넘어지자, 종업원들과 손님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는 맥주집에 가지 않으셨다는 군요. 수학보다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민교수님은 미국에서 열린 천문학회에 참가하셨었죠. (이미 은퇴하셨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제 친구 부부가 그 학회에 갔다가 민교수님과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답니다. 그때 민교수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군요. 민교수님의 어머님이 러시아계라고 하죠. 저도 정확한 사실은 모릅니다. 하지만 교수님이 부유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당시에 미국유학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집이었겠죠. 미국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민교수님은 머리를 감다가 맞은 편 기숙사의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답니다. 그분이랑 서로 창이 맞닿아 있어서 나중에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죠. 핀란드에서 유학온 그 여학생과 그렇게 만난 민교수님은 창밖에서 보이면 손을 흔들던 사이에서 어느새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 민교수님은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래서 둘은 헤어지기로 했었답니다. 한국에 돌아온 민교수님에게 어느날 그분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는데, 편지는 읽기가 힘들정도로 얼룩이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편지를 쓰면서 흘린 눈물자국이라는 것을 깨달은 민교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돌아가 그분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두분은 핀란드로 부인의 가족을 만나러 갔었는데, 처음보는 외국인을 무슨 원숭이 보듯 신기해하는 것이 싫어서 정말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미국에 가서 살기로 했다는 군요. 그런데 얼마후 핀란드에 있는 장모님이 노년에 소아마비로 쓰러졌답니다. 민교수님 부인은 자신밖에는 어머니를 돌볼사람이 없으니까 핀란드로 가야한다고 했고, 민교수님은 자기는 절대 핀란드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답니다. 결국 부인은 자식들과 핀란드로 떠나고, 자신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하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합치기로 기약하고.. 그러나 4.19와 5.16을 거치면서 민교수님의 집안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이 몰수되고, 연좌제로 민교수님도 출국이 금지되었답니다. 결국 시간이 너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살 기회도 놓치고 민교수님은 오랜 세월을 가족을 그리워하며 한국서 혼자 살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핀란드 여자들 참 무서워.. 그렇게 다시 못만나게 되어도 절대 이혼은 안한다는군", 제 친구들에게 허탈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답니다. 수십년동안, 외국 학회 참가들을 핑계로 외국에 나오면서, 지금은 미국에사는 자식들과 핀란드의 부인을 일년에 한번씩 만나고 왔었다고 합니다. 돌아가실때까지 그렇게 홀몸을 고집하신 것이 그분에 대한 사랑의 증거였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