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NU ] in KIDS 글 쓴 이(By): eyedee (아이디) 날 짜 (Date): 1995년02월15일(수) 11시48분27초 KST 제 목(Title): * 80년대 - 대학가기 전에... 중학교 2학년 땐가(?) 집에서 누나의 대학시절 윤리 교재를 읽어 보았다. 그 교재는 나중에 내가 대학서 배운 좌경사상 비판에만 열중인 윤리교재와는 달리 알기 쉽게 (자유/의회/부르조아/대의) 민주주의의 배경과 원리, 당위성에 대해 서술한 책이었다. 이책은 내게 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하고 다양성(복수정당제, 언론.사상의 자유..)이 왜 보장되어야하는지 가르켜주었다. 그책엔 박정희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지만 나는 그가 왜 나쁜 놈인지 잘알게되었다. 그때 생긴 가치관은 박정희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게 했을 뿐아니라 대학 입학후 사회주의에 호소력를 느끼면서도 서구식 민주체제가 전제 되지않는 사회주의 이념에 동의할 수 없게한 한 요인이 되었다. 이후 체제홍보용 TV프로를 보거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뭔가 답답하고 내목에 누가 개줄을 채운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79년, 내가 고1이었을 때 희망이 비치는 듯했다. 연금중이던 DJ가 YS 를 밀고 YS가 신민당 당권을 쥐자 박정권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나 재야인사들의 움직임도 있었을 것이나 그런건 신문에 전혀 안나니 알길이 없었다. YH여공 농성사태에 이어 부마항쟁이 일어나더니 10월 27일 아침 방송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과 장송곡이 나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기쁨과 설레임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얼마후 보안사령관이 TV에 나와 수사발표를 하였다. 머리가 까진 놈인 데 그놈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놈이 나중에 쿠데타를 할줄은 그땐 알 수 없었다.. 며칠후 학교에서 시청으로 가서 박정희 사진 앞에 묵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두시간 정도 수업을 안하게되니 박정희가 주고간 선물이라 생각하고 즐거워했다. 우리반 실장이 대표로 앞에서 분향을 했는데 그애의 고모부가 바로 김재규였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정희가 죽기전엔 사방에서 유신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쳐대니 어쩔 때는 박정희에 비판적인 것이 어쩌면 소수의 비뚤어진 생각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박이 죽자 분위기는 돌변, 여기저기서 앞다투어 민주회복 어쩌고 하는게 아닌가.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유신헌법 개정결의를 하였다. 헌법개정논의 자체가 긴급조치 위반사항이었고 의원중 2/3가 엊그제 까지 유신의 기수를 자처하던 사람들이었으니 엄청난 변화였다. 내 생각이 소수의 비뚤어진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학인할 수 있었다. 국회에선 헌법개정에 착수하고 3김씨가 출마하는 대통령 선거가 당연시 되었다. 대세는 민주주의였으나 다시 찜찜한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검열을 받아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는 신문, 민주화를 하겠다면서도 언제까지 하겠다는 일정을 좀체 제시하지않는 정부.... 나중에 생각하니 이원집정제를 흘리고 구체적 정치일정 제시를 미루는 짓들이 바로 학생들을 자극해서 거리로 끌어내 쿠데타의 명분으로 이용� 하려는 신군부의 의도된 음모였던 것 같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발표되었다. 조치의 내용을 보니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민주주의 회복은 이제 끝장이었다. 기복이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군인들이 전면에 나설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그 다음날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광주에서 군인들이 사람들을 개패듯이 패고 대검으로 찔러죽인다는 것 이었다. 우리동네는 광주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광주에 직장이 있어 주말에만 고향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광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설마하면서도 믿지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로 돌아가는 것만도 열받는 일인데 국민의 세금으로 키운 군대가 민주주의해보자는 국민들을 총칼로 도륙을 해대니 어처구니 없고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때의 심정과 나중에 그 사진들을 봤을 때 치오르는 느낌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모래시계를 백번을 본다하더라도 그 당시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학살이 마감된후 그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던 광주에서 나오는 일간지가 배달되었다. 검열 때문에 행간을 읽어야㎎지만 아픔이 전해졌다. 다치거나 죽은 시민들의 상당수가 창상을 입었다는데 사전을 보니 창상이란 칼같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입은 상처라는 것이다. 무식한 검열관의 눈을 피해 시민들이 대검에 찔려죽어간 사실을 전하려 한 기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이후는 생각하기도 싫다... 그저 잊고 지내는게 편할거 같아 일부러 무관심해지려고 애를 쓰기도했다. 하지만 학살자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리고 살인범이 대통령이랍시고 TV에 나올 때는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자 고3이되어 바쁘기고하고 (강제) 야간자습에 학교 근처에 하숙을 하게되니 신문이나 TV볼일이 없어 어느 정도 무관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 공부를 하면서도 그때 대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길이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