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U ] in KIDS 글 쓴 이(By): budpil ( AD FINEM) 날 짜 (Date): 2002년 11월 20일 수요일 오후 04시 12분 02초 제 목(Title): [펌]학벌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기사. '후보단일화 주역들이 민청학련 감방동기들이라고?' 그렇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후보단일화 협상테이블을 이끌고 있는 주역들은 이른바 '민청학련 세대'들이다. 국민통합21의 이철 전협상단장은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이전단장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전의원은 현재 공식 직함은 없지만 노후보 쪽에서 협상의 막후 창구를 맡고 있다. 민주당 이해찬 협상단장은 이전단장(69학번), 유전의원(67학번)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로 역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형수 이철·유인태'의 변호사는 국민통합21 강신옥 전창당기획단장이었다. 이들이 제16대 대통령선거의 핵으로 급부상할 수 있는 후보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후보단일화와 인연이 깊다. 이들은 '단일화'라는 명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87년 대선부터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유전의원과 단일화의 관계는 누구보다 밀접했다. 그는 87년 김영삼·김대중 후보단일화를 위한 '대통령후보 단일화 국민협의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97년 서울시장 선거 때는 야권 단일후보로 조순 전시장을 밀었다. ~~~~요기 부터. 좀더 거슬러올라가면 민청학련 세대와 단일화의 인연은 1970년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선거에까지 닿는다. 70년대 이후 대학 학생회장은 '학생운동'과 동의어였지만 이전에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명문고와 비명문고의 구분이 엄연하던 시절, 학생회장은 명문고 동문회 좌장들끼리 '밀실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자리였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우 경기고·경북고·광주일고·전남고 연합세력이 오랫동안 학생회장 자리를 독식하다시피 했으며, 라이벌 서울고가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운동권'이래 봤자 소수에 불과했다. 이 흐름이 깨진 때가 70년 학생회장 선거였다. 당시 3학년이던 유전의원 등 '운동권 학생'들은 "이번에는 운동권 학생회장을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유전의원은 전해인 69년 운동권 선배인 김세균(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의 권유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경험이 있었다. 이때 유전의원을 누르고 당선된 사람은 정치학과의 노동일(대한정치학회 회장)이었다. 70년 선거에서는 운동권 쪽에서 '단일화'라는 화두가 등장했다. 이때 단일 후보로 추대된 인물이 현 민주당 의원인 정치학과 이호웅이었다. 이의원도 현재 후보단일화 협상단의 주역 가운데 한명이다. 당시 이의원 외에 경기고 출신 1명, 광주일고 출신 1명이 출마해 선거는 3파전으로 치러졌다. 이의원은 비교적 동문회 세력이 약했던 제물포고 출신이다. 기존 동문회 질서를 무시하고 선거가 치러지자 난리가 났다. 특히 후보를 낸 경기고 문리대 동문회(경문회)에서는 다른 학교 후보를 밀었다는 이유로 사회학과 67학번인 유전의원과 이각범 전청와대 수석을 동문회에서 제명하기까지 했다. 유전의원은 "4수를 해서 들어온 동문 선배 한분은 '유인태·이각범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침을 뱉어야 한다'며 흥분했다"고 회상했다. 이 '선배'는 지금 통일부장관인 정세현씨다. 우여곡절 끝에 이의원은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야말로 '돈도 조직도 없는' 후보였지만 이의원은 단일화의 위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 표를 모았다. 69년 3선개헌 파동으로 대학가에 확산된 반정부 분위기도 운동권 후보의 당선을 가능케 했다. 당시 이철 전의원은 69년 강제 징집됐고, 이해찬 의원은 입학 전이라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내에 머물렀더라면 유전의원 등과 뜻을 함께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의 '단일화'는 대학 학생회라는 작은 조직 안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역들은 72년 10월유신을 거치며 한국 정치사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지금의 후보단일화 논의를 이끌고 있다. 유전의원은 최근 암초에 걸린 단일화 논의에 대해 "두 후보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작은 오해는 막후에서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낙관했다. 유전의원의 경우 대학 시절 한번 단일화의 꿈을 이뤘다. 87년에는 단일화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유전의원을 포함한 일부 민청학련 세대들이 2002년 겨울, 단일화의 꿈을 이루려 하고 있다. 후보단일화 마당은 이들 민청학련 세대가 자신들의 정치력을 시험받는 무대이기도 한 것이다. 최민규 기자 didofido@hot.co.kr ~~~~~~~~~~~~~~~~~~~~~~~~~~~~~~~~~~~~~~~~~~~~~~~~~~~~ 왜들 그리 고교평준화를 못잡아먹어서 안달들인지 알만하죠? 아참 굳데이 기사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