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8월06일(토) 18시48분36초 KDT 제 목(Title): 천재 소녀 질이 나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신 당신 에덴 동산에 뱀을 들여보내신 당신 세상 사람의 얼굴은 지은 죄로 몹시 더러워졌으니 죄인을 용서하고 당신도 사람에게서 죄 사함 받으소서 - 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야트' 어제 저녁, 이모에게서 걸려온 전화. "경이가 죽었대." "경이가요? 왜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대..." 최근 몇 달간 연락을 끊었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바보같이... 경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겨울, 그때 경이는 고등학교 입시를 1달정도 앞둔 중3이었고 staire는 공대 2학년을 마쳐갈 즈음이었다. 이모의 소개로 경이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거다. "학교 성적은 어느 정도?" "1등이에요." "전교 1등?" "예." "늘 1등만 해?" "예..." 음... 그렇다면 굳이 staire에게 배울 필요 없는데...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예정이지?" "잘은 모르지만... 일단 과학고등학교를 가서... 그때 생각할거에요." "왜 과학고등학교를 가는데?" "전 최고가 될거에요. 어느 분야일지는 모르지만요." "흠... '최고'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왜 최고이기를 원하지?" 경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자가 혼자 살면서도 손가락질당하지 않으려면... 최고가 되는 수밖에 없잖아요." "윽... 아니, 왜 혼자 살려는거야?" 경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모를 통해 경이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경이의 어머니는 (이모의 친구) 이대 불문과를 졸업.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경이의 오빠와 경이가 철이 들 무렵 무슨 이유로인지 이혼을 하고 말았다. 두 아이는 경이 어머니께서 기르시게 되었고... 경이 어머니께선 얼마 후 재혼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여관을 경영하는, 돈은 엄청나게 많지만 배우지 못하고 미욱한 남자... 이 분이 지금 경이의 의붓아버지인 셈이다. (경이를 가르치러 경이네 집을 찾아가던 날 꽤 당황했었다. 여관 정문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로 6층(제일 위층)까지 올라가면... 거기에 경이네가 살고 있는 거다.) 의붓아버지와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경이의 오빠는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 빠져버렸고 경이는 안으로 파고들어가 공부만 하는 아이가 되었다. 게다가 '여관'이라고 하는 환경이 어린 남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리 없으니... 경이는 미친듯이 공부에 열중했다. 과학고 입시 준비는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 고등학교 과정을 예습하자는거다.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그러니까 2월 중순쯤엔 이미 수학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를 끝냈고... 좀 어렵다는 일본 문제집이나 영어 소설책 등도 볼 만큼 보고 나서 경이는 대학 교재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반년이 지나기 전에 서울대 수학 교재(S. Lang의 'Calculus'를 그대로 번역만 한)인 '미적분학'과 Hildebrand의 'Advanced calculus'를 끝냈고 그 이후 경이가 본 책을 대충 열거하자면... Arfken의 수리물리학, 이철훈의 일반상대론, Munkres의 위상수학, Gasiorowicz의 양자역학, Rene Thom의 'Structual Stability and Morphogenesis'... staire는 경이를 가르친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이에게 배우는 셈이었고 경이의 수학 실력은 staire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staire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경이네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여관보다는 훨씬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 그러나 여전히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경이의 의붓아버지는 자주 언성을 높여 어머니와 싸웠고 staire는 그걸 모른체할 수 있었지만 경이로서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안방에서의 시끄러운 소리가 경이의 방까지 흘러들어오면 경이는 책을 덮으며 '오늘은 그만 해요. 더 못하겠어요'라고 말하기 일쑤였고... 경이는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면 staire는 거실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집 가정부는 상냥하고 예쁜 아가씨였고 staire에게 늘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어느날인가 경이를 기다리며 가정부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경이가 들어오다 두 사람을 보고는 안색이 변하며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는거다. staire는 곧 경이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왜 그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니?" "그 여자는... 나쁜 사람이에요. 선생님이 그 여자랑 얘기하는 거... 싫어요." 나중에야 알았다. 그 가정부는 말하자면 경이의 의붓아버지의 情婦였던 셈이고 경이 아버지는 경이의 어머니나 경이에게 그걸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다. 부부싸움이 잦았던 것도 그때문이었을까? (바람을 피우더라도 애들에겐 숨겨야 하는 것 아닐까...) 경이가 고3이 되던 3월, staire는 경이에게 물어보았다. "이제 뭘 전공할지 결정했어?" "서울대 기계설계과 갈거에요." "???" 왜 하필 staire가 있는 기설과를? staire는 갑자기 경이가 두려워졌다. 집안에선 마음붙일 데가 없어 공부만 하는 저 아이... 그나마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staire밖에 없긴 했지만... staire는 경이를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해 겨울, 입시를 보고나서 staire는 합격자 명단을 뒤졌으나 경이는 없었다. 나중에야 경이가 수능 시험을 망쳤다는 것, 서울대 가정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2차로 모 여대에 입학했다는 걸 알았다. 더 놀라운 일은... 경이가 과학고 시험에서도 실패했다는 걸 그때야 알았던 거다. 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경이는 집에 있었다. "재수할거니?" "예... 하지만 일단 여기 다니면서..." 경이와 그 이후로도 몇 번 연락이 있었지만 두어 달 전부터 경이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어제... 이모의 전화로 경이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걸 알게 된 거다... 내가 늘 '천재 소녀'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던 경이, 키가 작고 귀엽게 생긴, 초롱한 눈빛이 안경 너머로 반짝이던,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를 좋아하던 경이... 하지만 늘 그 조그만 머리를 갖가지 일들로 괴롭혀야 했던 경이는 이제야 편히 쉴 수 있게 된 거겠지...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