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3월09일(목) 17시22분02초 KST 제 목(Title): 가난한 시인과 백자 연적 가슴을 다친 누이는 오지 못할 사람의 편지를 받고 다시 한 번 송두리째 가슴이 찢긴다. - 박재삼 '비 오는 날' 제목을 보면 무슨 낭만적인 얘기나 향기 그윽한 얘기를 연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시정 사람들의 진솔하고 걸쩍지근한 사연만도 못한 서글픈 이야기일 뿐이다. 70년대 말 아니면 80년대 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산의 펜 클럽 모임에 어쩌다 나가게 되었다. (물론 staire가 회원이었을 리는 만무하고 어머니를 따라 구경삼아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부산 경남 지역 펜 클럽 모임이면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네 사람의 거물이 보이지를 않는 거다. 김동리, 오영수, 김상옥, 박재삼... 오영수님은 그 모임 직전에 타계하셨으니 그렇다고 하고, 김동리는 펜 클럽 모임에 나올 처지가 못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김동리의 명예욕과 권력지향주의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군사 정권의 비호를 등에 업고 한국 문인 협회 회장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조연현 회장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 김동리에게 차례가 돌아올 가능성이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성급한 김동리는 '문학 협회'인가 하는 단체를 만들어 문단을 분열시키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던 시기였으니... 조연현씨가 한국 펜 클럽 회장직을 겸임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얼굴 들고 펜 클럽을 찾을 수 없었던 거다. 김상옥과 박재삼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한심스럽다. 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분들은 김상옥의 '백자 2제'를 기억할 것이다. 학과 호접 문양이 새겨진 백자 연적과 분청 사기 이야기. 은근한 묵향과 운치가 흐르는 그럴듯한 분위기의 글이지만 그 이면에는 추잡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깔려 있다. 김상옥은 도자기를 비롯한 골동품 수집에 광적일 정도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미 작고한 오영수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였으나 골동품 수집의 취미가 일치하다보니 서로의 집을 방문하거나 초청하여 수집품을 구경하고 자랑하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문제의 어느날, 오영수의 집을 찾은 김상옥은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오영수가 진품 이조 백자 연적을 어디서 구한 것이다. 욕심에 눈이 먼 김상옥은 그 집을 나설 때 그만 그 연적을 슬쩍 훔쳐낸다. 조그만 연적이니 어디 감추어 들고 나오는 건 손바닥 뒤집기였을 터이다. 물론 오영수는 그런 걸 그냥 넘길 리 없는 꼬장꼬장한 영감... 공개적인 자리에서 '도둑놈 초정 (김상옥의 호)' 어쩌고 하며 법석을 떨었던 거다. 이쯤에서 그냥 연적을 돌려주고 미안하다, 하도 탐나서 반 장난으로 그랬지야고 했으면 어찌어찌 넘어갔을 것을, 탐욕에 눈이 멀면 바보가 되는 건지 김상옥은 끝끝내 자신의 범행(?) 을 부인하며 '이 연적은 원래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가난한 시인 박재삼이 등장한다. 김상옥의 제자였던 박재삼은 곤경에 빠진 은사 김상옥의 부탁으로 중재를 맡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요령과 잔꾀에는 빵점에 가까운 순박한 박재삼이 헤르메스처럼 오영수와 김상옥의 집을 오가며 일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 결국 김상옥은 일을 무마하려고 오영수에게 쥐어준 추사 글씨 한 점을 포함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연적은 연적대로 도로 빼앗기고 거기에다 동네방네 소문까지 뻗쳐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애꿎은 박재삼에게 분풀이를 했으니 억울하게 된 건 박재삼이다. 삼천포의 촌부 박재삼, 그의 시만큼이나 가난하고 질박하였던 그로서는 아무리 스승이고 선배라지만 돈으로 멋과 낭만을 농하던 김상옥 등의 스노비즘에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 일 이후 박재삼은 김상옥의 그늘을 벗어나게 된다. 국어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는 이들의 추저분한 이야기와 그 사이에 말려들어 마음을 다친 한 가난한 시인... 이들의 빈 자리가 유난히 공허하게 뻥 뚫려보이던 펜 클럽 모임. 박재삼의 1000원짜리 시집을 뒤적이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향기롭지 못한 이야기 하나를 보드에 보태고 만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