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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landau ()
날 짜 (Date): 1994년11월15일(화) 01시06분03초 KST
제 목(Title): 마로니에와 문리대.




얼마 전에 마로니에라는 그룹이 공전의 히트를 친 노래를 불렀다.그게 아마
'칵테일 사랑' 이었지?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조금 오래 된 옛날 노래에는
'.....지금도 마로니에는~~ 지이~~ 고~~ 있겠지~~~....'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는 소설의 화자가 마로니에의 풍광을
음미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마로니에' 하면 뭔가 약간
우수섞인 분위기도 있고 고고하고 상아탑적이고...하여간에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그런데....그 마로니에 라는 나무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마로니에 수종의 나무는 단
두 그루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그루가 바로 옛날의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세워져 있어서 '마로니에'는 문리대의 상징이었다. 마치 오늘날 열쇠(?)
모양의 교문이 서울대의 상징 이듯이. '마로니에' 라는 단어가 풍기는 약간은
낭만적이고 고고한 분위기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옛날의 문리대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대학에 입학했을때 아버지께서 물리학과가 어느 단대냐고 물으셔서
자연대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못알아 들으시는 것이었다.그런 단대가 있었냐고.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문리대였지 자연대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어느해인가 지도교수님 댁에 새해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과선배라는 분을 소개 
받았는데 교수님이 이 사람이 XX  학번이다...하시니까 그 선배님 가라사대,

"교수님, 제가 문리대에서 졸업한 마지막 학번이란 이야기도 이 아이들에게
 해주십시오...."

서울대는 원래 따로따로 설립된 여러 학교를 한꺼번에 합병해서 세워진 대학이라
종합화이전에는 각각의 단대가 독자적인 캠퍼스를 가지고 있었고 학풍도 다르고
단대간의 경쟁의식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 여러 단대중에서 가장 특색있던 단대는
아마 문리대였을 것이다.

문리대는 ... 지금으로 치면 인문대,사회대,자연대를 합쳐놓은 곳이었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돈 못버는 학문만 골고루 모아놓은 곳이었다. 심지어 경제학과도
상대에 속해 있어서 문리대에는 없었다. 그러니 문리대의 인기도라는 것이야
뻔한 것 아니었겠는가? (물론 정치학과 같은 인기과도 있었다지만..) 의대,공대,
법대,상대 같이 잘 나가는 단대에 비해 문리대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재미난 것은 문리대가 프라이드 하나는 끝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느정도 였느냐 하면, 대학생들은 다 뱃지를 달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단대가
달라도 서울대생들은 다 같은 뱃지를 패용했는데 유독 문리대생들만 따로
'문리대 뱃지' 라는 것을 달아 '티를 내고' 다녔다고 한다.

문리대의 자부심의 근원은 주로 문리대에서는 '순수학문' 만을 취급한다는 선비
정신에 근거하고 있었다. 원래 한국에서는 빈한한 선비를 존경하는 풍조가 있던
데다가...아무래도 내세울 것이 없다가 보니까(?) 그런 거라도 내세워야 목에
힘줄 건덕지가 있었을 법하기도 하다. 

이런 자부심은 문리대만의 독특한 학풍을 낳아서 '정신의 리버럴리즘' 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유주의를 지금도 문리대 출신들은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유주의는 곧잘 첨예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지곤 했단다.
서울대생들은 공부는 안하고 맨날 데모에 술에 건달이나 다름 없다는 이미지는
상당부분 문리대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 시절의 문리대를 다닌 김 승옥 씨는 이렇게 문리대생의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역사의 주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쓸모 없는 공부를 하였고 
 역사의 방관자가  되기에는 너무 배운 것이 아깝다. 그래서 모가 난다."

그래서 문리대에는 학생운동이 많았다. 민청학련 같은 대규모 시국 사건이 문리대
에서 수두룩하게 파생되어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사흘이 멀다하고 
열렸다던  성토대회도 그러한 정신적인 토양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리대가 그 전설을 남기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토록
아름다왔다던 문리대 캠퍼스 탓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마로니에를 중심으로
했던 마로니에 광장이나 지금은 복개 되어 버린 대학천 위에 있었다던 미라보
다리 (이름과 다르게 허접하고 볼품 없었다 함.)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대학로....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화창한
봄날이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문리대의 교정은 '조화미의 극치' 였다고
일컬어진다. (난 깊은 가을날의 자하연 주변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문리대출신의 교수님들은 관악 캠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도
옛 문리대 캠퍼스에 비하면 게임이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런 문리대의 정신적 풍요함이 20년 뒤에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낳고
김윤식 교수와 같은 치열한 비평정신을 낳은 것이다.

지금은....모두 없어져 버렸다. 문리대는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로 공중분해
되어서 법대나 공대 못가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낙인 찍혀 버렸고 
'순수학문'에 대한 자부심과 첨예한 비판정신은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린 채
개인주의의 물결속에 왜소화 되어 가고 있다. 그 극치를 달렸다던 조화미는
이미 옛날에 불도저에 깔아 뭉개져 이제는 대학로에 갔을 때 '서울대학교
유적기념비' 라는 어처구니 없는 모형 하나로 바뀌어 버렸고.
(세상에...유적이라니... 우리는 그럼 미이라란 말인가?)

문리대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그 동숭동 캠퍼스에 그대로 오붓이 남아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가난했을지도 모르고, 지금보다 더 낙후된
시설 속에서 무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만은 지금보다 더욱
풍요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본의 논리가 강요하는
무한경쟁에 시달리며 국가경쟁력 강화의 도구로 인식되는 삭막한 대학이 아니라,
자유와 비판정신으로 상징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아탑으로서 말이다.



    
                              15년만 빨리 태어 났으면 문리대생이 될 뻔했던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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