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loneman (자유의지) 날 짜 (Date): 1995년04월13일(목) 08시47분51초 KST 제 목(Title): 논리와 이해..(2) 기본적으로 많은 생각을 아이디님과 공감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을 서로 보고 얘기하고 있을수도 있겠죠. 이미 잘 알려진 예화처럼 한 술병에 담긴 절반가량의 술을 보고 비관론자와 낙관론자는 서로 다르게 표현하니까요. 비관론자는 "아니, 반밖에 안남았어?!"라며 한탄할고 낙관론자는 "아직 반이나 남아 있군!"하며 흐뭇해 한다죠? 술이 절반이 남아있다 또는 비웠다라는 얘기는 이 경우 모두 적확한 표현이지요. 그 사실자체에 대한 논쟁거린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두사람의 생각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논리에 대한 토론에서도 논리자체에 대한 여러면이 여러 관점에서 표출되고 있고 비판되었읍니다. 전 기본적으로 논리의 효율성을 인정하며 저 또한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논리 자체를 부인하거나 부정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송성대님께서 제시한 문제처럼 논리에는 논리자체외의 다른 측면에서의 양상, 즉 이념투쟁의 도구 또는 재판같은 데서의 송사의 도구등 *힘*으로써 사용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논리라는 방편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셰계에 대한 이해및 자신의 생각을 적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할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제가 먼저 올렸던 "논리와 이해"라는 글에 이어 아이디님의 비평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주장 A가 있을때 우리는 모든 주장을 고려 증거의 양이나 빈도 중요성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분명 타당한 말이며 공감을 할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증거의 수량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여 주장 A가 옳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수량적 측면에서 판단할수 있기 위해선 각 증거들의 동질 등가성이 성립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빈도수에 따른 가중치도 이런 등가성을 가정할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량적인 면만으론 결코 바람직한 판단과 이해를 할수 없는 면들이 무척 많다고 생각됩니다. 질적인 측면에서의 고려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이해할수 없는 하지만 깊은 내면에서 공감할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피의 댓가"라는 말이 있읍니다. 피란 크나큰 자기희생을 의미하지요.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나아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적절한 구속속에서 번영을 구가할수 있다고 가정할때 *자유*의 가치는 수많은 희생과 번영의 포기를 의미한다 해도 사람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며 추구하지요. 담배의 예를 드셨는데 무해의 이유를 흡연자가 100살까지 살았기 때문이란 건 그릇된 것 같군요. 이것은 인체에 해가 되는 것을 무엇으로 볼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형되는데 위의 경우는 죽음만을 해로 보기에 생기는 경우라고 봅니다. 하지만 *유해*라는 개념을 보다 넓게 본다면 우선 담배로 인한 각종질병이 있겠고 더욱 확대한다면 청정공기의 오염원으로써 담배해악이 있겠죠. 죽음이란 측면에서만 본다면 담배의 유해에 대한 반증, 즉 오래사는 경우는 많이 있을테니까요. 마찬가지로 AIDS를 얘기한다 해도 죽지않고 오래 사는 사람의 경우도 많이 있읍니다. 근거있는 거짓말이란 위의 경우처럼 기본적인 유해의 개념차체의 혼용이나 오용에서도 가능하지만 기본적인 말의 개념에 대한 정의의 차이를 교묘히 이용할때도 가능하며 가장 일반적인 언어일수록 언어의미의 중첩성및 모순을 가지기에 이를 이용한 거짓말이 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언어의 모호한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밥먹고 사는 변호사같은 사람들도 있기에 정권을 노리는 정치가들의 권모술수는 바로 이런 언어적인 모호성을 다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나요? 얼마든지 그를듯한 거짓말을 근거를 가지고 만들수 있읍니다. "뉴톤역학은 거짓이다"라고 제가 주장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입니다. 논리적으로 볼때 한 95%는 참이고 나머지 5%는 거짓이다라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요. 논리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참과 거짓인 것입니다. 참과 거짓이 섞여 있다는 건 혼돈일테지요. 하지만 과학의 태도는 결코 논리적인 참과 거짓의 양분법이 아니지요. 과학은 참을 주장하지 않읍니다.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결코 과학적 이론이 진리라고 주장하진 않지요. 과학은 엄밀히 말해서 모든것이 가설입니다. 그 가설이 얻은 결론을 실제 세계에서 재현할수 있는 predictability가 높을수록 신빙이 높은 것이 되지요. 과학은 또한 확률의 학문인 이상 결코 참이다 거짓이다라는 판단을 할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엄격한 논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과학적 가설이란 거짓일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왜냐면 하나의 반증만 있어도 한 명제는 거짓이니까요. 과학적 증거를 활용하여 논리를 편다면 더욱 우린 여러 가능성을 결코 배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자체가 이미 확률과 가능성의 학문이기에 말입니다. 제가 언급하고 있는 편견이란 바로 논리의 한계성속에 매여있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기존의 논리만이 논리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런 것이 다른 각도에서 보는 다변성을 제거하는 길이며 그러므로 편견에 사로잡힐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갖게 한다고 봅니다. 논리학에서의 또는 수학적 논리이외에도 우린 다른 많은 각도에서 사물을 볼수 있으며 또한 그런 대상들은 모든 것에 열려 있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 음악, 예술, 또는 여러각도에서의 관점은 모두 가치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올리겠읍니다.) 계속.. +-+-+-+-+-+-+-+-+-+-+-+-+-+-+-+-+-+-+-+-+-+-+-+-+-+-+-+-+-+-+-+-+-+-+-+-+- 외로운 이의 자유여행 죽음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불확실성 강 민 수 죽음보다 더 짙은 희망속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