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rotifl () 날 짜 (Date): 1994년09월17일(토) 16시10분11초 KDT 제 목(Title): 4.19 세대의 진상.. 이기택민주당 대표가 자신이 당시 고대 학생회장이었으며..학생들을 이끌고 독재정권타도를 외친적이 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4.19당시 조금이라도 참가했던 경력이 있던 자들은 자신을 419세대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며 자기들이 419를 주도한 것처럼 자랑하곤 한다.. 그러나..많은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우선, 우리들은 현재의 학생회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에도 정치적인 행사를 학생회가 주도했겠거니 생각하기가 쉬운 데, 당시의 "학생회"라는 것은..사실은 이승만 정권시절의 "학도호국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은..학교에서 실질적인 지명, 혹은 간선에 의해 뽑혀졌으며, 원래는 이승만정권의 정권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나 할까.. 당시의 분위기는..정말..반공의식이 투철했고..학도호국단은..대학생들을 이끌고 무슨 북한만행규탄 궐기대회라든가 외국대통령환영대회같은 관변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그리고..학도호국단의 구성원은..부유층의 자제 혹은 깡패의 연합적인 성격이 아니었나 한다. 학생회는 학생들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을 때, 더 이상 대세를 거슬릴 수 없어 소국적으로 참가한 수준이었다.."주도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집단은..서울대나 연고대의 법정대의 몇몇 써클이었다고 하는 데..이들의 사태장악은..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그러므로, 419는 누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연합적인 성격을 가지고..또한, 어느정도 목적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기 보다는 자연발생적인 측면이 많았다.. 또한, 419를 학생의거, 혹은 학생혁명이라고 보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은데..그것은 마치 광주민주화운동을 학생들이 일으켰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이다...물론 시작은 학생들이 했지만..총격이 시작되었으 때, 총에 맞아죽은 사람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못배운 사람,못가진사람들이었다.. 이렇듯, 주도세력이 미약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낸 혁명의 결과는 약간은 허망한 결과로 끝나게 되었다..이승만이 물러간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은 이승만정권에서 장관을 하던 이승만계열의 사람이 잡았으며, 그 이후 선거에서는 거의 유일한 야당이던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극심한 부정에 의해 상대적으로 그 치부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순결한 혁명이후의 정권을 장악하기에는 좀 때묻은 집단이었다..민주당의 전신은 한민당이었는데, 한민당은 광복직후, 많은 친일인사를 포함한 지주층에서 결성한 집단이었다..귀국한 이승만은, 자신과 손잡을만한 보수적이며 반일적이지 않은 집단으로 한민당을 파트너로 택했으며, 처음출발한 이승만정권은 한민당과 이승만파의 연합성격이었다..그러나, 차츰 자신의 미약한 정치기반을 보충하고 친위부대를 만들게 된 이승만은 한민당일파를 정권의 핵심에서 숫청하게 되는데, 이렇게 숙청된 한민당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민주당이다.. 민주당에는 아시다시피 신파와 구파가 있었는데, 신파는 일제치하에서 관료를 하던 사람들로써..(판검사, 군수 등등) 전문적인 지식등에서는 앞서있었으나, 전부다 친일파였다. 구파에는 한민당 출신으로써..지방 대지주가 대부분이었다..물론 구파에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 친일 경력이 대부분있었으며,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묘하게도 그 세력이 비슷했으며, 구파가 명목상의 권위만 있는 대통령을 차지하고 신파가 실권이 있는 총리를 차지하는 결과를 맞이했으나, 권력투쟁에서 뒤진 구파는 분당하게 된다..또한 민주당은 집권 일년동안 혁명뒤의 정권에 어울리는 개혁비슷한 것도 실행을 못해보다가, 뒤이어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에 의해 "무능했다"는 평판만을 듣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