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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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narosu (일꾼)
날 짜 (Date): 1995년06월07일(수) 02시25분01초 KDT
제 목(Title): 서울 시장 3인 후보의 과거.. 박찬종후보.



      박찬종 의원의 지지자들은 박 의원을 얘기할때 몇가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깨끗하다', '정직하다', '똑똑하다', '일관성있다'

      등이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근거는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현재 정치인 중에서' 또는 '한국

      정치판에서'라는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구민주당 (꼬마 민주당) 당직자

      였던 이아무개씨는 "사류 정치인들 사이에서 삼류정치인이라도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면서 박의원을 평가절하했다.


      박의원을 비난하는 측에서도 표현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표현들은

      '분파주의자', '독불장군', '돈키호테', '조직과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 '바바리 코트를 입은 늑대'등이다. 이 비난을 자세히 보면 지지자

      들이 갖는 이미지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 조직 생활중에

      대부분 이런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 후에 신민당

      주류 계열로부터 받은 원색적인 비난인 '바바리 코트를 입은 늑대'는 기존

      이미지와 상반된다.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갖는 정치인은 여야를

      를 통해 몇명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박찬종 의원이 그래도 상당히 주목

      받는 중요 정치인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박의원의 이미지는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기 보다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박의원은 70년대 이른바 삼시를 패스한 수재

      중의 한명이다. 그래서 그는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중용했고, 잘 나가던 공안검사를 그만두고 박대통령의 권유로 박의원

      은 정계에 입문한다. 그가 첫 출마해서 싸운 상대는 김영삼 현직 대통령이다.

      박찬종의원이 김영삼 대통령의 지역구에서 출마한 이유는 박 대통령이 당시

      야당의 양대 거목 중 한명인 '김영삼 죽이기'의 선봉장으로 그를 부산으로

      배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려한 고시 패스 경력과 젊고 세련된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호감을 줄 것이라 예상됐기 때문이다.

      인정받는 여당 정치인이 변신을 한것은 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이다. 

      80년 민주화의 봄은 예정되어 있었고, 정계의 거물 3김은 정치활동을 재개

      했다. 집권당 공화당은 언제 무너질지 불안한 정당이 되었다. 이때 박의원은

      소위 '공화당 정풍운동'을 시작한다. 그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의 출발점은

      바로 이 정풍운동이다. 그들은 '박의원이 순수한 과거 반성이 아닌 최고

      권력의 누수 기간 당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있다..


      이후 그는 공화당에서 제명되어 공안검사에서 여당 국회의원까지의 엘리트

      코스를 마다하고 재야인사로 변신한다. 84년 민추협 인권위원장이 되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변론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85년 4.12총선시 신민당 돌풍과 함께 부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한다.

      그후의 행보는 상당히 복잡한데.. 87년 통일민주당 정책위원장을 맡았고

      대통령 선거 직전에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88년

      13대 총선 직전에도 평민.통일민주 양당의 통합을 요구하며 다시 삭발하였다.

      이후, 박의원은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91년 3당 통합직후 3당 통합에 

      동참하지 않은 이기택, 홍사덕, 이철, 김광일 의원등과 '꼬마 민주당'을

      창당한다. 야권통합을 내세웠던 박의원은 같은해 신민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거부하고 뛰쳐나왔다. "양김 중 한명이 총재로 있는 민주당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명분이었는데 박의원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밀실회담

      시 서울시장 공천권을 요구했으나 관철되지 않아 탈퇴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그의 행보는 정당인으로서 불운의 시기였다. 김광일 의원과 신당을

      만들려다 실패했고, 김동길 교수와 연합을 모색하다 "김교수는 원칙없이

      아무 인사나 접촉하고 연합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결별했다. 그리고 

      신정당을 만들었고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94년 6월 국민당과 합당해 신민당

      을 만들었다. 10월 문제의 각목 전당대회로 정치적 손상을 입은 박의원은

      지난 4월 당적을 포기하고 무소속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했다. 그가 몸담았던

      야당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평가에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박의원을 "결코 정당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 세운다. 구민주당 한 당직자의 증언이다. "박의원은 부총재로 한번도

      중앙위원회에 시간에 맞춰 참가한적이 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7시 회의

      인데도 8시쯤 회의에 참가하여 자기 발언만 하고 회의가 종결되기도 전에

      대변인실에 들러 기자들에게 의견을 전달하고는 사라졌다. 이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것은 박의원의 성실한 이미지와는 또 다른 주장이다...


      작년 10월 각목 전당대회 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박의원이

      이 음모에 가담했느냐의 여부가 핵심이라 하겠다. 

      다음은 94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의 전당대회 스케치 기사의 일부이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비주류측 전당대회는 주류와 비주류측이

      동원한 괴청년들과의 충돌로 유혈사태속에 진행. 비주류측은 전날 밤부터

      짧은 머리의 양복을 차려 입은 괴청년들에게 대의원 표찰을 나눠 주고

      대회장을 지켰고 주류측은 이날 60여명의 건장한 '청년당원'들을 앞세워

      대회장 진입을 시도. 양측은 오전 8시 20분에 63빌딩 로비 우측계단에서

      8시 40분쯤에는 행사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에서 두차례 충돌

      해 각목등이 난무하는 몸싸움을 벌여 유혈사태를 연출.... 이어 비주류측은

      10시부터 삼엄한 경비속에 1시간여에 걸친 전당대회를 일사천리로 강행.

      지도체제를 단일대표 및 최고위원 합의제로 변경하는 등 당헌을 개정하고

      박찬종 대표를 만장일치로 선출... 한편 주류측은 전당대회를 끝낸 비주류

      측이 당사를 접수하려 한다는 정보에 따라 소방호스.각목.벽돌 등을 준비

      해 당사를 지켰고 당지도부는 당무회의를 열어 박대표를 정식으로 제명."


      한편 전당대회 후 박찬종 의원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면 이사건과 무관하다는

      박 의원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주류측의 불법대회주장에 대해서도 '선관위에서도 나와 적법한 대회

      여부를 확인했고 절대다수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오늘의 대회에 시비를 거는

      것은 대응할 만한 가치가 없다'며 신민당 법통이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평화적으로 대회를 치르려는데 소화기를 들고 와

      뿌려대는데 어쩌겠는가'하고 김대표측을 비난했는데, 언론의 스포츠형 머리
 
      의 '어깨'동원 여부에 대해서는 한사코 언급을 회피했다."


      그 뒤, 11월 3일 선관위는 신민당 비주류 단독 전당 대회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했다. 자신만만하던 박 의원은 더 이상 언론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난 후, 그는 '백의종군'하기로 했다. '조직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틀렸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올 4월

      신민당 당적을 포기함으로써 이것도 백지화되었다. 이 사건은 박찬종의원

      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백억원에 달하는 국고보조금이 사건의 원인

      이 되었던 것으로 회자된다.


      이런 가운데서도 박찬종의원의 인기는 떨어질 줄 모른다. 그것은 그의

      정치적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사실 의정 활동 내용

      을 보면 그는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한다. 개인의 뛰어남을

      가지고 여권에 들어가 출세하는 것을 포기하고 야권에 계속 남아 고군

      분투하고 있는 줏대있고 의리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주장이나 지역감정 철폐 주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그의 주장이 대중적으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같은 정당생활을

      한 사람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음.. 마지막 문단에 대한 제 생각은 그렇네요.. 그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구축해온 이미지.. 언론이 만들어온 

            그러한 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언론은 그가 아직 양김시대가 

            마무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충분한 상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다루는 것 같구요.. 그래서 그의 인기는 잠시 시대에 편승한

            반짝 인기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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