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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1월25일(수) 21시26분53초 KST
제 목(Title): 송충이 



"그것들이 보여요, 그것들이 눈에 보여요." 하고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어떤 우물의 번들거리는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그 우물 위로는 오직 그 야만의 우상들만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 장 그르니에, '섬'에서



녀석의 이름은 물론 송충이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애를 송충이라고 불렀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매운 주먹 하나로 입학 첫날부터 자기 위치를 단단히 확보한

녀석. 



staire가 다닌 고등학교는 신설학교라서 선배가 없었다. 1기생 1학년 600명뿐.

그래도 송충이 덕분에 가까운 기계공고 애들과의 패싸움에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서울대 많이 집어넣는 신흥 명문을 꿈꾸던 선생님들께는 당연히 골치덩어리였지만

근신과 정학을 밥먹듯이 당하면서도 송충이는 학교를 계속 다녔다. 



녀석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놈이었다. 사소한 시비에도 주먹이 날았다.

그런데도 선생님께는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한 것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선생님께서 굳이 캐묻지 않으셔도 줄줄 잘도 불었다. 



송충이와 집이 가까운 관계로 녀석을 좀 알게 된 staire로서도 알 수 없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송충이는 어머니가 안 계셨고 일요일이면 아버지와 단둘이 성당을

다녔다. 송충이가 성당을? 애들은 staire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녀석은 성당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staire가 기억하는 한...



송충이의 세례명은 사무엘. 하지만 이 이름으로 송충이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송충이 앞에선 피해야 할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사무엘이라고 부르는 것, 

또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는 것. 이 규칙을 깨뜨리게 되면 

피를 볼 때까지 송충이에게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1년이 지나면서 송충이와 얘기를 좀 하게 되었고 녀석의 비밀을 약간은 엿볼 수 

있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시던 송충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자주 송충이와

어머니를 때리셨고 어느 날 아버지의 손찌검으로 어머니께선 뇌진탕을 일으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께선 마지막 병상에서 송충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에게

대들지 말 것, ('그랬다간 너도 죽을거야...'라고 하셨다지만) 그리고 주일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성당에 갈 것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 아버지의 술버릇은

많이 호전되었고 신기하게도 주일이면 부자가 같이 성당에 나가는 일에도 예외가 

없었다. 사랑도 증오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도는 부자지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성당에 다니는 것을 마치 카인이 이마의 표지를 숨기고 

싶어하듯 그렇게 수치스러워했다. 송충이의 아버지에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카인의 표지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대개 가정 폭력은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게 

마련이고 송충이의 아버지는 살인자의 표지를 달고서 비록 세상의 징벌은 피했으나

영원히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송충이에게 성당은 

무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일요일마다 가고싶지 않은 성당에서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듯한 다른 신도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의 '나쁜 피'를 되씹어야 했던

송충이에게는... 그것은 어머니의 잔혹한 복수였을까? 



파국은 1년이 조금 지나서 찾아왔다. 우리가 2학년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날

송충이네 이웃 아주머니께서 교실을 찾으셨다. 공사판에서 날품을 파시던 송충이 

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쉬는 시간이었고 마침 송충이는 

자리에 없었다. 아주머니께선 교무실에 가셔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며 교실을 

나섰다. 



난감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애들은 송충이가 자리에 돌아와 다음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독일어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묘한 표정으로... 그분의 매끄럽게 울리던 음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사무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집에 가 봐..."

아아... 선생님께선 방금 두 개의 규칙을 모두 깨뜨리셨어요... 



송충이는 총을 맞은 짐승처럼 튀어나갔다. 교단으로 돌진해서 온 몸으로 선생님을

들이받아 쓰러뜨린 뒤 교실 문을 부서질 듯 밀어젖히고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라

보진 못했지만 아마 녀석의 얼굴은 특유의 하얗게 질린 모습이었으리라.



그 날 이후 송충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송충이의 책상은 비어

있었고 교과서 대신 무협소설로 가득 차 있던 송충이의 가방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도 가끔 악몽 속에서 그 느끼한 음성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사무엘, 아버지께서..."



                         (Fiction이 아닙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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