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5일 금요일 오전 05시 02분 54초 제 목(Title): 강준만/조선일보 제몫찾아주기 운동의 새로 머리말/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의 새로운 비전 /강준만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에 사과드립니다 이미 많은 독자들께서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우 기자는 지난 12월 1일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했다며 월간 {인물과 사상}과 월간 {말}을 상대로 각각 1억 원씩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의 경우 이한우 기자가 문제삼은 글은 1998년 12월호에 실린 <기자를 사병화한 조선일보>였습니다. 우선 독자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최선을 다해 소송에 임하겠습니다만, 그 어떤 판결이 나오든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 소송과는 무관하게, 이 사건에 대한 제 입장을 독자들께 밝히는 게 도리일 것 같아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허세와 엄살 모두 싫어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양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임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저와 월간 {인물과 사상}은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에 깊이 사과드립니다. 소송과는 무관하게, 문제의 글에 지나친 표현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제 글이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 임직원 여러분에게 심적 고통을 안겨 드린 것에 대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깊이 반성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약속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의 이중 기준 그러나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의 이중 기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것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느끼는 심정은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처음엔 절대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학생과 어느 정도 친숙해진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가 반말로 대했던 어느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제게 "왜 반말을 하십니까?"라고 따지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 학생에게 사과할 것입니다. 물론 이건 가상의 상황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암묵적 이해가 통하지 않았을 때에 느끼는 황당함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일부 사람들은 저를 '독설가'라고 부릅니다만, 저는 법적으로 명예 훼손의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글을 쓰진 않습니다. 참으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글쟁이로서 독설 이외에도 나름대로 갖고 있는 '경쟁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매우 안전하게 씁니다. 제가 대학에서 '언론윤리법규'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명예 훼손'에 대해서만큼은 웬만큼 안다고 자부합니다. 아니, 좋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제가 현실적으로 '명예 훼손'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누가 저를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어야지 조선일보 기자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비판의 상한선은 조선일보가 하는 비판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한우 기자에게 한 발언이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면, 그리고 그 원칙이 조선일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조선일보는 벌써 문을 여러 번 닫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이 기자나 조선일보가 모르는 것일까요? 정말 모른다면 제가 앞으로 두고두고 깨닫게 해 드리지요. 이 지면을 통해 그런 사례들을 끊임없이 밝히겠다는 겁니다. 이미 이번 호에도 적잖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저를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한 이한우씨는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입니다. 조선일보와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문제가 된 글도 조선일보가 전사적인 총력을 기울여 시도해 온 '최장집 죽이기'와 관련된 것이며, 이한우 기자는 {월간조선}에서 {조선일보}로 넘어간 '최장집 죽이기'의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사보}(1998년 10월 30일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화부 이한우 사우(80년 사사 편찬실 파견)는 사내의 '최장집 전문가'로 꼽힌다. 이 사우는 최씨의 한국전쟁관 보도와 관련, 그의 논문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본지 26일자 4면 참조). 그는 또 학술 담당 기자로서 다양한 학계 인사들과 접촉, 나름대로 객관적인 결론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한우 기자 개인을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뒤에 실린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저지른 명예 훼손 사례>라는 글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 기자에겐 저를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설에 관한 한 그는 강준만 이상으로 엄청난 독설, 아니 독설과는 장르를 달리 하는 진짜 명예 훼손감의 발언을 많이 해 온 사람입니다. 물론 늘 무사했지요. 그런데 이 기자는 저는 무사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겁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조선일보}와는 달리 무한대의 반론권을 허용하는 매체입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갈 것도 없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토론과 논쟁을 활성화하자는 목적으로 창간된 잡지이기 때문에, 반론의 문이 그 누구에게든 활짝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늘 잘못된 것에 대해선 사과와 반성을 할 뜻이 충만해 있는 그런 잡지이기도 합니다. 한국 언론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만한 자세를 절대 흉내내지 않겠다는 게 이 잡지의 창간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건 이미 여러 번 밝힌 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곧장 법정으로 달려가다니, 이한우 기자와 조선일보는 이후 {조선일보}의 보도 및 논평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반론권 요청과 언론중재위원회를 뛰어넘어 모두 법정으로 곧장 달려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까? 조선일보가 추구하는 '힘의 논리' 그러나 이런 의문은 이 기자의 소송 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어울리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생각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어느 나라에서든 작은 언론 매체가 입바른 소리를 내게 마련입니다(그렇다고 {한국논단}까지 여기에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작은 매체들에 대해 가장 많이 쓰이는 언론 통제 수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명예 훼손 소송입니다. 명예 훼손이냐 아니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송 제기로 끊임없이 괴롭혀 위축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쪽은 권력이든 금력이든 거물이거나 거물의 지원을 받는 쪽이고 당하는 쪽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쑥스러울 만큼 약자이니 누가 유리하겠습니까? 작은 매체의 입장에선 승소에 자신이 있다 해도 단 1%의 가능성일망정 패소는 그 매체를 파산으로 몰고 가게 돼 있기 때문에, 그 1%의 가능성마저도 그 매체 종사자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줍니다.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사례는 제가 몇 달 뒤에 낼 {세계의 매스미디어와 문화}라는 책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만약 조선일보와 이한우 기자가 그런 뜻으로 제게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면 이미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기자의 소송 제기는 구멍가게 수준의 인물과사상사의 업무에 이미 적잖은 차질을 빚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느라 감동도 받긴 하지만 사실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닙니다. 웬만큼 말이 되는 건수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당해야 할 말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앞으로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빼앗길 시간과 쏟아야 할 신경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겁이 납니다. 저는 허세도 엄살도 싫어합니다. 솔직하게 월간 {인물과 사상}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이 건으로 고민을 하느라 한 며칠간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한우 기자가 제기한 소송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요. 내가 아직도 조선일보를 모르고 있었구나, 그간 조선일보를 너무 좋게만 생각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저는 순진하게도 조선일보가 언젠가는 {주간조선}이나 {월간조선}을 통해 저에 대한 공격을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월간 {인물과 사상}도 당당한 언론 매체 아닙니까. 저는 동업자들끼리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믿은 것이지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뭐냐구요? 이한우 기자가 소송을 제기했다는 건, 제가 비판했던 조선일보 사람들 모두가 다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 같은 수준의 독설이었는데 유독 이한우 기자만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코미디죠. 조선일보로부터 명예 훼손을 당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 조선일보의 힘이 두려워 도중에 타협을 하고 맙니다. 조선일보로부터 다른 건으로 보복당할까봐 두려워 내키지 않는 타협을 하거나 아예 소송조차 제기하질 못합니다. 천하의 노무현 의원도 1심에서 승소해 놓고도 도중에 조선일보와 타협하지 않았습니까. TV 인터뷰에서 정치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계면쩍게 웃으면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결국 '힘의 논리'인 거죠. 조선일보가 앞으로 나를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일 경우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한 겁니다. 제 고민의 결과를 밝히겠습니다. 저는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구상해 냈습니다. 그간 제가 해 오던 운동의 노선과 방법을 전면 재조정하기로 했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른 보면 후퇴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의 비전이 후퇴인지 아니면 전진인지 끝까지 들으시면 아실 겁니다. '독설'을 '호소'로 바꾸겠습니다 첫째, 저의 모든 글쓰기에서 '독설'을 '호소'로 바꾸겠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감히 호소에 대해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진 못할 겁니다. 눈물어린 호소를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도 감히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을까요? "이한우 기자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자신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최장집 교수에 대해 어쩜 그럴 수가 있지요?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못 느끼셨나요? 자신이 최장집 교수에 대해 몇 년 전에 내렸던 호의적인 평가는 잘못된 것이었다는 말 한 마디는 하고서 그런 일을 했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아니면 그때는 최장집 교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최 교수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말 한 마디는 하고서 그런 일을 했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 기자님이 보통 기자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자님은 철학 전공으로 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마친데다 평소 그 누구보다도 더 학자적 양심과 윤리를 강조해 온 분 아닙니까? 당연히 학문의 자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 분 아닙니까? 세상을 꼭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전 늘 제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옳은 일이라면 별로 두려운 게 없습니다. 이왕이면 옳게 살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한우 기자님, 말 좀 해 보십시오."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호소'가 '독설'보다 못할 게 없습니다. 앞으론 분노를 삭이고 사랑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조선일보를 뜨겁게 포옹하면서 타이르고 호소하겠습니다. 눈물로 그들의 양심을 촉촉히 젖게 만들겠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둘째, 저의 모든 글쓰기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본격적인 정치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깜짝 놀랄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잠시 제 말씀 좀 들어 보십시오. 저는 지금 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의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미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정권 교체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간 저는 제 힘을 너무 많은 분야에 분산해 왔습니다. 그게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정반대입니다. 사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주제였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괴짜'라거나 '또라이'로 머무르진 않을 겁니다. 반드시 제가 했던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저는 정치에 관한 글 때문에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 관한 한 얼마든지 같이 연대할 수 있는 그런 분들입니다. 이건 이한우 기자에게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만, 전 1억 원이라는 금액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제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재확인하면서 제 주제 파악을 뼈저리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한 돈도 없는 주제에 내가 너무 까불었던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 가지만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제 분수를 깨닫게 해 준 조선일보와 이한우 기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언론학자로서 언론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의 정치관은 이른바 '반DJ' 성향의 사람들을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서 배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사실입니다. 저는 '반DJ'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뜨겁게 끌어안고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 그들을 동참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반DJ' 성향을 갖고 있는 분들도 국가 안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무책임한 지역분열주의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조선일보의 실체를 제대로 안다면 제 운동에 동참해 주리라 믿습니다. 저의 'DJ 옹호'는 정권 교체로 그 수명과 의미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뭘 바라고 했겠습니까? 사실 정권 교체 이후 DJ 정권이 너무 불안하게 생각돼 제가 한 동안 본의 아닌 '어용' 노릇을 했습니다. 특검제까지 반대하는 글을 썼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서글픈 일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잘 알겠습니다만, 전 DJ 진영으로부터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용'도 못 되는 셈이지요. 전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한 나머지 DJ 정권에 대해 제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생각으로 DJ 정권이 성공하게끔 기여하자는 순수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고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DJ 옹호'가 오로지 국익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제가 정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사회의 언로(言路)를 바로잡는 데에 기여한다면 그게 곧 그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을 위해서라면 한나라당과도 연대할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바뀌면 한나라당도 바뀌지만 한나라당이 바뀌어도 조선일보는 바뀌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번 '최장집 죽이기' 사건을 보십시오. 한나라당이 조선일보의 뒤를 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조선일보가 시도한 '최장집 죽이기' 사건이 터진 지 20일만에 한나라당은 총재가 주재한 간부회의에서 '최장집 사퇴'를 당론으로 정했으며, 지난 11월 24일 한나라당 소속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국회의원 모임'(대표 김용갑)에 가입한 의원 52명은 최장집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즉각 해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제가 예전 같았으면 이 52명의 의원들에게 독설을 퍼부어 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은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연대를 강화시켜 줄 뿐입니다. 그 52명 의원들 가운데엔 개인적으론 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의원들도 있습니다. 전 그들에게 호소하렵니다. 조선일보는 '지는 해'라는 사실을 알려 드리면서 멀리 내다보고 행동하시라고 정중한 조언을 드리겠다는 겁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을 위해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전 손호철 교수와도 연대할 것입니다(물론 손 교수가 절 받아줘야 가능하겠습니다만). 앞으론 손호철 교수가 김대중 대통령과 지역 문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 시비걸지 않겠습니다.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 동참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난 11월 2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주최한 '최장집 교수의 현대사 연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라는 긴급 토론회에서 손호철 교수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게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손 교수는 앞으론 여하한 경우라도 {조선일보}엔 글을 기고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경희대 도정일 교수도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 결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론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진보적·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 절대 독설을 퍼붓지 않고 그리 하지 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반공과 국가 안보는 조선일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의 이러한 전략 변화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질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사람이 왜 불과 몇 년만에 달라져?"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 안목이 짧고 식견이 모자란 탓입니다. 그러나 슬그머니 달라지는 것보다는 이렇게 화끈하게 제 생각의 변화를 이실직고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또 달라진 제 생각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뜨거운 격려와 지지를 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한결같다고 해서 우리가 조선일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조선일보는 저의 그런 노력이 조선일보가 평소 주장해 온 '자기 색깔 드러내기 운동'의 일환임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행여 영업 방해로 보지 말아 달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조선일보가 앞으로 저와의 관계에서 페어플레이를 해 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사실 어찌 보면 저는 조선일보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거저 쓰는 '옴부즈맨'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후일 {조선일보}가 올바른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 큰 성공을 거둔다면 첫번째로 감사장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저일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의 정중한 비판에 대해 무조건 무시하지 말고 답을 줘야할 땐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론 제가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할 빌미를 아예 주지 않을 것이니 그리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의 색깔이 우리 사회 절대 다수의 색깔이라고 믿고 있는 듯 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전 저와 같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가 우리 사회 절대 다수의 색깔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은 감성적인 차원의 운동이 아닙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의 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역사와 시장 논리에 순응하면서 일상적 삶에 쫓겨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조선일보}의 색깔에 관한 총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겁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제 육신과 영혼을 다 바쳐 엄청난 양의 잘 정리된 증거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널리 유포하겠습니다. 그 증거를 보고서도 조선일보와 맺은 그간의 사적인 관계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들에 한해서 눈물어린 호소를 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오로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진정한 반공과 국가 안보를 위해 그리도 애쓴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먼 훗날이나마 제게 감사할 것이라 믿습니다. 반공과 국가 안보는 조선일보의 전유물이 아니거니와 그것이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더이상 용납되어선 아니 될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왜 하필 {조선일보}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대해서만 '옴부즈맨'의 특혜를 베푸는 건 부당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중앙일보}가 '최장집 죽이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동아일보}가 '최장집 죽이기'를 했습니까? {조선일보}가 매우 유별난 신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반공과 국가 안보 정신이 약해서 '최장집 죽이기'를 안 하는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조선일보는 과거에 집요하게 정치인 김대중씨에 대해 감행했던 '사상 검증'을 떠올려 보십시오. 조선일보는 '왜 정치인들 가운데 하필 김대중씨만?'이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 답이 바로 제 답과 같습니다. 김대중씨가 매우 중요한 인물인 만큼 {조선일보}는 매우 중요한 신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선일보는 '최장집 죽이기'란 표현에 대해서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일보} 1998년 11월 3일자에 이한우 기자가 쓴 칼럼 제목을 살펴보십시오. 그 칼럼 제목이 '조선일보 죽이기'입디다. 언론개혁시민연대가 개최한 '최장집 교수의 현대사 연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라는 토론회를 '조선일보 죽이기' 모임으로 본 겁니다. 피장파장 아닙니까? 조선일보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최장집 교수가 쓴 글의 모든 내용과 표현 방법에 다 동의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론 못마땅한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굳이 오해의 소지가 있게 쓸 필요가 무어 있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최장집 교수가 쓴 모든 저서와 글들을 다 읽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조선일보가 처음부터 '이거 좋은 건수 하나 걸려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고 좀더 성실하게 최 교수의 저서와 글들을 연구했더라면 감히 전사적 차원의 '최장집 죽이기'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과오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어 사용에 좀 신중을 기하는 게 좋겠다는 정도의 가벼운 기사로 족한 그런 사안이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문제삼고자 하는 건 조선일보의 그런 오만입니다. 조선일보가 그런 오만을 버리고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다시 태어난다면 제가 굳이 {조선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감시를 할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제가 {조선일보}에 대해 무슨 개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제가 언론학자로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세계화'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 좁은 우물 안에서 아웅다웅해야 하겠습니까? 언론학자로서 우리 언론의 세계적 경쟁력을 위해 무언가 기여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오만이 너무 심해 쓸데없이 국론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제가 어찌 '세계화' 작업에 전력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제발 저로 하여금 '세계화'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는 조선일보 안에 계신 분들께 호소합니다. 조선일보가 오만을 버리게끔 내부 변화를 일으켜 주십시오. 조선일보가 오만하다는 건 {조선일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오만은 가볍게 넘겨도 좋을 그런 게 아닙니다. 오만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남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건 오만할 경우 그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제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간 제 글이 사나웠다는 걸 인정합니다. 사실 전 그간 '설득'을 위한 글을 쓴 건 아닙니다. 너무도 답답해서 분노의 소리를 질러 온 겁니다. 이한우 기자가 번역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엔 "분노가 전혀 없는 상태란 곧 사회적 지성이나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의미한다."라는 말이 있습디다. 분노를 너무 탓하진 마십시오. 예컨대, 일개 신문이 여론을 조작해 가면서까지 '대통령 만들기'를 시도하는 게 분노해야 마땅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오히려 그런 일에 대해 저처럼 분노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이상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이젠 상황도 많이 달라졌으니 '분노'에 근거한 글쓰기는 자제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분노'와 '사랑'이 서로 크게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분노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관심과 냉소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일 것입니다. 이젠 동전을 뒤집겠습니다. 사랑으로 말하고 설득을 위해 애쓰겠습니다. 조선일보에 대해 글을 쓸 때에도 조선일보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득도 해 보고 감성적으로 호소도 해 보겠습니다. PC통신에서 누가 저에 대해 '자폐적'이거나 '외골수'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졌더군요. 웃었습니다. 사실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저에 대해 좋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 누구 못지않게 신축적이고 타협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 동료 교수들에게 물어 보세요. 전 오히려 너무 열려 있어서 탈이지요. '신축'과 '타협'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조선일보에서 행여 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자폐적' 또는 '외골수' 태도를 갖지 마시고, 스스로 반성하고 고칠 점은 없는지 그걸 생각해 보시라는 뜻에서입니다. 조선일보가 달라지면 저도 달라집니다. 누가 옳건 그르건 누가 누구를 제거해야 하는 그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저는 그런 사회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조선일보가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변화할 뜻이 없다면 조선일보가 제 몫만 누리게 하자는 게 제 뜻입니다. 제가 이번 호에 쓴 <{창작과 비평}에 호소합니다>라는 글과 그 밖의 조선일보와 관련된 글들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제 뜻을 제대로 이해하실 것입니다. '판촉'까지 양지로 드러내는 새로운 운동관 저는 개인적으로 '조선일보 제 몫 찾아 주기 운동'에 몰두할망정, 월간 {인물과 사상}은 앞으로 다루는 주제에 있어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화려한 면모의 외부 필진이 월간 {인물과 사상}에 합류해 다양한 주제의 글을 기고해 주실 것이거니와, 독자 여러분들의 글은 그 어떤 주제와 내용이든 예전처럼 대환영이라는 점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정치칼럼 필자는 김대중 정부는 물론 대통령에 대해서도 일정 거리를 둔 채 늘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을 그런 분으로 모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 12월호에서 '정기 구독을 연장합시다'라고 호소를 하면서 {카멜레온과 하이에나}라는 책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한 것에 대해 한 독자께서 이의를 제기해 주셨습니다. 이해는 한다고 하시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 역시 그 기분을 이해합니다. 저도 아주 좋은 기분으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독자께서는 {한겨레}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하셨던 분인데, 여기서 잠시 '판촉'과 관련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간 월간 {인물과 사상}에 실린 {한겨레}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의 목소리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는 건 독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한겨레}가 다른 신문들처럼 그 어떤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저는 {한겨레}가 창간 당시의 심정으로 돌아가 좀더 겸허해지기를 바랍니다. 또 열성 독자들의 정열을 귀찮다고 외면하지 말고 뜨겁게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건 {한겨레}에 순도 100%의 순결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전 그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구독을 하면서 비판을 해야지 구독을 끊으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한겨레}가 있으니까 {조선일보}의 '최장집 죽이기'도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이지, 만약 {한겨레}가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한 일 아닙니까? {한겨레}의 탄생 배경과 성격이 어떠하든 한겨레도 시장에서 살아 가야 하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한겨레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한겨레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우리 모두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판단이 설 때에 한해서 비판을 해야지, 발버둥치는 그 자체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매서운 비판을 가하는 건 한겨레더러 옥쇄(玉碎)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겨레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 모두 더불어 같이 고민해야 할 주제이지 일방적으로 매도하기 어려운 그런 점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한겨레}에 바라는 건 이런 논의 자체도 지면에 개방해 달라는 겁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생존 차원에서 '판촉'을 하는 건 아닙니다. '성장'을 위한 것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썩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걸 당당하고 투명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거부감을 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제가 그간 겪은 바로는 성장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제가 과연 어떤 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좀 새로운 운동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마추어의 감성'과 '프로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에서 살아 남고 성장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낯설고 거부감이 전혀 없진 않겠습니다만, 현실적인 대안 모색을 염두에 두고 깊이 생각해 보면 기꺼이 수긍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앞으로 계속 거의 매월 새로운 책을 내면서 그 책을 이 잡지를 다른 분께 권유한 '권유자'나 '정기 구독 연장'을 하는 분들께 드리는 방식으로 월간 {인물과 사상}의 성장을 꾀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치는 쇼 비즈니스다}를 읽읍시다 사실 그간 다른 분께 이 잡지를 권유했다가 저의 사나운 독설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고 말씀하신 독자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제가 '독설의 상품화'를 꾀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저의 독설은 '순수한 분노'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독설'보다 '호소'를 택한다면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강준만이 시장 확대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할 겁니다. 하하하. 세상이 그렇게 재미있습니다. 무조건 비난하겠다는 분들을 무슨 수로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독설을 포기함에 따라 저를 욕하는 사람들도 줄어들 터이니, 이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말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성역과 금기에의 도전'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이 잡지의 근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은, 이젠 부담없이 다른 분들께 이 잡지를 '사랑의 잡지'라고 말씀하시면서 권유를 많이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정치는 쇼 비즈니스다}입니다. 이 책은 제가 지난 1989년 8월에 냈던 {대통령과 여론 조작:로널드 레이건의 이미지 정치}를 개정·보완한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끝내고 귀국하기까지 몇 개월간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뉴욕, LA, 워싱턴, 시카고 등등 미국 대도시 구경 한 번 못 해 본 저로서는 미국 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뜻한 바 있어 도서관에 다시 파묻혔습니다. 제가 살았던 레이건 치하의 미국 언론을 한국에 소개하는 게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렇게 해서 씌어진 것으로서 미국 정치와 언론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머리말·1980년 대통령 선거·레이건의 대통령 취임·레이건 저격 사건·레이거노믹스의 출범·레이거노믹스의 좌초·위기의 제조·레이건의 정보 통제 정책·KAL기 격추 사건·베이루트와 그라나다·미국 내셔널리즘의 물결·1984년 대통령 선거·민주당의 딜레마·레이건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기자회견의 정치학/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암에 걸린 레이건·제네바 정상 회담·필리핀 사태·미 상원의 텔레비전 중계 허용·로비 스캔들·정치의 승리·미친개와 카우보이·레이건의 인기·레이건의 실언·이란게이트·리건과 낸시·레이건과 고르바초프·군국주의의 부활과 군수 부정 스캔들·대통령 퇴임 이후의 레이건·맺는말 이 책의 번호는 ⑤입니다. 새로운 독자를 위해 대신 정기 구독료를 내 주시는 분은 지로 용지의 '권유자'란에 직접 자신의 이름과 ①{정치를 위한 변명}, ②{자기검열의 시대}, ③{김영삼 이데올로기}, ④{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한국 언론 115년사:1883∼1998}, ⑤{정치는 쇼 비즈니스다} 가운데 원하는 책 번호를 쓰시고, 정기 구독을 연장하는 독자들께서는 '권유자'란에 '구독 연장'이라는 말과 함께 원하는 책 번호를 써 주십시오. 지로 용지가 저희에게 돌아오는 즉시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1998년 12월 10일 현재 월간 {인물과 사상}의 정기 독자 수는 7367명이며, 정기 구독을 연장해 주신 독자 수는 358명입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 12월 강준만 올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