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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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10월  6일 화요일 오후 02시 31분 36초
제 목(Title): 강준만/ 옥수수박사 김순권 


남북 화해의 꿈을 가꾸는 '옥수수 박사' 김순권 /강준만
 
`녹색혁명가이며, 평화의 사도'

 

`옥수수 박사'로 알려진 경북대 김순권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96년 12월에 일어난 옥수수 종자 도난 사건 때문에 김 교수는 더욱 
유명해졌지만, 그 사건은 1천만 명을 위한 옥수수를 불과 10여명이 먹어치운 셈인,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렇듯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나 역시 김 교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지난 97년 4월에 나온 그의 `자전적 에세이' 검은 
대륙의 옥수수 추장 (한송)을 읽고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매우 탁월한 
농학자 이상의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는 모세의 삶처럼, 여기, 옥수수 씨앗 하나로 세계 평화의 
꿈을 가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그는 녹색혁명가이며, 평화의 
사도입니다."

그 책의 표지엔 그렇게 씌어 있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이제 북한의 
녹색혁명을 꿈꾸며 남북 화해의 사랑을 역설하는 사도로 활약하고 있다. 김 교수는 
북한에 대해 메마를 대로 메마른 데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심성을 갖고 있는 
남한의 많은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 그의 말을 경청해 보자. 

1945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한 김순권은 65년 울산 농업고등학교, 69년 경북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7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원래의 직장인 농업진흥청에 복귀했다. 그는 `옥수수 박사'였는데 그의 피땀어린 
연구 성과는 77년에 첫 결실을 맺게 되었다. 교잡종 옥수수를 개발해 농민들에게 
보급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어도 `그랬나 보다' 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의 책에서 교잡종 옥수수의 개발과 보급에 얽힌 사연을 읽으면서, 그게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일이었는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소처럼 우직한 사람

 

당시 김 박사가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농진청 내 다른 사람들의 반대였다. 
그들은 교잡종 옥수수의 개발과 보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책에서 "특히 일류 대학을 나온 직원들과 그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반대는 예상 
이상으로 격렬"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왜 반대했을까? 당시 교잡종 옥수수의 개발과 보급은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옥수수밀연구소는 그런 인식을 
강화하는 데에 앞장섰다. 개발도상국의 농학자들 사이에서 국제옥수수밀연구소의 
권위는 대단히 높았는데, 국내 학자와 연구자들은 그 권위에 주눅이 들어 김 
박사의 시도 자체를 미친 짓으로 간주하고 반대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 박사는 미국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다 뿌리치고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박봉의 농진청으로 돌아왔는데 그런 반대에 처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김 박사가 그냥 탁월한 농학자이기만 했다면 그는 아마 
농진청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김 박사는 농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선 황소처럼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농진청 청장에게 "만약 이 옥수수를 심어서 실패한다면 제가 10년간 
감옥살이를 하겠습니다."라고 탄원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웃는 가운데 추진한 일이었으니 
당시 그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는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을 했고 비가 
적게 와도 걱정을 했다. 

"얼마나 신경을 썼으면 아침마다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빠지곤 했다. 그때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앞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그의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어 버린 그의 집념과 애국심은 대성공으로 나타났다. 
동일 면적에서 과거에 비해 3배 이상의 수확을 거둔 것이다. 처음엔 그를 무시하고 
싸늘하게 대했던 농민들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옥수수는 밭의 쌀>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고 그는 `녹조근정훈장'과 
`농업연구상'을 받았다. 

그는 `강원도 옥수수 농가들이 지금도 심고 있는 수원 19호를 개발한 옥수수 
박사'라는 말을 지금도 듣곤 한다. 그런데 그 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고 
한다. 그건 20년 전에 김 박사가 개발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지난 20년 동안 
옥수수 농사가 아무런 진전이 없는 가운데 제자리걸음을 하였다는 뜻이니 어찌 김 
교수의 마음이 무겁지 않겠는가. 

 

`한국의 시바이처'

 

김 박사는 수원 19호를 개발한 다음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숭고한 
마음으로 한 국제 연구소의 연구원 자격으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다른 고생은 제쳐놓더라도 그곳에서도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원 시리즈를 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개도국에서는 교잡종 재배가 
성공할 수 없다'는 선진국 연구원들의 아집에 맞서 또 다시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농림 장관에게 "만약 실패하면 내 목을 
내놓겠습니다."라는 말까지 해 가면서 연구에 몰두하였다니, 그가 농학자 이상의 
인물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김 박사의 작업을 방해하는 선진국 연구원들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시기심과 
질투심도 작용하였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가난한 
아프리카를 돕기는 하지만 선진국에 손해 입히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것이 국제 연구소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왜 그런가? 나이지리아만 
하더라도 매년 미국에서 1억2천만 달러어치의 옥수수를 수입하는데, 만약 교잡종 
재배가 나이지리아에서 성공해 옥수수 수확량이 3배로 늘어나면 미국의 옥수수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그들은 각종 로비를 통해 개도국에서의 
교잡종 재배를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김 박사 덕분에 나이지리아는 85년부터 교잡종 옥수수 재배에 성공해 
미국으로부터의 옥수수 수입을 전면 중단했으니, 국제 연구소나 선진국 연구원들이 
김 박사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또 국내 학자와 연구자들은 그저 선진국 연구소와 
연구자들의 권위에만 굴복하는 데다 일류 대학도 나오지 못한 김 박사가 맹활약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그의 작업에 반대했을 것이다. 

김 박사가 아프리카 옥수수 농사의 가장 큰 적이라 할 `악마의 풀'에 대해 
저항력을 가진 신품종을 개발해 낸 사연은 농학 이상의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김 박사는 `악마의 풀'로 불리는 스트라이가라고 하는 기생 잡초에 
대해 복합 유전자 방식으로 신품종을 개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 
비결은 그가 지난 75년 통일벼에 대해 한 다음과 같은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5년 안에 통일벼가 실패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소. 지금은 
통일벼가 어떤 병충해에도 끄떡없는 강한 품종이라고 좋아하지만, 100% 병충해에 
강한 품종은 얼마 못 가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소. 두고 보시오. 통일벼 때문에 
말살될 지경에 처한 병충해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나라 논을 
초토화시키게 될 것이오."

물론 김 박사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의 예언은 `100%의 저항성을 가진 
품종은 언젠가는 그 저항성을 파괴하려는 병원균 유전인자에 의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병원균 유전인자에 대해서도 
5%의 살 여지는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트라이가의 경우도 5% 
정도의 종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돌연변이'라는 극렬한 저항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따라서 20년, 30년이 지나도 계속 강력한 저항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유익한 생물이건 피해를 주는 생물이건 간에 모두가 
종족을 보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모든 생물이 공생하는 
공간이 바로 자연이라는 게 바로 김 교수의 농학관이자 철학관인 것이다. 

김 박사가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보인 피땀어린 노력과 헌신은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필설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17년을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데다 큰 성공까지 거두었으니 그가 두 번씩이나 명예 
추장의 칭호를 받고 네 번이나 노벨상 후보로 추천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는 이미 노벨상을 받았어야 마땅한 인물임에도, 노벨상이 워낙 선진국 
위주로 수여되기 때문에 선진국보다는 개도국의 이익을 위해 싸워 온 김 교수에게 
아직 뜸을 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인들은 그에게 `한국의 
시바이처' `아프리카 대륙을 배불리 먹이는 사람' `중서부 아프리카 옥수수의 
아버지' `아프리카인보다 아프리카를 더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옥수수에 대한 무지와 편견

 

김 박사는 95년 11월 영구 귀국하여 현재 모교인 경북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는 
왜 귀국하게 되었을까?

"아프리카에서 북한 동포들이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동포들이 굶고 있는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영혼의 
울림을 듣고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김 교수에겐 구체적인 대안과 비전이 있다. 그는 지금 1억 원을 투입하면 통일 
비용 1천억 원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어디 그뿐인가. 남한은 세계 
제2의 옥수수 수입국으로 매년 8백만∼1천만 톤의 옥수수 알곡을 수입하고 있다. 
약 15억 달러어치나 되는 큰 돈이다. 남한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이상하게도 옥수수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판을 친다. 나 역시 
검은 대륙의 옥수수 추장 을 읽기 전까진 그런 무지와 편견에 빠져 있었음을 
실토해야겠다. "일각에서는 김 교수가 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어치가 떨어지는 
옥수수 연구에만 몰두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김 교수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일부가 아니라 국민 대부분의 옥수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 국민 99% 이상이 국내 최대 곡물 소비량이 쌀이라고 믿고 있으나 사실은 
옥수수입니다. 연간 쌀 소비량이 450만 톤인 데 비해 옥수수는 수입량만 1천만 
톤에 달합니다. 또 옥수수의 영영가가 쌀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은 옥수수의 영양가가 월등합니다. 이는 국민 대부분이 옥수수라 하면 기존 
옥수수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옥수수는 종류만도 2,500∼4,000종에 
달하고, 이 중 쌀보다 영양가가 뛰어난 것만도 수백 종에 이릅니다. 때문에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국가에 대해 동정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한국일보 97년 5월 1일) 

옥수수를 깔봐선 안 된다는 건 옥수수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쌀의 두 배라는 
사실로 간단히 입증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옥수수 필요량 중 70% 이상을 가축 
사료로 써 식량이 아니라는 안이한 생각 때문인지 정부가 증산 정책을 세우지 않는 
큰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농업진흥청이 지난 79년 
옥수수 전담 부서(과)를 만들었다가 94년 폐지한 건 정부의 대표적 `옥수수 천대' 
정책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사료·식용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며 "작년 한 해 옥수수를 
들여오느라 2조 원쯤 썼는데 그 돈으로 쌀을 사면 아깝고 옥수수를 사면 안 
아깝냐"고 반문한다. 최근 30년 동안 총 곡물 자급률이 93%에서 26%까지 떨어진 
것도 `쌀'만 중시한 정책 때문인데, 이는 북한의 기아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북한도 남한의 `쌀 증산 정책'에 영향을 받아 기후·토양 조건을 무시하고 지난 
86년부터 `이밥에 고깃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옥수수 재배를 게을리한 채 쌀 
증산에만 주력, 오늘날 식량난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반면 남북한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대했던 옥수수 증산에 열을 올렸던 중국은 요즘 옥수수 팔아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전국의 빈 땅을 놀리지 말고 
옥수수 재배로 활용하거나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에 슈퍼 옥수수를 
보급·양산해 양쪽이 덕을 보는 방안을 빨리 찾아 봐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북한 옥수수 심기 범국민운동

 

지난 1월 우여곡절 끝에 열흘간 북한을 방문한 바 있는 김 교수는 북한 적응형 
슈퍼 옥수수를 개발해 북한의 기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김 교수의 뜻에 호응하고 있다. 그러한 호응의 결과로 지난 
3월 13일 국제옥수수재단이 창립되었다. 4백여 명의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 
발기인 대회를 가진 이 재단은 "평화의 옥수수로 국내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북한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국제옥수수재단의 첫 사업으로 
`북한 옥수수 심기 범국민운동'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반도의 옥수수 재배 면적은 72만 정보입니다. 이 가운데 60만 정보가 북한에 
있지요. 단돈 2백 원이면 북한 땅 1평에 옥수수를 심을 수 있습니다. 남한 
동포들이 종자·비료·기술을 지원하고 북한 동포들이 땀흘려 일한다면 정보당 
7톤의 생산을 올릴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만 4백20만 톤의 옥수수를 수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북한 동포 2천4백만 명이 1년 동안 먹고도 8백만 명이 더 
먹을 수 있는 양이지요."

그렇다. 돈 1천 원이면 북한 땅 다섯 평에 옥수수를 심어 35명이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된다고 한다. 비료 20만 톤만 있으면 20만 정보에 옥수수를 
재배해 약 1백50만 톤이 증산될 수 있다는데 그 비료 지원을 두고 도무지 일이 잘 
풀리질 않는다. 문제는 늘 마음의 장벽이다.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와 언론 
인터뷰에서 나온 김 교수의 다음과 같은 개탄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 김 교수의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되새겨 보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이후 1년여 동안 북한에 적합한 슈퍼 옥수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보다 더 넘기 어려운 벽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CNN 방송을 통해 우리 정부가 북한에 15만 톤의 쌀을 보냈다는 
뉴스를 듣고 한 편으로 반가우면서도 또 한 편으로 무척 안타까웠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그때처럼 
절실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조용히 도와줄 수는 없었을까. 북한 동포들의 몇 일분 양식에 불과한 양의 
쌀을 주면서 세계 곳곳에 대고 떠들썩하게 선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고, 남한은 국가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세계가 다 아는 처지에서 무얼 더 감추고 무얼 더 숨길 것이 있겠습니까? 
한반도 온 누리에 옥수수를 심으며 남과 북이 가슴을 열고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돌보아야 할 이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 동포들이다.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일, 이 일은 결코 다른 나라에 맡길 일이 
아니다. 미국도, 일본도, 유엔도 아니다. 그건 우리의 일이다. 바로 지금 서둘러야 
할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왜 통일을 하려고 하는가? 북한 동포들이 죄다 굶어 
죽고 난 텅 빈 땅덩이를 차지하기 위해서인가. 분명 그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뜻에서 이 책이 진정으로 통일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희망도 
함께 전한다."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김 교수가 검은 대륙의 옥수수 추장 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우리의 그런 
답답한 현실을 바꾸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겠지만, 그는 특별히 또 바라는 게 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자라난 젊은 세대들이 보다 많이 이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바라는 것은 이 책이 이 나라의 수많은 직장인들, 
그 중에서도 공무원들에게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삶'과 `소신을 가지고 임하는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줄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김 교수가 공무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살아 온 인생에서 우러나온 체험적 
교훈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사실 
공무원들만 자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한다면 대부분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김 
교수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공무원들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이 땅의 공무원들이여, 직장인들이여! 남들이 뭐라고 하든 지금 그대들이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라.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일에 부딪쳐 가라. 그렇게 살다 보면 그대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곧 성공이요, 
명예일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한 호소를 자신부터 엄격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의 방북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적어도 남북 화해를 중요시하는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김 
교수의 희망은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몰이 이벤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김 교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6월 18일 김 교수의 대북 협력사업자 및 협력사업 신청을 승인했다. 김 
교수는 2001년 6월까지 3년간 30억 9천만 원을 투자, 북한 정무원 산하 기관인 
농업과학연구원과 함께 슈퍼 옥수수 개발을 위한 공동 연구와 수원 19호 등 새 
품종에 대한 생산력 검정 시험 및 재배 적지 확정 등의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국민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다. 그는 국내에 돌아온 뒤에도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 가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뒤늦게 다행히도 국제옥수수재단이 
출범해 그의 사업을 돕고 있지만 이 또한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돈 
1천 원이면 북한 동포 35명이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될 수 있다는데, 
무엇을 망설이랴. 02- 741-5745로 전화를 하셔서 아주 작은 성의나마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으로 참여하시기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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