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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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narosu (일꾼)
날 짜 (Date): 1995년06월06일(화) 23시12분11초 KDT
제 목(Title): 서울시장 후보 3인의 과거.. 정원식 후보




       [말]지 유월호에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정원식 후보는 황해도 재령 출신이고 월남한 실향민이다. 서북청년단
     
       에서 반공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4년 서울대 사대를 졸업

       하고 5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원양성학교인 피바디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가 공부한 것은 행동주의 교육학이다. '피바디 학파'의 일원인 정후보

       는 62년 서울대 교수로 일하게 된다. 교수 시절에는 미국식 자유주의자

       였고 별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언론을 자주 타는 

       속칭 'TV 교수'중 한명이었다. 그러다가 89년 12월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고 잠시 쉬다가 91년 총리로 발탁되었다. 

          정원식 전 총리는 유명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아마 많은 국민들은 '밀가루 총리'라는 인상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노교수가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시대의 폐륜아'들이 스승을 

       계란과 밀가루로 범벅을 만들었고 총리는 금방 유명해졌다. 정원식 후보는

       교사들에게도 악명을 날렸다. 전교조 활동을 한 선생님들은 정원식 문교부
      
       장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89년 전교조 발족 이후 그는 이를 철저

       하게 체제수호적인 측면에서 대처하였다. 결과적으로 전국에서 1,527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실향민에게 정원식 총리는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92년 총리 재임 당시 남북한 유엔 가입과 남북 고위급 회담을 주도했고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전의 강영훈 총리와 노재봉

       총리가 누리지 못한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8.15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추진하기도 했다.

          정원식 후보는 정치적 파란기였던 88년과 92년 사이에 장관과 국무

       총리를 지내면서도 비교적 장수하였다. 그는 관가와 언론에서 '뚝심있고

       추진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지만 그런 그의 이미지는 당시 상황을 

       반영한 '공안총리'라는 별명앞에서 퇴색된다. 그리고 정치인으로 변신

       한것은 92년.. 민자당 대통령 선거 대책위원장직을 맡게 된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93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지냄으로써 5.6공 핵심세력
 
       들이 개혁정국에 걸려 숙청되는 가운데에서도 굳건하게 살아 남았다..

           지난 5월 1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 전 총리는 전교조를

       해체하기 위해 교원 1,500여명을 해직시킨 것은 '체제수호의 문제'라고

       평가했다. 이때 해직된 교사들이 작년에 복직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

       었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들 중에는 작년 복직대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해직이라는 현실을 못이겨 자살한 이도 있고, 날품팔이

       하며 극도로 쇠약해진 몸 때문에 병사한 경우도 생겨났다. 4년의 세월

       동안 학원강사로, 구멍가게 주인으로, 포장마차 주인으로, 노가다 막일꾼

       으로 해직교사는 나섰다.... 당시 해직당한 교사 중에는 정원식 교수의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결혼식때 주례를 선 정씨는 "항상 아이들 앞에

       있으라"는 주례사까지 해주었는데.. 그들도 해직시켰다고 한다..

           신동아 94년 1월호 별책부록인 [신한국의 파워 엘리트]에서 "정원식

       총리 기용은 문교부 장관 재직시 전교조 불법화에 앞장서서 강경한 자세

       로 이를 저지한 공로에 대한 보상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것에 근거해 볼때 정원식의 승승장구의 발판은 바로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가 싫어하는 전교조였다.

          정원식 후보를 둘러싼 사건 중 국민적인 고분을 일으킨 밀가루 사건

       당시의 상황은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정국으로 6공이 막바지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그 후 계속되는 분신으로 분신정국이 조성되고 있었고

       성대 김귀정양이 역시 시위중에 경찰의 군화발에 밟혀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6공은 3당 합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밀가루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6공은 위기를 

       넘기고 국면을 전환시켰다. 당시 정원식 총리 서리는 91년 6월 5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교수의 순수한 심정을 받아주지 않아 야속하고 서글프다. 그러나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 채찍을 들어 내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시련을 겪는다 해도 교육은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다시 가르치는 자리에 설 것이다.. 평생 제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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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는데, 사랑하는 제자들.

       젊은이들.... "

           이런 말을 했지만 그는 사건 관련자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았다.

       극악무도한 파렴치범으로 법에도 없는 "괘씸죄"까지 보탠 중형을 선고받고

       다수학생들이 수감되고, 수십명이 수배당하고, 직접 관련도 없는 재야

       민족민주운동권이 배후로 지목되어 공안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총리직을 그만 둔 후에 다시 강단에 서서 '제자'를 가르

       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정치가의 길을 택했고 5공비리의 상징이었던

       일해재단이 이름만 바꾼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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