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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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설운도)
날 짜 (Date): 1998년 10월 11일 일요일 오후 02시 35분 13초
제 목(Title): 북한/신동아 거지된 아이들,팔려가는 처녀�


[4] 제목 : [중국 현지리포트] 거지된 아이들 팔려가는 처녀들... <1>

  『내 얘기를 왜 적습니까?』
  한동안 뚱하게 비껴 앉아 있던 아이가 갑자기 도전적인 눈빛으로 대
  들었다. 
  『아니, 이건 별게 아니란다. 정  불편하면 내가 쓴 이  쪽지를 네가 
  가지렴』
  『공화국에서 들었시오. 남조선 기자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 다 조사
  해다가 신문 텔레비에 내고 그런다고. 그러면  우리 아버지 일 당합
  니다. 나는 죽어도 일없는데(괜찮은데) 울 아버지가 해를  당하면 안 
  돼요』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래도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꺽꺽거리는 울음 때문에 간간이  끊어지는 목소리로 『여기서  돈을 
  좀 모으면 공화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열네살 잡초 인생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연길시내에 있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집을 방
  문했다. 어제 연길시장에서 울고 서 있던  열네 살짜리 탈북 소녀를 
  데려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였다. 우리 일행이  집에 들어가니 나
  이 지긋한 아주머니와 여덟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탈북 소녀가 왜 안  오는지 속으로 궁금해하며 한동
  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결국 일행 중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탈북
  자가 어디 있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우리 일행 모두는 깜짝 놀랐다. 여덟 살쯤  돼 보이는 그 아이가 열
  네살짜리 탈북자였던 것이다. 아이는 키가 내 가슴께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단복(체육복)을 입고 있어서 더 어려  보였는지도 모
  르겠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도저히 여자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똘망똘망하고 눈치가 아주 빠른 게 여
  간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아이 얼굴에 거친 세파에 찌든 흔적이 서
  려 있는 듯도 싶었다.
  
  처음에 아이는 청산유수처럼 얘기를 잘했다. 우리가 사들고 간 사과
  를 깎아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권하는 등 예의도 아주 똑발랐다. 얘
  기는 주로 서울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한  할아버지가 시켰다. 그분은 
  연변지역에만 20여 차례를 드나들었다는 분이다.  그런데 얘기 끝에 
  할아버지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머뭇거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
  더니 급기야 『왜 자기 말을 받아적느냐』며 시비를 건 것이다. 
  
  그 아이는 중국 국경과 접한 함북  무산 출신이라고 했다. 올 3월에 
  처음 탈북했다가 사흘 만에 붙잡혀 송환됐고, 5월에 다시 나왔다. 북
  한에는 아버지와 오빠가  남아 있고, 어머니는  작년에 오랜 굶주림 
  끝에 이름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 지난 3월 북한에 송환돼서는 일주
  일 동안 구류를 살며 구박만 받다가 풀려났다고 했다. 
  
  『사흘 만에 붙잡혀서 집에 돌아가니까 아버지가 난리를  막 피웠시
  오. 너라도 살라고 중국으로 가라고 했는데, 어찌 다시 왔는가, 어찌 
  다시 왔는가 하면서 낫을 들고 방에 들어와서는 모두 죽자고 했습니
  다』
  
  그 아이는 결국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
  다. 학교는 애시당초 마음에서 떠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조국을 
  배반한 반동아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5월에 다시 강을 건너서는 용정 근처에 있는 한 조선족 아저씨 집에
  서 머물렀다. 그 집은 강을 건너  연변으로 흘러들어온 북한 아이들 
  사이에 「마음씨 좋은 집」으로 소문난 집이었다. 그런데 밀고가 들
  어오는 바람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기 어려워지자 연길 시내로 나왔
  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장통에서 울고 서 있던 아이를 조선족 아
  주머니가 데려온 것이었다. 
  
  『너희 마을에 네 어머니처럼 죽은 사람들 많지? 식구들  중에 누구
  라도 죽은 사람이 있는 집이 열 집이면 몇 집이나 되지?』
  『집집이 다 있수다』
  『너, 왜 이렇게 사니? 김일성 수령님이 원망스럽지는 않니?』
  『그런 소리 하지도 마시라요』
  아이가 팩 돌아 앉았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탈북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던져봤지만 나오는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우
  리가 지금 못 살고 배 고프지만, 우리 아버지 수령님을 욕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식이었다. 세뇌교육이란  게 이렇게 무
  섭다는 걸 실감했다. 차라리 어른들은 「수령님에 대한 변함없는 충
  성심」을 얘기하면서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 아이와 나눈 대화 중에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말이 
  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네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디
  요』 
  세 시간 남짓 그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나오면서, 서울거리를 발랄
  하게 다니는 열네살 소녀와 연변지역을 정처없이 떠도는  열네살 소
  녀가 지금 이 시각 경험하고 있는 삶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
  리 민족은 왜,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마음이 착잡했다. 


[3] 제목 : [중국 현지리포트] 거지된 아이들 팔려가는 처녀들... <2>

  탈북자 수 올해 급증, 최소 10만명
  
  우리 일행은 지난 7월  북·중 국경지역을 현지  답사, 탈북자 수십 
  명을 만났다. 원래는 한 달 예정이었는데  도중에 중국 공안에 붙들
  려 강제 추방당하는 바람에 일정이 짧아졌다. 
  우리가 중국 공안에 붙들린 곳은 도문시였다. 일주일간 도문시 공안
  국 변방구류심사소에서 조사를 받고 빼앗겼던 여권을 돌려받았는데, 
  우리가 조사받은 곳은 검거된 탈북자들을 북한에 송환하기  전에 수
  용하는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으며 오히려 중국 내 탈북자
  들 실태를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중국 심양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저녁 5시10분에 연길행 기차를 탔
  다. 밤을 새워 달려서 다음날 아침 7시20분 연길에 도착하는 열차였
  다. 탈북자들 얘기는  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의 조선족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연변대에서 미술을  전공한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은 학원 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둘 다 한국과 일본을 
  여러 차례 다닌 인텔리들이었다. 이들은  『탈북자들이 너무 많아져
  서 큰일』이라고 말했다.
  
  『탈북자 수가 굉장히  늘었어요. 연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니까
  요』
  『한국에서 제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1500명 정도, 많으면 3000명 정
  도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에이, 그건 말도 안 돼요. 최소한  몇 만 명은 됩니다. 연길에만도 
  아마 수만 명은 될 거요. 그런데 문제는 조선족 사회에서도 더 이상 
  그들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앞으로도  탈북자가 계속 
  늘어날 게 뻔한데,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연길에 도착해서 만난 한 조선족 지도층 인사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는 조선족사회에서 탈북자들을 은밀하게 돕는 조직의 지도자 역할
  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우리를 만나는 것조차  매우 꺼렸다. 자신
  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앞으로 활동이 위축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
  다. 뿌리칠 수  없는 지인의  부탁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나준 그는 
  『작년까지는 3만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올해 들어와 탈북자가 급격
  하게 늘어나 지금은 10만명 이상이 중국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고 있
  을 것』이라며 탄식했다. 심지어 백두산 주변인 장백현 일대 고지대 
  산속에 숨어서 야영생활을 하는 탈북자만도 1만명을 족히 될 것이라
  고 했다.
  
  『탈북자 문제는 조선족 사회에서 세대갈등 원인이 되고 있어요. 북
  한에 일가친척을 둔 연로한 1세대들은 가능한 한 더  많이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후손들은 그렇지  않거든. 그건 이해할 만도  해
  요. 한 서너 차례 쌀을 보내주는 거라면  몰라도 밑빠진 독에 물 붓
  기식으로 기약없이 그들을 돕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거지요』
  그는 또 이런 얘기도 했다.
  
  『북조선에서 가장 먼저 굶어죽는 게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연
  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들과 교원들입니다. 체면  때문에 남에게 아
  쉬운 소리를 못하는 거지요. 실제로 제가  지난번 평양의 한 연구소
  에 가봤더니 50대 이상 되는 사람이 단 세 명뿐이더라구. 그들은 미
  국이나 일본에 친척이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일반 학교 교원들은 정말 심각해요…』 
  
  먹여만 줘도 감지덕지, 그러나…
  
  연길에 도착한 날, 현지에서 안내를 맡기로 해준  이(조선족)가 자기 
  형이 사는 마을로 가자고 권했다. 연길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화
  룡 부근 조선족 마을인데, 그곳에 탈북자가 네 명 머물고 있다는 것
  이었다. 
  여행 내내 탈북자를 만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탈북자
  들 자신이 외부인, 특히 한국인을 만나는 걸  몹시 두려워하고, 마을
  사람들도 외부인을 경계하기 때문에 중간에 다리를 몇  단계씩 놓아
  야 했다. 마을에 들어갈 때에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끔 살짝 들어
  가서 안내받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탈북자를 데려오는  식으로 
  면담이 이뤄졌다. 
  
  이번에 만난 사람은 37세 된 남자였다. 고향은 청진이고 청진제강소 
  노동자라고 했다. 중국으로  넘어온 게 올해  2월이라니 탈북자로는 
  꽤 된 셈이다.  방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품새가 중국사람과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왜 넘어올 생각을 했습니까?』
  『먹을 게 없어서 왔지요, 뭐. 가족도  없구. 처와 아들이 못 먹어서 
  병이 들었다가 작년 5월에 죽고 나서 혼자가 됐시오. 혼자 남았는데 
  배곯고 있느니 중국으로라도 뜨자, 그렇게 마음먹고 왔습네다』
  
  그가 일했던 청진제강소는 2년 전에 가동이  중단되면서 노동자들을 
  1년에 6개월씩 시골로 내려보냈다고 했다. 농촌에 가서 일을 도와주
  고 먹을 것이라도 얻어 오라는 것이었다.  청진 시내 다른 공장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는데, 농촌에 가도 별  환영을 받지도 못했다고 
  했다. 없는 형편에 외지인을 도와줘야 하니 반갑겠는가. 
  『연변으로는 어떻게 넘어왔습니까?』 
  『청진서 무산까지는 기차를 타고 와서  두만강을 넘었시오. 화룡까
  지는 버스를 타고 와서 떠돌다가 이 마을에 오게 됐습네다』
  강을 건널 때에는 혼자서 건널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여럿이 함께 
  건넌다고 한다. 강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눈치를 보다 보면 한눈
  에 서로의 의사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중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뿔뿔이 흩어지는 게 「정석」이다.
  
  『중국엔 친척이 있어요?』
  『없시오』 
  『이곳에선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저, 여기 일 도와주고, 그렇게 지냅니다』
  『이곳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그럼요. 일단 배곯지 않아도 되니까』
  
  일해주는 대가도 없이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는 데도 그는 그
  곳 생활에 대단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우선  먹는 게 해결된다는 게 
  너무 좋아서 중국 공안에 언제 붙들릴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나 향후 
  계획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한국으로 가고 싶
  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사정을 더 잘 알게 되면 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우리 일행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의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물론  수신자부담 전화였다. 
  용건은 『한국에 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내
  가 『이제 생각이 달라진 거냐』고 묻자 그는 『이 마을에  나 같은 
  탈북자들이 자꾸 들어와 점점 지내기가 어려워져서 이곳저곳 떠돌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 마을엔 또 젊은 자매가 함께  흘러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한 명은 우리가 그 마을에 가기 바로 며칠 
  전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갔고,  하나는 잡혀가는 도중에 재차 
  도망가서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여자 탈북
  자 한 명은 그 마을에서 조선족  홀아비와 동거하고 있다고 했는데, 
  「남편」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사실 여자 탈북자
  들의 경우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중국인과 동거하는 것이야말로 중국 
  땅에서 가장 손쉽게 주거를 해결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다.
  
  『있는 놈들은 더 잘 산다』
  
  저녁 무렵, 그 옆마을에 있다는 또 다른 여성 탈북자를 만나러 갔다. 
  골짜기에 있는 외딴 집이었는데. 이번에도 무려 다섯 단계의 소개를 
  거쳐서 어렵사리 그 집을 찾아갔다.
  집이 가까워지면서 집 옆의 작은  콩밭에서 중년 남녀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단계의 안내인이 그들에게 성큼성큼 뛰
  어가더니 밭에서 나와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한참
  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안내인이 『저 여
  자가 1주일 전에 북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얘기해줬다. 
  한참만에야 마지못해서 나온  여자는 「몸뻬」바지를  입고 있었고, 
  나이는 마흔 정도 돼보였다. 
  
  『올해 몇이십니까?』
  『… 스물일곱입니다』 
  세상에, 마흔도 넘어 보이는 여자가 스물일곱 처녀라니…. 그녀는 낯
  선 사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진정시킨 뒤  밭둑에 앉아 이야기를 나
  눴다. 학교 선생이라는 내 신분이 그나마 「남조선 사람」이라는 두
  려움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됐다. 
  
  그녀는 함북 무산에서 광산측량 일을 했다고 했다. 북한에는 어머니
  와 남자 형제들이 넷 있고, 아버지는 사망했다.  중국에 친척이 있어
  서 도움을 청하려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까  친척집 사정도 여의치 
  않아 그 친척의 먼  친척뻘인 이 집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들 
  먹여살릴 식량을 구하러 자신이 대표로 왔다는 것이다.
  『남자 형제들이 많다면서 왜 여자가 혼자 왔어요?』
  『오빠들은 직장 때문에 어렵디요. 여자들이 오히려 (탈북하기가) 쉽
  습니다』
  『먹고 살기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광산이 2년쯤 전에 폐쇄돼서 농장에 가서 2년 동안 일해주고 양곡
  표를 받았시오. 그러나 양곡표를 내도 배급을 못 받으니까…』
  
  그녀는 북한 주민들이 배급도 못 받는 양곡표를 액면가치의 30% 정
  도를 받고 내다 판다는 놀라운 사실을 얘기해줬다. 주로 배급계통에 
  있는 사람이나 당간부들이 양곡표를 사가는데,  그들은 사간 양곡표
  로 표에 적혀 있는 양만큼 배급을 곧바로 타낸다는 것이다. 
  『공화국에서도 생활이 나은 사람들은 괜찮디요. 한 20% 정도는 오
  히려 예전보다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다 아닙니까? 그렇지만 보통 사
  람들은 30% 정도라도 받고 팔아야 그나마 연명하니까…. 팔 수 있
  는 건 다 팔지요. 마지막에는 집도 팔고…』
  
  그녀는 이른바 북한 땅에 빈부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
  하고 있었다. 대다수 주민들은 굶어죽어가는 판에 권력을 쥐고 있는 
  소수는 예전보다 더 잘 살게  됐다니…. 한국에서도 IMF 때문에 빈
  부격차가 커졌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남과 북은  이렇게 닮았을까…. 
  북한에서 살 만한 이들은 더 잘살게 됐다는 얘기는 그 후 다른 탈북
  자들에게서도 여러 차례 들었다. 


[2] 제목 : [중국 현지리포트] 거지된 아이들 팔려가는 처녀들... <3>

  출신성분보다 「힘있는 자리」가 중요
  
  도대체 북한 사람, 특히 여자들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 다음번
  에 만난 여자는 실제 나이가 스물셋인데, 겉으로는 열다섯 정도로밖
  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선족인 이모부 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 이모부라는 이는 
  연변 조선족사회에서 대단한 고위층 인사였는데,  연길에 있는 집은 
  서울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호화판이었다. 이  집 식구 한 사람이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6월 하순경 탈북한 이래 이모부 집 밖으로는  한번도 나가보
  지 않았다고 했다. 함북 남양  출신으로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
  한 국가유공자이고, 오빠는 기차 승무원(북한에서 기차 승무원은 생
  활여건이 나은 편이라고 한다)인, 출신성분이 최상급에 속하는  가정 
  출신이었다. 그런 집안이라면 북에서도 먹고 살만  할 텐데 왜 중국
  으로 왔을까?
  『아버지 연금이 안 나오는 바람에 생활이 불가능해졌습네다. 그 동
  안 이곳 이모부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부모님이 「너라도 중국에 가서  살아라」고 하시면서 강제로  저를 
  여기로 보냈디요』
  
  『출신성분이 그렇게 좋은 데도 살기가 어려웠어요?』
  『옛날에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무 소용 
  없습네다. 지금같은 때는  힘있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밥먹고 살지 
  출신성분 같은 건 일 없습네다. 당원증도  아무 짝에 쓸모없다고 내
  팽개치는데…』(나중에 만난 인민군  출신 탈북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군대에서도 힘있고  빽있는 지휘관을 만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밥먹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즉  지금 같은 위
  기시엔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약은 고사하고  먹을 것도 구하기 어
  려운 북한에서 그녀의 부모는 딸을 살릴 최후의  방안으로 중국으로 
  보내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녀는  북한 국경경비대에 중국돈 300원
  을 주고, 전문 브로커를 고용해서 국경을 넘었다고  말했다. 이건 탈
  북을 돕는 전문조직이 북한 내에도 있다는 얘기다. 
  그녀는 병이 나으면 부모님께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모부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얘가  아직 바깥 세상을 구경하지 
  못해봐서 그런 말을  하지만, 조금 지내다보면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날 밤 우리 일행과 이모부가 그녀를 
  데리고 연길 시내로 첫 외출을 나왔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렇게 화려한 곳은 처음 봅네다』
  『서울은 여기보다 열  배는 더 휘황찬란합니다.  가보고 싶지 않아
  요?』
  『이모부님 댁에서 위성 테레비로 봤습네다』
  속단이었을까?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아까 『병이  나으면 돌아가겠
  다』고 말하던 그 눈이 아니었다. 그녀는 북한에 있을 때 자기나 주
  변 사람들이나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고, 연변에 와서 처
  음으로 한국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가까이서 본 탈북자수용소
  
  우리 일행은 연길에서 사나흘 지내고 차를 빌려 국경 지역을 돌기로 
  했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국경이 맞닿는 지점인 방천에서 시작해 
  도문, 백두산 쪽까지 여정을 잡았다. 도문에서 30분  정도 더 들어가
  는 ○○○이라는 곳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는데,  이곳은 북한 쪽 마
  을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만큼  북한 쪽에서 수시로 사람
  이 건너와 쌀이며 먹을 것을 얻어간다고  했다. 얻어가기만 하면 괜
  찮은데, 도둑질을 해가는 일이 하도 많아서 북한사람들에 대한 여론
  이 좋지 않았다. 
  
  점심식사 후 서울에서부터 안내를  맡은 할아버지가 『도문에  가면 
  탈북자 수용시설이 있다는데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예전에 그 할아버지가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기차 안에서 
  북한에 송환중이던 여자 탈북자를 만나서 그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
  다. 그때 여자가 잡혀가는 것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좇아가서 항
  의도 해봤지만 끝내 그녀를 구출할 수가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탈북자 수용시설은 놀랍게도 도문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도문시 공
  안국 뒤편, 전형적인 주택가  골목 안이었다. ㅁ자 건물인데  밖에는 
  「변방대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서 얼핏 봐선 이곳이  탈북자 수
  용시설인지 알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안에 40∼50
  평쯤 되는 마당이 있고, 마당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문시 
  공안국 변방구류심사소」라고 쓰인 현판이 붙어 있었다. 
  
  길가에서 보아 건물 바깥쪽은 변방대대가  쓰는 사무실이고, 안쪽은 
  탈북자들을 수용하는 구류소로 쓰고 있었다.  앞의 사무실 건물은 3
  층, 뒤쪽의 구류소는 2층이었다. 구류소 1층 창문에는 창살이 빽빽하
  게 박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창문 안쪽은 시멘트로 막아놓았다. 
  우리 일행이 그곳에 갔을 때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일행들을 길
  가에 놔두고 나 혼자 마당 안으로  들어가 현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 갑자기 건물 안에서 군인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나와 입구 쪽에 
  서 있던 일행 중 한 명을 붙잡았다. 
  
  이렇게 해서 죄인 아닌 죄인 생활이 엿새 동안 계속됐다. 잠은 공안
  국 근처에 지정해준  호텔에서 잤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우리는 처음 2∼3일 동안 매우 심한  대우를 받았다. 
  여권과 카메라를 빼앗긴  것은 물론 완전히  스파이 취급을 당했다. 
  그러다가 처음 체포될 때 동료가  구타당한 사실 등을 들며  항의를 
  계속하자 대우가 한결 나아졌다. 
  
  조사를 맡은 변방대대 조사관은 조선족이었는데 처음엔 굉장히 딱딱
  거리며 우리를 불안하게 했지만 며칠  지나면서 가까워졌다. 처음엔 
  말끝마다 북한을 「우리 조국」이라고 불러 친북적인 사람이라고 생
  각했는데, 알고 보니 북한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
  었다. 한번은 북한에 대해 『저거,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집단이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탈북자들에 대한  대우가 썩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때로 내가 조사받는 창문  밖 마당으로 북한 아이들
  이 축구를 하며 노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는 탈북자들 조사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탈북자들에게
  서 받은 진술조서가 두툼하게 놓여 있었다.  조사 도중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나에게 『이거나 보고 있어요』 하면서 던져줘 많은 참고
  가 됐다. 조서에는 인적 사항, 탈북 목적, 탈북 시기, 동행자 여부 등
  등 항목을 적는 난이 있었는데, 그는  『북조선 것들은 어른이고 아
  이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독종들』이라고  혀를 찼다. 신문에 제대
  로 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 지금 북한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어요?』
  『지금은 한 30여명 돼요. 그 중 20명 이상이 어린이들이오』
  『왜 아이들이 그렇게 많아요?』
  『어른들은 잘 잡히지 않으니까…』
  그는 밀고가 들어오면 탈북자를 잡아와서  북한에 돌려보내지만, 마
  음은 아프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동안 최대한 잘해주려
  고 애쓴다고 했다.
  『수용하는 인원이 항상 일정한 편입니까?』
  『아니에요. 7월 전까지는 일 주일에  한번 정도씩 북한에 데려다주
  러 갔다왔는데, 요즘은 세 번씩 갔다와야  할 정도니까 굉장히 많아
  졌어요』(14∼15인승 차가 찰 만큼 탈북자가 모이면 한 차례씩 북한
  에 송환하는 시스템이다).
  
  한번은 북한으로 송환되기 위해 차에 올라타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
  다. 그때 차에 탈 인원은  어린이가 10여명, 어른이 3명이었다. 어른
  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 표정은 의외로 밝아보였다. 
  『너, 혼자서 왔니?』
  『아니요. (옆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동무들과 함께 왔습네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구나?』
  『(키득거리면서) 저는 두 번, 쟤는 세 번째랍니다』 
  『너, 돌아가면 혼나겠구나?』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일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탈북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북한 땅에서 배고파 
  못 참을 정도가 되면 언제든 다시 넘어올 아이들 같았다. 혹독한 환
  경 속에서도 애들은 자란다. 그러나 그렇게  자란 아이들 가슴 속에 
  숨겨진 큰 상처는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
  
  팔려 갔다가 또 팔리고…
  
  우리 일행은 6일 만에 여권을 돌려받았다.  여권에는 향후 5일 안에 
  중국 땅을 떠나야 한다는  붉은 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로써 한 
  달 예정으로 온 이번 여행은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나머지 며칠 동안 탈북자들을 여럿 만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
  에 남는 예는 인신매매로 팔려온 한  북한 여성이었다. 앞에서도 말
  했듯이 여성 탈북자들의 경우 한족이나 조선족 홀아비나 농촌총각과 
  짝을 맺고 숨어 사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전문적인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북한에서 팔려온 경우도  상당수에 
  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탈북하는 경우 「외모」가 어느 정도 
  따라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한 인신매매 브로커는 거기에  대해서 죄의식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일단 당사자가 「팔려가기를」 원하고, 자기들
  로서는 북한에 남아 있으면 어차피 굶어죽을 사람에게 살 길을 마련
  해주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당사자들이  느낄 모멸감은 어떻
  겠는가.
  그 여성과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고 먼  발치에서 보기만 했다. 안
  내인은 『저 여자 팔자가 참 기구하다』며 혀를 찼다. 소개업자에게 
  중국돈 3000원을 주고 그 여자를 데려온 남자가 몇 달  살다가 5000
  원을 받고 자기 친구에게 팔아먹었고, 두 번째로 그 여자를 산 남자
  는 다시 1만원에 또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지금도 중국 땅 어디에선가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중국 땅을 헤매는 탈북자 문제는 우리 정부로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적극 발벗고 나서기 어려운, 참으로 미묘한  문제다. 몇몇 국
  내 민간단체들이 탈북자를 돕는  활동을 은밀하게 벌여오고  있다지
  만, 단체간 협력체제가 없이 개별적으로 뛰고 있는데다가 중국 정부
  의 단속 때문에 큰 성과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인가. 정부와 민간의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
  께 고민해야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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