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10월 1일 목요일 오후 03시 53분 26초 제 목(Title): 신동아/정의의 칼날인가,권력의 시녀인가 [추적 취재] 정의의 칼날인가, 권력의 시녀인가 ‘김태정 검찰’을 사정한다 신석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 『정치인은 최고의 선이다』 검찰의 정치권사정이 본격화된 9월초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최근 검찰 내부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시시콜콜한 기업이나 이름없는 한 검사는 최근 검찰 내부 분위기를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시시콜콜한 기업이나 이름없는 협회장 한 사람을 잡더라도 『뇌물을 준 정치인 이름을 한 사람이라도 불어라. 그러지 않으면 큰집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이라고 강요할 정도로 정치인 수사에 적극적이라는 것. 피의자가 「정치인 한 명을 불면 불구속 기소, 두명을 불면 벌금」이라는 얘기도 검찰주변에서는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한 검사는 『7월중순 김태정검찰총장이 기업인들이 자진해서 도피재산을 회사나 사회에 되돌려줄 경우 처벌을 면제할 수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치인 이름을 불어야 선처받을 수 있는 분위기』 라고 귀뜸. 일부 소장검사들은 이런 분위기에 대해 김영삼정권에 이어 검찰이 또 다시 정치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한 검사는 『이번 사정 역시 지난 정권처럼 정치적 사정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면 정권이 바뀐뒤 검찰이 어떤 부담을 질지 불을 보듯 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은 검찰 사정이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여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입만 열면 강조한다. 그런데도 야당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야당파괴공작이라고 몰아세우고 있고, 검찰 내부에서 조차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교수는 『검찰 사정이 본질과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장교수는 무엇보다 이번 사정에서는 방만한 경영으로 금융부실을 초래, 결과적으로 국민부담을 가중시킨 부실기업인 및 부실금융기관 임원에 대해 책임을 철저히 추궁하는 일이 우선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 회사 돈을 빼돌려 재산을 은닉하는 등 불법·탈법행위가 드러난 기업주는 당연히 사법처리하는 원칙을 관철했어야 한다는 것. 장교수는 그런 다음 부실기업주의 유착된 정치인을 여야 가리지 않고 처벌하는 수순으로 검찰 사정이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국민부담을 최소화하는 길이고, 경제개혁의 첩경이라는 것. 그러나 검찰이 「정치인 지상주의」드라이브를 걸면서 경제사정은 실종돼 본말이 전도됐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국 정쟁에 휩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칙 잃은 사정, 형평성 시비 자초 9월16일 현재 검찰의 정치권 사정과 관련, 검찰에 구속된 정치인은 홍인길(洪仁吉) 전의원, 김우석(金佑錫) 전내무장관, 국민회의 정대철(鄭大哲) 부총재, 한나라당 이신행(李信行) 의원 등 모두 4명. 또 안기부의 공기업 대선자금 불법 모금에 관련된 한나라당 김태호(金泰鎬)·김동욱(金東旭) 의원은 검찰 조사를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또 이날 현재 검찰 조사를 받고 있거나 소환통보를 받은 사람은 국세청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과 관련된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의원, 청구 그룹 장수홍(張壽弘) 회장에게 수천만원씩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김중위(金重緯)·이부영(李富榮) 의원, (주)경성 이재학(李載學) 사장에게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드러난 한나라당 이기택(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 동아건설에서 1억원을 받은 혐의가 드러난 한나라당 백남치(白南治)의원 등이다. 또 청구 장회장에게서 2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국민회의 김운환의원도 검찰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야당은 이에 대해 수사가 야당 의원에 집중된 사실을 들어 검찰이 야당 파괴에 나선 여권의 꼭두각시가 됐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특히 검찰의 이기택 전 총재권한대행 소환 계획이 알려진 9월15일 오후 한나라당은 『야당 지도부를 소환 조사하려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던 정치파괴 행위』라 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9월14일 국세청의 대선자금 불법 모금사건과 관련, 서상목의원이 검찰에 자진출두하는 모양새를 갖추면 여권으로부터 「화답」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검찰 주변에서는 이날 서의원의 자진출두는 정치인 사정으로 경색된 정국을 풀기 위해 서의원을 불구속기소하기로 했다는 여야간 물밑대화의 결과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기택 전 총재권한대행 소환 방침이 알려지자 정국은 또다시 난기류에 빠졌다. 여권은 여야간 협상 진전이 정치권 사정의 중단으로 비치자 『정국 정상화와 사정은 별개』라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대구에서 이회창(李會昌) 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장외투쟁에 나서는 등 대여 공세 수위를 높였다. ------------------------------------------------------------------------------- - 검찰 중립성 훼손 심각 ------------------------------------------------------------------------------- - 기본적으로 검찰의 정당한 사정작업에 정치인이 반발하는 것은 전혀 명분이 없다. 더욱이 『한나라당이 정경유착에 관련됐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반발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 그러나 사정을 하는 여권 스스로 야당의 반발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청와대와 여권이 정치권 사정 수사 초기부터 『물증이 확보됐다』 『수사에 성역 없다』고 분위기를 잡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검찰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정치인 사정은 여야 구분없이 원칙과 기준에 따라 철저히 추진될 것』(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강조하면 할수록 검찰 중립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비리 있는 곳에 당연히 검찰 사정이 있어야지 청와대가 철저히 하라고 해서야 하는 사정은 이미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박원순 변호사)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정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검찰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을 사정하게 된 데에는 야당의 책임이 크다. 국제통화기금 관리하에 들게 된 국가위기를 극복하는 데 협조는커녕 걸림돌로만 작용한 결과다』라고 공공연히 밝히는 검찰 간부가 있는 한 검찰이 여권의 정계개편을 위해 총대를 멨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엄정한 사정 결과 정치권이 개편되는 거야 시비를 걸 사안이 아니지만 검찰이 처음부터 정치권 개편을 겨냥하고 사정을 한다면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치권 사정과 함께 여권의 야당의원 영입 작업이 가시화되면서 야당의 형평성 시비가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는 상황이다. 또 사정 작업 자체의 정당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는 『사정에 정치적 의도가 끼어들면 사정작업이 전면적이고 엄정하게 진행되지 않고 영입을 위해 특정인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야당과 거래해 봐주기로 흐를 가능성이 있으며, 그런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 사정이 한창이던 9월8일 유용태(劉容泰)·김길환(金佶煥)·박종우(朴宗雨) 송훈석(宋勳錫)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 국민회의에 입당함으로써 여대야소가 된 것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또 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홍문종(洪文鐘)의원이 한나라당 탈당 직후 있었던 항소심에서 80만원으로 감형돼 의원직을 유지하게 된 것도 그렇다. 반면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의원은 9월3일 서울고법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될 경우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당연히 홍의원은 『정치적 사정과 재판의 피해자』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특히 홍문종의원과 비교, 『탈당 무죄, 잔류 유죄』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정의 정치성에 대한 의혹이 일면서 당연히 「표적사정」 「편파사정」 「끼워넣기 사정」이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9월5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수원지법에 출두한 한나라당 오세응(吳世應)의원은 구린 돈을 받고도 되레 검찰이 여당의 하수인이 됐다고 검찰을 맹비난했다. “DJ정부요, 사정할 자격 있나요?” 의원직 박탈위기 처한 한나라당 홍준표의원 인터뷰 9월3일 서울고법에서 선거법위반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의원은 자신이 『정치적 사정과 재판의 피해자』라며 항소를 기각한 판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자신과 함께 재정신청됐다가 야당을 떠난 홍문종(洪文鐘)의원이 항소심에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탈당 무죄, 잔류 유죄』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받아보기 위해 상고했으나 『이 정부의 의도대로 사법의 칼을 빌려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출범초기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로서 슬롯머신 사건을 파헤치는 등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던 홍의원. 그때문인지 최근 진행되고 있는 검찰의 사정태풍에 대한 그의 평가는 신랄하다. ―검찰 사정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지적해주십시오. 『비리 정치인이 퇴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목적이 정치적입니다. 검찰은 야당의원들을 대상으로 영장도 없이 무차별 계좌추적을 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이 정부의 사정은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을 가속화해 오로지 남는 것은 국민들과 대통령 외에는 없는 포퓰리즘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 조치라고 봅니다. 덧붙이자면 이 정부는 사정을 할 만한 자격이 없어요. 자신의 과거는 은폐하고 남의 약점만 들추어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됩니다』 ―검찰이 정치적이라는 얘긴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법무부 장관과 검찰의 몇몇 간부들 때문이라고 봅니다. 경성비리사건만 해도 로비는 대선 이후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에게 집중됐습니다. 검찰이 이들에 대해 치밀하게 계좌를 추적하고 비리를 수사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비리만 보고 갔다면 걸리는 여야 의원은 처음부터 무조건 처단돼야 했습니다』 ―올바른 사정의 원칙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정은 지금처럼 일정한 시점을 두면 안 되고 일상화해야 합니다. 검찰은 권력기관과 고위공무원, 정치인들을 늘 감시하고 있어야지요. 또 여야를 가리면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검찰은 독자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치권의 힘에 밀려 검찰이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검찰이 경제계 비리 수사에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있는데요. 『경제문제 때문에 비리를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라가 썩어문드러져도 된다는 식의 발상입니다. 일시적 손해를 보더라도 철저한 수사를 하는 것이 경제를 튼튼하고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어느 재벌은 외국에서 8000만달러를 빼돌리고 어느 재벌은 빼돌린 외화를 투자형식으로 다른 자금과 섞어 다시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나한테까지 들리는데 대검 중수부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부도덕한 기업인들에게 철퇴를 가해야 나라 경제가 튼튼해집니다』 ―검찰이 정치적이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검사는 정치적이지 않은데 검찰 고위간부들이 정치적이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검사가 나이가 들어 간부가 되더라도 초임 때의 정열을 가지고 있으면 정치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검사의 도(道)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검찰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태정 검찰총장이 이끄는 검찰의 비극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 비자금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린 데서 시작됐습니다. 이는 향후 검찰의 위상을 예고했습니다. 그 사건은 관대하게 하면서 야당의원 수사는 이잡듯이 하고 있어요』 ------------------------------------------------------------------------------- - 「재고처리 사정」과 「끼워넣기 사정」 ------------------------------------------------------------------------------- - 오의원의 혐의는 경기 성남시 N호텔 건축주 김모씨로부터 94년 8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관계 공무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건축허가와 차관도입을 성사시켜주겠다며 4300만원을 받았다는 내용. 또 김씨가 이인제(李仁濟) 경기지사 후보에게 전달해 달라며 준 1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5월 김씨를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하면서 당시 오의원이 김씨에게서 받은 1000만원을 「뇌물이 아닌 정치후원금」이라며 더이상 수사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와중에 의욕적으로 수사에 임했던 N검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표를 던져 정치권 압력 때문 아니냐는 뒷말이 무성했다. 당시 N검사 후임으로 수사를 마무리한 송모 검사는 『업자가 「1000만원은 정치후원금」이라며 영수증을 제시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결국 검찰은 당시 작성한 오의원 파일을 남겨 두었다가 이번 「소나기식 사정」에 맞춰 김씨를 다시 소환 조사한 끝에 오의원의 추가 혐의를 밝혀낸 셈이다. 검찰로서는 묵은 파일을 꺼내 「재고처리 사정」을 했다는 지적에 할 말이 없게 됐다. 오의원은 『검찰이 「야당 고사작전」을 추진하는 여당의 하수인이 돼 스스로 정치후원금이라고 결론내린 돈을 이제 와서 대가성 뇌물로 몰고 있다』며 『오죽 하면 최근 다시 검찰 조사를 받은 김씨가 나에게 「형님, 국민회의로 옮기시지 왜 야당에서 이 고생을 하십니까」라고 하소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년 5월 수사 당시의 상황을 묻는 보도진에 『당시 성남지청 수사에 대해 법무부장관에게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말해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케 했다. 검찰은 이에 대해 『오의원에 대한 사건을 재수사하면서 지난해 수사기록을 참고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9월16일까지 검찰의 사정으로 구속된 유일한 여당 정치인은 정대철국민회의 부총재. 그의 구속은 지난해 3월 (주)경성이 서울시 소유의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을 수의계약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하고, 경기 고양시 탄현아파트의 사업계획승인을 받게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4000만원을 받은 혐의 때문이다. 9월2일 정부총재를 전격 소환해 구속한 검찰은 『여야의 요구대로 경성사건을 철저하게 재수사하던 중 정부총재가 받은 4000만원이 대가성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정상적으로 사법처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7월31일 한국부동산신탁사건과 관련, 경성그룹이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정·관계 인사 15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정부총재가 3000만원을 수수한 것은 뇌물죄로 인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당시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문제는 검찰의 정부총재에 대한 사법처리 시점. 검찰 관계자는 『경성 관계자들이 처음에는 청탁 사실을 진술하지 않았으나 재수사가 시작되고 수사팀이 바뀌자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팀이 바뀌기 전 이미 정부총재의 뇌물수수혐의를 입증할 만한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진이 이런 진술을 확보한 뒤 검찰 수뇌부에 사법처리 여부를 물었으나 수뇌부가 「처리 시기를 기다리라」고 지시, 9월 초 영장을 청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 수뇌부는 9월 정기국회 개회 전 정치인 비리에 대한 일괄처리를 계획하고 야당의 「형평성 시비」에 대비할 카드로 정부총재를 내놓으려 미리 준비를 했다는 것. 이른바 「끼워넣기 사정」이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범죄자의 혐의를 밝히는 것은 원칙대로 해야 하지만 구속과 불구속을 결정하거나 사법처리를 하는 시기는 검찰이 전략과 전술 차원에서 조정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정부총재가 13대 국회 때부터 줄곧 「비(非) DJ」 노선을 걸어온 당내 비주류라는 점을 들어 「희생양」으로 걸려든 것 아니냐는 동정론도 일고 있다. 특히 김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작년 한보사건으로 사법처리된 권노갑(權魯甲) 전의원이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8·15 특사 때 사면복권된 것과 비교, 불공평하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당연히 박상천(朴相千) 법무장관과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 잘 알려진대로 박장관과 김총장은 광주고 선후배 관계. 한나라당에서는 박주선(朴柱宣) 청와대 법무비서관 역시 두 사람의 광주고 후배인 점을 들어 세 사람이 사정작업을 조율하고 있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 - 『정치인 수사, 완급·속도 조절 없다』 ------------------------------------------------------------------------------- - 그러나 박장관은 정치인 수사와 관련해서는 검찰청법에 따라 수사 착수 사실만 보고받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특정인에 대한 표적수사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누구는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 수사에 대해서는 완급이나 속도 조절은 전혀 없고, 오히려 엄정하게 하라고 지시해놓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박장관 주변에서는 그가 김대중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실세 장관」이라는 점을 들어 김대통령과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권 사정에 드라이브를 건 사람은 박장관이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실 박장관은 김대중대통령에게도 자기 소신을 거침없이 밝히는 등 정치권에 몸담고 있을 때도 원칙주의자로 통했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는 정치인으로도 유명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엘리트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친화력이 부족한 탓이지 사귈수록 솔직담백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박장관은 평소 『최대의 개혁은 돈 안드는 선거(정치) 풍토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거(정치)에서 돈을 덜 들게 해야 하고 그나마도 공개적으로 모금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이 국세청과 안기부를 동원한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불법모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드는 것도 박장관의 이런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장관은 실제 9월 초 어느 사석에서 『한나라당에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대선자금 전체를 수사하려는 것이 아니고 국가기관을 동원한 불법 대선자금 모금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야당 대선자금이 일부 드러나게 된 이상 현 여권의 대선자금도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현 여권은 작년 11월14일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관례에 따라 정치자금을 받았으나 법 개정 이후에는 문제될 게 전혀 없다』면서 야당이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면 조사에 응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해 8월7일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의 「신망」으로 최초의 호남 출신 검찰총장이 된 김태정총장은 당시 여야 모두의 환영과 기대를 받았다. 당시 자민련은 김총장을 『업무에 책임감이 강하고 균형감각을 가진 인물』이라고 논평했다. 국민회의도 『김총장이라면 「중립 총장」의 위치를 지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총장 취임 이후 DJ비자금 사건을 「슬기롭게」 넘기고 환란수사와 북풍사건을 큰 탈 없이 처리했다. 그를 잘 아는 검찰 관계자들은 야당 의원들의 「편파수사」 주장은 그야말로 정략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 안팎에서 시달리는 박상천·김태정 ------------------------------------------------------------------------------- - 그러나 두 사람은 정치권 사정으로 안팎에서 시달리고 있다. 한나라당은 두 사람이 편파·표적 사정을 하고 있다며 탄핵소추문제까지 들먹이고 있다. 반면 여권에서는 두 사람이 너무 정치를 모른다고 눈치를 주고 있다. 실제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 총무는 박장관에 전화를 걸어 정치인 관련 부분을 사전에 귀띔해주지 않는다며 섭섭함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부에서는 박장관의 인권수사 방침에 대해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박장관이 기회있을 때마다 잠 안 재우기 수사는 반드시 책임자를 가려내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수사를 하지 말란 소리냐』는 반발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박장관은 법질서 수호 못지 않게 인권 수호도 중요하다고 못박는다. 3월20일 검찰 조사를 받던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이 자해하고, 4월23일 밤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비리로 대검에서 조사받던 한솔제지 이명철 (李明喆)상무가 자해를 시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찰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그래서인지 5월 들어 강경식(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金仁浩) 전 경제수석의 경우 「출퇴근 조사」를 하는 등 조금은 달라진 듯했다. 그러나 변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언론과 여론의 감시가 뜸해지자 검찰의 밤샘수사 관행은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검찰은 경성비리사건과 관련, 국민회의 정대철 부총재와 김우석 전장관을 모두 밤샘조사한 끝에 구속했다. 일선 검사들은 『피의자들은 밤이 되면 심리적으로 약해지고 새벽에야 자포자기해 범죄를 실토하게 된다』며 밤샘수사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김총장에 대해서는 외부 정치상황에 너무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내부 비판이 없지 않다. 8월31일부터 불어닥친 사정한파도 검찰이 의도했건 아니건 결국 「여대 야소」라는 여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됐다. 김총장은 특히 야당 총재인 이회창 총재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종종 표출, 검찰총장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김총장은 올 2월21일 이총재에 대해 『법조인 출신이라기보다 인기관리를 위해 여론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인』이라고 공보관을 통해 공식 비난했다. 김총장 역시 이른바 「경성 리스트」 공개로 여권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여권은 7월30일 국민회의와 자민련 소속 의원이 대부분인 「경성 리스트」가 한나라당에 의해 유출되고 다음날 서울지검장이 명단을 공개하자 『혐의가 확인된 것도 아닌데 명단을 발표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반발했다. 여권 정치인들은 『비호남 출신 검사들이 여권 의원들만 의혹을 뒤집어 쓰게 만들었다』며 「음모론」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법무부는 8월27일 인사에서 충청도 출신인 이정수(李廷洙)서울지검 3차장과 경상도 출신인 문영호(文永晧) 특수1부장 등을 전보발령하고 수사팀을 사실상 해체했다. 인사를 둘러싼 이런 상황은 가뜩이나 부족한 검찰 수사력을 그나마도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새 정부 들어 검찰의 대대적인 인사로 사정 라인 사이에 손발이 안 맞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상황에 정치권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검찰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제살 깎기나 마찬가지라는 것. 이에 대해 일선 검사들은 『검찰 인사가 정치권의 논리에 휘말린 결과』라며 수뇌부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이때부터 비호남 출신인 젊은 검사들 사이에서는 『요즘처럼 민감한 때는 한직에 물러나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박상천 장관 취임 이후 처음으로 단행한 3월27일 검찰 정기인사에 대해 「참신한」 인물들이 요직에 갈 기회가 제공됐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따랐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들의 경우 수사 기술면에서 과거의 노련한 「전문가」들과 비교할 때 다소 처진다는 일부의 우려도 없지 않다. 특히 「신공안」 검사들을 두고 안기부 관계자들은 『무엇이 기밀인지 구별조차 못한다』고 불평할 정도다. 사정기관간 손발이 안 맞은 케이스로 흔히 거론되는 게 박종세(朴鍾世) 식품의약품안전청장 비리 조사와 데이콤 거액 정치자금 제공 혐의 내사다. 특히 박청장의 경우는 사정기관 내에서도 『악의적인 투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일부 언론이 내사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파문이 확대된 케이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두 사건은 사정기관 사이에 의견 수렴만 충분히 했어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관계자들이 엉뚱한 곤욕을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8월4일 조간신문은 일제히 서울지검 서부지청이 전날 박종세청장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박청장을 불러 뇌염백신을 개발 시판중인 N제약사에서 뇌물을 받고 다른 제약사의 뇌염백신 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는지를 추궁했다는 것. 또 돈을 받고 직원을 채용한 혐의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는 것. 그러나 박청장은 8월3일 검찰이 자신을 내사하고 있다는 「한겨레신문」 보도를 보고 즉시 김모임(金慕姙)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에 가서 모든 것을 해명하겠다』고 밝힌 후 스스로 검찰에 출두했다는 후문. 검찰에서는 그를 상대로 강도높은 조사를 했지만 혐의를 밝혀낼 수 없어 무혐의처리했다. 박청장은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검찰에서 청렴성을 검증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웃어넘긴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가 식약청 내에서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하다 변화를 싫어하는 기존 세력의 모함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데이콤의 거액 정치자금 혐의 역시 사정기관내에서 논란이 됐으나 언론에 공개되면서 검찰 입장만 난처해진 경우. 혐의 내용은 데이콤 경영진이 시외전화 회선자동선택장치와 공중전화 장비를 구입하면서 납품업체로부터 30억원을 상납받아 이 가운데 일부를 정치인에게 주었다는 것. 데이콤 경영진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조사는 투서가 들어와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데이콤 곽치영사장이 한나라당 강삼재(姜三載) 전 사무총장과 마산고 동문이고, 조익성 전무가 한나라당 조순(趙淳) 전 총재의 사촌동생이라는 점에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재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 사정에 묻혀 실종된 경제사정 검찰 이 「정치인 지상주의」에 매달리면서 경제사정은 완전히 실종된 느낌이다. D그룹 전회장의 재산 도피혐의는 이제 검찰 내에서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잊혀지고 있다. 검찰은 6월부터 현 경제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부실기업과 부유층의 외화 밀반출에 있다고 보고 집중수사를 벌여 왔다. 검찰은 이 가운데 D그룹이 계열 건설사를 통해 기업자금을 유용하고 해외공사를 수주하는 과정에 수백만 달러를 빼돌려 제3국 금융기관에 은닉한 혐의를 잡고 임직원들을 소환해 계좌추적 작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8월 말부터 이 그룹에 대한 수사는 경제수사에서 대선자금과 정치인 수사로 변질됐다. D그룹 관계자들이 검찰에서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과 정치인들에게 돈을 준 사실을 검찰에 「선물」하면서 수사 초점이 바뀐 것. 한나라당 서상목의원이 국세청 임채주(林采柱) 전 청장과 이석희(李碩熙) 전 차장을 동원, 기업체로부터 대선자금을 불법으로 모은 이른바 「세풍사건」은 D그룹 관계자들이 검찰에 진술해 밝혀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 수뇌부는 「세풍사건」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D그룹 관계자들이 예뻐 죽겠을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또 한나라당 백남치의원과 자민련 김종호(金宗鎬)의원의 개인비리 혐의도 D그룹 관계자들의 「실토」로 드러나게 됐다는 것. 그러나 김종호의원의 경우 검찰은 『대가성을 입증하지 못해 사법처리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김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 자민련에 입당했기 때문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D그룹 리스트」에는 정치인 2, 3명이 더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당초 수사 초점은 외화 밀반출 사실을 밝히고 빼돌린 외화를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었다』면서 『그러던중 비자금 계좌를 추적하다 정치인 비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나왔다』고 말했다. D건설은 지난해부터 자금난을 겪어 금융권에서 수천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다. 이는 이 그룹 전 오너가 충청도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현재로선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 그룹은 또 1조원에 달하는 수도권 용지를 용도변경하기 위해 정치권과 정부를 상대로 설득작업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 - 경제인 사정, 의지도 능력도 없다 ------------------------------------------------------------------------------- - 검찰 주변에서는 이 그룹이 「세풍사건」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데다 거물급 정치인 비리를 검찰에 「불어준」 점 등에 비춰 이 그룹 오너의 외화은닉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선처」를 받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뿐만 아니다. 「세풍」 수사에 묻혀 박건배(朴健培) 해태그룹 회장과 장진호(張震浩) 진로그룹 회장 등 부실기업주들의 탈법혐의에 대한 대검 중수부의 내사는 거의 중단된 상태. 서울지검 특수1부도 경성사건에 묻혀 거평그룹 나승렬(羅承烈)회장과 나선주(羅善柱)부회장의 계열사 불법대출 혐의에 대한 기록을 검토도 못하고 있는 상태. 서울지검 관계자는 이와 관련, 『거평그룹 사건의 경우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고발해온 것이기 때문에 정치인 사정이 끝나면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수사 의지는 한풀 꺾인 느낌. 검찰 주변에서는 이 사건도 사정정국이 마무리되면서 용두사미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검찰이 구속한 부실기업인 가운데 거물급은 장수홍(張壽弘) 청구그룹 회장 정도. 대구지검 조사부는 작년 말 부도를 낸 청구의 장회장 등 경영진이 회사 공금을 불법 전용한 혐의를 잡고 수사에 착수, 회사자금 1472억원을 빼돌린 사실을 밝혀내고 5월15일 장회장을 구속했다. 대구지검은 장회장이 조성한 비자금 700억원 가운데 상당액이 정계 및 관계에 로비자금으로 사용됐다고 보고 대검 중수부와 공조수사에 착수, 청구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6월9일 김경회(金坰會) 전 철도청장을 구속한 데 이어 7월26일에는 장회장에게 40억원을 받은 혐의로 홍인길 전 의원을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 금융기관 부실대출과 관련해서는 조흥은행 송기태 전행장이 대출사례비 명목으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허종욱 전 전무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 상태. 그러나 금감위가 동화 동남은행 등 5개 퇴출은행 임직원에 대한 출국금지와 함께 검찰에 요청한 수사 역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경제인 사정의지가 퇴색하면서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부실기업주들에 대한 수사도 당연히 스톱된 상태. 이 부분에 대한 수사는 검찰의 의지도 문제지만 검찰의 수사능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7월13일 발표된 한보그룹 동아시아가스의 스위스은행 비자금 은닉사건만 해도 그렇다. 이 사건은 서울지검 외사부의 쾌거로 칭송받았다. 검찰수사로 한보가 러시아 루시아석유의 지분 20%를 팔아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스위스에 은닉하려던 3300여만달러를 국내로 되찾아 올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사는 영국에 살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 B씨의 제보가 없었다면 완전범죄가 될 뻔했다. B씨는 우연한 기회에 한보가 루시아 지분의 27.5% 가운데 20%를 러시아 시단코 회사에 팔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보가 기록을 조작해 돈을 빼돌린 것 같다』고 주영 한국대사관에 알렸다. 외교통상부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아 수사에 착수한 서울지검 외사부는 국내에 있던 동아시아가스 전규정(田圭正)사장과 임종인(林鍾仁)기획부장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해외수사 방법이 전무했던 검찰은 전사장과 임부장에 대해 압박작전을 편 끝에 겨우 사건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사 출신인 이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검찰 관계자는 『두 사람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면 수사는 장기간 미궁에 빠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사정관련 말… 말… 말 ▼이회창 총재가 자신을 위해 서상목 의원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식의 손가락을 자른 비정한 아버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윤호중 국민회의부대변인, 9월14일 서상목 의원의 검찰 출두가 이총재와 한나라당의 조직적인 불법모금 개입사실을 감추려는 의도라면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며) ▼국민회의는 왜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가(안상수 한나라당대변인, 9월12일 성경구절을 인용해 대선자금문제에 대한 국민회의의 태도를 비난하며) ▼올해 76세나 되신 분이 「사정」 「사정」하다가 혹시 내년에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이규택 한나라당의원, 9월 11일 의원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김대통령을 「걱정」하며) ▼정당의 재정국장을 소환 조사하겠다는 것은 당의 금고를 통째로 열어 보겠다는 발상으로 해방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신경식 한나라당사무총장, 9월11일 검찰이 김태원 전재정국장을 소환하려는데 대해) ▼우리는 민선 황제에 대한 신민주화투쟁을 하고 있다(박희태 한나라당 원내총무, 9월10일 의원총회에서 김대통령이 민선 황제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요즘 정치권에는 「걸면 걸리는 걸리버의원」들이 많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국민회의 당직자, 9월6일 검찰 수사만 진행되면 바로 수뢰혐의로 걸릴 정치인들이 몇몇 있다는 것을 빗댄 시중의 유행어를 전하면서) ▼설사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비리가 있으면 구속하라(김대중대통령, 9월4일 정치인비리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강조하며) ▼요즘에는 「밤새 안녕하셨느냐」고 인사를 나눈다(한나라당 당직자, 9월3일 자고 일어나면 한명씩의 한나라당 의원이 검찰의 「표적사정」에 걸려 들고 있다며) ▼요즘 우리 당 의원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탈당을 권유하는 전화거나 검찰에 출두를 요구하는 전화다(김광원 한나라당제1정책조정실장, 3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유연성을 선물로 줬더니 경직성만 돌아오고 있다(박희태 한나라당원내총무, 9월2일 검찰의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 움직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한나라당이 국세청장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모금한 것은 파출소 소장이 관내 유흥업소에서 강제로 돈을 거둬 그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에게 상납한 것이나 다름없다(박홍엽 국민회의부대변인, 9월1일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모금을 비난하며) ------------------------------------------------------------------------------- - 해외재산 도피 범죄에는 속수무책 ------------------------------------------------------------------------------- - 그러나 서울지검 외사부가 7월 초 통신기기 부품 수입가격을 조작해 회사 돈 458만여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한 전자회사 사장을 구속한 사건의 경우 검찰의 수사 실력이 여지없이 드러난 케이스. 이 사건은 미국 자회사 등을 통해 부품을 수입하면서 실제 수입가보다 높게 서류를 조작해 차액을 외국에 떨구는, 전형적인 재산도피 유형. 문제는 빼돌린 돈의 행방과 다른 주인이 있는지의 여부. 미국 자회사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그런 돈을 본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 사건에 국내 모 그룹이 관련됐다는 첩보를 입수해 구속된 사장과 관련자들을 추궁하고 압수된 경리장부 등을 조사했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미국에 파견된 관세협력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회사 등 관련회사들에 대한 자료를 입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측이 협조하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검찰은 빼돌려진 돈이 밝혀진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으며 돈의 주인은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수사는 답보상태다. 부도를 낸 재벌그룹의 해외 재산도피혐의를 수사중인 검찰 관계자는 『재벌 총수의 재산 해외도피를 검찰 자력으로 수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증거를 찾으려면 현지지사 등을 압수수색해야 하는데 이는 국제법상 불가능하고 지사 관계자들이 입국하지 않거나 도망가면 손쓸 방법이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점에서 기업의 재산도피 범죄는 오로지 회사 내부 인사의 제보나 압수수색을 통해 국내에서 확보한 경리장부 등을 토대로 관계자로부터 실토를 받아내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들의 설명. 한 관계자는 『기업의 횡령과 배임 등 국내 비리를 밝혀내 해외재산 도피혐의와 바터를 하는 편법도 써보지만 그나마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검찰이 그동안 과학적 수사기법을 축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점도 오늘날 경제범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범죄 수법은 갈수록 지능적이 돼 가는 데 반해 검찰은 여전히 밤샘조사 등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방법에만 의존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검사들의 의식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외환위기 수사 당시 검찰에 가서 참고인 진술을 했던 한 연구소 연구위원은 『검사들이 엘리트 의식에 젖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가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으니 21세기형 최첨단 경제범죄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동아시아가스 사건을 파헤친 당시 박태석(朴泰錫) 서울지검 부부장검사는 『기업주 등의 재산 해외도피 수사를 전담할 전문추적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유사한 범죄에 대한 외국의 사례를 연구, 수집하고 외국기관과 인맥을 쌓으면서 수사기술을 축적할 수 있는 전문가를 육성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 ------------------------------------------------------------------------------- - 「외자 유치 무죄」 ------------------------------------------------------------------------------- - 그러나 무엇보다 검찰 스스로 기업인 사정에 대해 일정한 한계를 그은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김태정총장은 부실기업주의 경우 수사 초점이 빼돌린 재산의 추적과 환수에 있기 때문에 이를 자진반납하는 등 반성 기미가 보일 경우 비록 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확인됐다 하더라도 불구속기소는 물론 불기소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박상천(朴相千) 법무장관도 9월 초 어느 사석에서 『기업을 잘 운영하면서 외화도피한 사실이 드러난 기업주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를 망설이고 있다』고 발언, 검찰의 수사방침을 시사했다. 박장관은 그 이유로 『경영을 잘 하고 있는 기업인을 갑자기 구속할 경우 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자가 쏟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 이라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외자유치의 불가피성이 강조되면서 외자유치라는 명목도 검찰의 사정 칼날을 피해가는 훌륭한 방패가 되고 있다. 『외국인들이 대한 투자 결정시 중 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업주의 사법처리 여부가 아니라 재벌 개혁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지』(서울대 경제학과 정운찬 교수)임에도 「외자유치」 방패 앞에 서는 사정 칼날이 무뎌진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기업주들이 무리하게 외자유치에 나서면서 오히려 외자유치를 위해 의연하게 협상하고 있는 다른 기업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신업계에서는 최근 외자유치에 성공한 한솔PCS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입을 모은다. 한솔PCS 조동만(趙東晩) 부회장은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과정에 정홍식(鄭弘植) 전 차관 등 정통부 간부 등에게 『사업자로 선정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5600만원을 준 것으로 밝혀져 7월3일 뇌물공여와 배임증재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 검찰은 9월15일 조 부회장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조 부회장은 8월24일 열린 공판에서 『임원들의 건의도 있고 사업상 편의를 위해 공무원들에게 인사치레로 돈을 주었다』면서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 통신회사와 투자협상을 진행중인데 재판 결과가 협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조 부회장이 외자유치에 성공한 덕분에 9월29일 열리는 선고공판에서 경제활동에 지장이 없는 「가벼운」 판결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업계에서는 한솔의 외자유치 조건을 보면 한솔이 지나치게 저자세로 협상에 임한 듯하며 이는 재판중인 조 부회장을 위한 조치였을 거라고 지적한다. 한솔PCS는 9월9일 캐나다 통신업체인 벨 캐나다 인터내셔널(BCI), 미국의 투자회사 AIG와 전략적 제휴 및 투자계약을 공식체결하고, 당일 언론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 한솔PCS는 두 회사에서 3500억원의 자금을 들여오게 되며 1차분 1180억원을 이날부로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나머지 금액은 10월, 그리고 내년 1월~ 2001년 7월 등 6차례에 걸쳐 들여온다. 그러나 한솔측은 외자유치 조건에 대해 더이상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상태. 그러나 외자유치에 따라 정관을 개정해야 한다는 점에 착안, 정관개정안을 통해 계약조건을 유추할 수는 있다. 이를 보면 한솔이 헐값에 지분을 넘겼다는 통신업계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정관개정안에 따르면 두 회사는 9월9일 한솔에 출자한 1180억원으로 주당 8000원에 1475만주를 인수한다. 또 10월에 출자하는 1320억원으로는 주당 7200원에 1833만주의 전환우선주를 인수한다는 조건이다. 나머지 1000억원은 전환사채로 발행, 두 회사가 인수하기로 했는데 전환사채 전환가격은 전환시점별로 8000원에서 6121원까지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전환사채가 모두 주식으로 전환됐을 경우 두 회사가 인수하는 한솔PCS 지분은 36.88%가 된다. 통신업체의 한 관계자는 『한솔PCS 주당 가격은 최하 1만2000원으로 분석된다』면서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던 한솔PCS에 두 회사가 투자한 것은 싼 가격에 많은 지분을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한솔이 외국 업체에서 긴급 수혈받음으로써 통신업계 구조조정이 지연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솔PCS 관계자는 『액면가 이상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라면서 한마디로 경쟁업체의 모함이라고 일축했다. 또 두 회사는 한솔PCS의 경영 정상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 - 「수사팀 해체 무죄」 ------------------------------------------------------------------------------- - 신동아그룹 계열 무역회사 신아원의 수출금융 사기와 외화밀반출 사건 역시 외자유치라는 방패막이 때문에 검찰의 사정 칼날이 무뎌진 경우.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검찰과 언론은 3개월 동안 묘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신동아그룹측이 10억달러 외자유치를 선언하고 나왔기 때문. 이 사건은 신아원 전사장 김종은씨와 신동아그룹 최순영(崔淳永)회장의 갈등을 빌미로 세상에 불거졌다. 지난해 6월 최회장의 미움을 사 해임된 김 전사장은 최회장에게 『신아원의 수출금융 비리와 해외재산도피를 폭로하겠다』며 10억원을 요구했다. 신동아측은 비밀리에 서울 용산경찰서에 김씨를 공갈 협박혐의로 신고했고, 김씨는 4월25일 『돈을 주겠다』는 신동아측과 용산서의 유인에 넘어가 같은달 27일 구속됐다. 신동아의 외화도피혐의를 포착, 내사중이던 서울지검은 김씨가 구속되자 기자실에 엠바고(보도자제 요청)를 걸고 공식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김 전사장과 신아원 전현직 직원, 거래은행 직원 등 30여명과 은행이 보존하고 있는 수출입 관련 서류를 조사했다. 수사 결과 신아원은 미국 유령회사인 스티브영 사(社)에서 물품을 수입해 러시아 등에 수출한 것으로 꾸며 국내 4개 은행에서 1억7000여만달러의 수출지원금을 받아 미국으로 빼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5월 하순 「주요 피의자」자격으로 최회장을 전격 소환 조사했으며 한때 출국을 금지했다. 수사의 칼날이 최회장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무렵인 6월8일 신동아그룹 주력 계열사인 대한생명은 미국 메트라이프보험회사에 지분 50%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1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때부터 기자실에는 대한생명이 외자유치에 성공하면 검찰수사가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검찰은 6월24일 이 사건을 수사하다 불거져 나온 피앤테크(P&tech, 구동신제지)의 수출금융사기 사건을 발표하면서 『국가의 경제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신아원사건에 대한 발표는 외자유치를 위한 미국측의 실사과정이 끝난 뒤에나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순용(朴舜用) 서울지검장은 기자들에게 『검찰수사 때문에 기업의 외자유치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단의 논리는 달랐다. 같 은날 서울지검 기자단은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논의했다. 기자단은 검찰의 그런 논리가 국가경제의 미래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이런 입장을 검찰에 전달하고 일단 신동아사건에 대해 수사가 진행된 부분 을 브리핑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피앤테크 사건을 보도하지 않고 신아원 부분도 독자적으로 취재해 기사화하겠다고 알렸다. 결국 검찰은 6월26일 신아원사건에 대한 그동안의 수사상황을 브리핑했고, 기자실은 대신 보도 시점을 대한생명의 10억 달러 외자유치가 확정되는 8월 말 이후로 미루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KBS가 7월30일 특별방송 「개혁 리포트」에서 한국 재벌의 비리를 보도하면서 신아원사건을 상세히 보도, 결국 보도 자제 합의는 깨졌고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신동아그룹측은 김종은 사장이 구속될 때부터 이 사건 보도를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신동아측은 『가공무역은 김 전사장이 외형적인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꾸민 일이고 최회장은 오히려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언론사를 상대로 집요한 설득전을 폈다. 신동아 관계자는 최근 『사건 보도 후 경쟁 보험회사들이 고객들에게 악선전을 하고 투자협상중인 미국 메트라이프측도 진위를 물으며 트집을 잡고 있어 피해가 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에 비하면 신동아그룹은 다소 여유로운 입장이다. 검찰은 사건 발표 후 다른 사건에 매달려 추가 수사를 못했고, 그나마 8월26일자 인사로 담당 차장검사와 부장검사, 주임검사가 교체됐다. 또 김태정 검찰총장이 7월13일 『기업인이 빼돌린 재산을 회사나 사회에 되돌려줄 경우 처벌을 면제하고 진행중인 수사도 중단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신동아그룹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신동아그룹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해외로 빼돌린 돈의 대부분을 다시 국내에 들여 왔다. 신동아그룹과 미국측의 투자유치 문제는 당초 예정됐던 8월 말이 아닌 9월 말경 끝날 전망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외자유치 무죄, 수사팀 교체 무죄」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 - 웃고 있는 재벌들 ------------------------------------------------------------------------------- - 재벌 총수들의 행위는 그동안 치외법권 지대에 존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 총수들이 불법·탈법 행위를 저질러도 사법적 심판 대상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경제가 어려울 때는 기업인의 경제활동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고, 경제가 호황일 때는 국민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한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물론 한보철강 특혜대출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정태수(鄭泰守) 한보그룹 전회장이나 최근 사정정국에 구속된 김선홍(金善弘) 기아그룹 회장 등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태수 총회장과 김선홍 회장은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건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이들의 구속은 「구색 맞추기」 측면이 강하다는 분석. 그러나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비롯한 각종 정경유착 사건에서 재벌 총수들은 언제나 권력의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뇌물을 제공한 일종의 「피해자」였다. 당연히 이들에게 뇌물을 받은 사람들은 중벌을 받았지만 이들은 뇌물 공여를 하고도 선처를 받아왔다. 심지어 95년 말 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崔元碩) 동아그룹 회장 등은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도 재판부의 「배려」로 법정구속을 면하기도 했다. 이들의 구속은 당장 해외사업 등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재판부의 친절한 설명이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도 여전히 경제인은 사정의 성역에 있는 듯하다. 다만 지겹도록 들어온 경제회생 외에 외자유치라는 새로운 명분이 추가된 점이 과거 정권과 다르다면 다른 점.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새 정부 초기 잔뜩 긴장하던 재벌들이 드디어 「구멍을 찾았다」면서 뒤에서 웃고 있다』면서 재벌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고 있다고 했다. 장교수는 또 『재벌 개혁을 통한 경제 회생을 위해서도 기업인 사정은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는 한 「사정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재벌의 여론공작에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사정도 그런 여론에 밀려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검찰 출신인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의원도 『어느 재벌은 8000만 달러를 외국에 빼돌렸다』 『어느 재벌은 빼돌린 외화를 투자 형식으로 다른 자금과 섞어 들여왔다』는 얘기가 자신에게도 들리는데 검찰이 수사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도덕한 기업인들도 철저히 사정해야 경제를 튼튼하고 건강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도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우려해 매번 기업인에 대해 사법처리를 유보해온 것이 정경유착 구조를 고착시켰다는 점을 국민의 정부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의 검찰 사정을 보면 정경유착으로 무모한 투자를 계속했던 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결국 작년 말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 서울대 정운찬(鄭雲燦)교수는 『정부는 고통분담을 강조하지만 근로자들이 정리해고 등으로 자신들만 고통을 전담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경제사정이 유야무야된 것과도 관련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사정을 통해 벌을 받은 부실기업주들도 별로 없고, 부실경영에 책임지고 물러난 경영인도 없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 - 거꾸로 가는 사정 정상화해야 ------------------------------------------------------------------------------- -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DJ노믹스를 담은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에서도 그동안 정부가 시장경제 원칙을 확립하지 않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최종 보험자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기업 및 금융기관이 부도 위협에서 해방돼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결과적으로 무모한) 투자와 대출을 감행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또 현 경제위기 원인과 관련, 『민주주의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결과 정부는 경제 전반에 대해 자의적으로 간섭하고, 기업과 은행은 정부에 기대 자기이익을 관철함으로써 시장경제의 기본질서가 파괴됐고, 결국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기업·금융기관의 공생공멸관계가 나라를 망쳤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공생공멸관계하에서 재벌은 자신의 불법·탈법행위를 법대로만 처리할 수는 없었던 정부와의 관계를 악용했고, 결과적으로 재벌 총수의 행위는 치외법권에 존재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경제를 지향하겠다는 국민의 정부는 부실경영인에 대해 오히려 철저한 사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대 장하성교수는 『공적 자금을 동원해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해야 하는 지금 시점에 국민의 정부는 과거 당시 부시 행정부가 저축대부조합(S&L) 부실을 어떻게 정리했는지를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시 행정부는 재정을 동원해 S&L 부실을 정리하면서 부실기업 경영자와 회계담당자 등 1500명을 사기죄로 형사처벌 하거나 재산을 몰수했다. 미국 성업공사는 당시 법률팀을 신설해 연방수사국과 공조, 부실책임을 철저히 추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부실경영에 연루된 정치인 역시 엄정하게 사법처리했다. 당연히 편파사정 시비는 있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오늘날 미국이 장기 호황을 누리는 것도 부시 행정부의 원칙에 입각한 금융 구조조정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현재 검찰 사정은 여전히 정치인 지상주의에 치우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럴수록 검찰권 행사의 최고 가치는 경제회생이라고 공언 하는 검찰 수뇌부의 기대와는 달리 경제회생의 길은 멀어진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검찰이 정치권 부패 척결이라는 성전(聖戰)을 하고 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쟁 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과정에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부터 환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손도 대지 못하 면서 무슨 정치권 사정이냐』는 한 연구소 연구위원의 지적을 검찰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 - Copyright(c) 1998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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