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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soliton (김 찬주)
날 짜 (Date): 1994년08월12일(금) 21시36분48초 KDT
제 목(Title): [R] L교수 강의노트: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L교수 밑에서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는
그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처음으로 학부 역학
강의를 맡으셨을 때 (Landau네 학번이 배웠을 때) 제가 그 과목 조교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선생님 특유의 자로 잰 듯한 글씨로 정성들여 만든 강의 노트중의
일부를 주셨습니다. 거기엔 조금 특이한 것들도 있습니다. 잡지에서 오려붙인
그림들이나 이곳 저곳에서 찾아 모은 명언들... 이런 것들을 가리키며 저에게
`강의 도중에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같은 과목을 2년 연속 가르쳐도 강의노트를 다시 만드십니다.
책 서너권을 앞에 놓고 전년도 강의노트를 보시면서 필요한 곳은 완전히 다시 쓰고
일부는 보완하여 가위와 스카치테이프로 잘라 붙입니다. 강의 노트에 있는 구절
하나하나는 모두 그 과정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칩니다. 그리고 강의에서 꼭
해야되겠다고 생각하는 보충설명이나 comment같은 것도 연필이나 붉은 글씨로
조그맣게 다 적어놓으십니다. 역학 뿐이 아니고 어떤 과목이든지 다 이런식으로
강의노트를 만드십니다. 선생님의 연구실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본 사람은
책장가득히 꽂아놓은 노트들---각종 과목을 강의한 노트(과목이름과 강의한 때가
표지에 붙어있습니다.)와 온갖 주제의 연구노트---을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노트를 만드느라 투자하는 시간은 엄청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직접 해보지 않은 부분은 그 노트에 아마 한 구절도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연구실에 가보면 무언가를 쓰고 계십니다. 가위와
테이프를 언제든 쓸 수 있게 옆에 두시고 연필과 붉은 펜을 들고 주석을
달아가며 인쇄한 것과 같은 강의노트를 만들고 계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책을 베끼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면 한 Chapter를 몽땅 베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모두 손수 계산해보고 잘 쓰여졌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서입니다. 그리고 매 강의전에 강의 준비를 꼭 확인하고 강의에
들어가십니다. 일반물리 수준의 하찮은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yonho님이 L교수님의 강의노트를 실제로 보셨다니까 할 말은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특별한 상황(예를 들어 진도가 심각하게 늦어졌다든가)이 아니면
학생들에게 강의노트를 주시지 않습니다. 교육이 제대로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얼마만큼의 강의노트를 yonho님이 직접 보셨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은 아닐 겁니다. (한 학기 강의노트의 분량은 실로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의 역학 책과 강의노트가 앞에 써놓은 인용구부터 일치한다고 했는데
강의노트의 일부가 같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일치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또 이곳 저곳을 자르고 새로 덧붙인, 그리고 연필과 붉은
펜으로 곳곳에 주석을 달아둔 강의노트를 본다면 그냥 무작정 베끼기만 한것은
아니라고 느끼실 겁니다. 인용구에 대해서도 잠시 말하자면 선생님 책상에는
각종 잡지며 책에서 오려낸 종이들이 유리판 밑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들은 수시로 사라지고 바뀝니다. 과제물 앞에 써놓는 인용구들은 대부분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만약 yonho님이 완벽한 강의노트와 강의 준비에 반했다가 실망했다면 저는 그
실망은 근거없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6년이 넘게 그분 곁에서
지켜본 제가 보장하는 것이니 믿으셔도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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