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pilu (^^ 삐루 ~~) 날 짜 (Date): 1996년02월14일(수) 19시43분42초 KST 제 목(Title): 역사바로세우기 4 -마지막 역사세우기 4 - 문화예술인들... 문화예술인들은 내란 정권을 정당화하는 장식품으로 쓰였다. (표현이 심한지 모르겠지만... ) 많은 다른 신군부 참여 세력들이 자신의 몫을 챙길때도 문화예술인들은 들러리 였고, 연예인들은 그야말로 동원부대였다. 이런 현실에서도 학살정권을 미화하고 나선 사람들이 꽤 있었다. �� 윤형주 (가수) 그는 전두환이 기자회견을 한후에 그 소감을 8월12일 서울신문에 실었다. " 비리와 혼란을 끝내고 새시대의 우리가 나갈 방향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이제 이 나라와 이 민족과 나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게 되었다.... 서기 2000년에 서른이 될 내 아이들이 건강한 세대로 성장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충분하고 믿음직한 사회가 올것을 기대해 보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지나치지 않다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통령이 아직 최규하씨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말은 전두환의 집권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 이낙훈 (탤런트) 그는 80년 당시 텔레비전방송연기자 협회의 회장으로 정의사회 구현과 국민의 안녕질서 확립을 부르짖는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연예계의 부조리를 몰아낸다고 정화운동 궐기대회를 열었고,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민정당 창당과 함께 전국구 의원으로 11대 국회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역할은 당의식개혁 추진본부장이었다. 그러나 더 선봉에 서서 정권과 관계를 밀착하며 그들을 미화한 문화예술인에 비하면 이들의 협조는 미비한 것이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소속의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바로 그들인데, 회장은 항상 맨 앞에 서 있었다. �� 신군부등장을 가장 먼저 미화한 예술인 --> 이봉래씨 그는 견습부부, 새댁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로 80년 예총 회장이었다. 그는 8월14일 경향신문에 [김대중일당 공소장을 보고... ] 라는 의견을 내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 김대중은 선동정치가로 주의 주장을 시시각각 바꾸며 국민을 현혹해왔다. 학생들에게까지 정치자금을 대주며 학내 선거에 끼어든 것은 생각할수록 불쾌한 일이다. " 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예총회장으로 있을때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모시기위한 그의 행보는 놀랍다. 예총회장으로 성명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0.26사태이후 어지러운 정치작태가 국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적 결단 을 촉진하게 되었다 " 고 당시 정치인들을 비난한뒤... 그 결단이 " 전 민족이 거족적으로 전두환 장군을 새로운 민족의 영조자로 환영하는 것"이라 밝혔다. 또,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전두환 장군이 그 탁월하고 실천적인 구국의 역량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타개한데 대해서 감사드리고 장군의 민족적 지도력을 찬양, 지지 한다 " " 민족의 영도자로 추대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성명발표다음날 자신의 이름으로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을 위해...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조... 하는 데 앞장설 것을 결의한다 " 는 결의문을 발표한다. 그는 현재에도 예총의 고문과 현대 시인협회의 명예회장으로 있다. �� 신영균 -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한번... 당시 한국영화인협회이사장 그는 이사장으로 있을때 세종문화회관에서 1천연예인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전 영화인들은 전두환 장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새역사 새출발을 다짐하자" 며 전두환 대통령만들기에 나섰다. 한국연예인협회회원들이 모인 장충단공원에서도 " 새 질서확립에 앞장서 연예인들의 취약적 병폐와 부조리를 배격할 것"을 주장하며 전씨 지지를 부추켰다. 81년 예총회장이 된 그는 5공들어 탄탄대로를 걷는다. 예총회장이 된뒤 국회보6월에 "11대 국회에 바란다"라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을 한번 인용해 보겠다. " 돌이켜 보면 위험스럽고 가팔랐던 순간의 상황을 가로질러 갈때 우리 앞에 가장 우선되었던 문제는 안보와 질서였습니다.... 국민의 뜻으로 세워진 5공과 11대 국회의원을 축하하게 될때 마음깊은 느낌을 받습니다" " 저희는 어려운 시대에는 항상 정신적인 천재가 등장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믿고 있습니다 " 그는 84년까지 예총회장을 했고, 평통자문회의 예술분과위원장을 거쳐 88년 에는 민정당 성동병 지구당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 93년 다시 예총회장을 맡았고, 현재 서울방송 이사로 재직중이다. �� 조경희 - 84년부터 88년까지 예총회장을 지낸 여류 수필가. 87년 4.13호헌조치에 문화예술인들의 시국성명이 줄을 잇자 5월 순수예술을 들고 나왔다. 예총회장의 이름으로 "현 시국에 처한 예술인의 견해" 라는 성명서를 발표. "올림픽을 조국의 영예로 승화시켜야 할 중대한 이 시점에서 일부 정치인과 예술인이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에 심각한 우려와 유감을 표시한다 " "순수예술인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정치적인 사회이데올로기에 의한 비예술 적인 행위로부터 예술의 독창성을 수호하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획책하는 일체의 행동을 배격한다" 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87년 6.10민주화투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자 그는 또 발표를 한다. " 위난에 선 국운을 바로잡고 한민족사에 민주의 씨를 뿌린 기폭제" 이며, 이를 받아들인 전씨의 특별담화는 "새로운 차원의 민주 발전과 국민대화합의 장을 이룩한 영단 " 이라며 칭찬을 한다 ...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인지 그는 88년 노태우정권출범과 함께 정무2장관 으로 발탁되었고, 지난 88년부터 95년까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지내는등 문화예술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 시인 조병화, 서정주 ... 전두환장군에 바치는 시를 쓰고, 민족의 영웅이니... 영도자이니..하는 말들은 이들의 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도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고 변명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5,6공에 협조한 문화예술인들의 일부일 뿐이다. 문화예술인 가운데 글로써 내란세력을 미화, 찬양한 몇몇문인들을 제외하고는 명확한 물증이 없고, 대부분 그 행적이 은밀히 숨겨졌기 때문이다.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한 "국풍81"도 광주항쟁을 진압한지 1년이 되는 대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행사였다. 이 행사는 다 알다시피 대학의 저항문화를 잠재우고, 국민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하려고 기획되었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이다. '현실과 발언' 참여 미술인들이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특히 81년 겨울, 당시 문공부 예술부장이었던 김아무개씨가 신경오교수(현 전남대교수) 와 홍성담 화백등의 그림을 사상성이 의심스럽다며 빼앗았다고 한다. 이런 탄압은 당시 국립현대 미술관의 이아무개씨와 오아무개씨가 신군부에 작성해준 "미술계의 문제인물 70여명" 명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처럼 그들도 한국 미술계를 주도하고 있다. 얼마전 거리전(5.18책임자처벌)을 했던 민중미술가 임옥상씨는 "역사청산의 과정에서 정계에 포진한 신군부세력은 걸러지고 있지만, 그들에게 은밀히 협조한 문화예술인들은 행적조차 규명되지 않은채 한국 문화 예술계를 주도하고 있다" 고 말했다.. ==================================================================== [ 역사바로세우기 ]를 마치며... 4개의 부분으로 글을 올렸는데.. 다 보셨는지요? 역사바로세우기란 거창한 제목이지만... 그리고 그런 거창한 말들은 아직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말을 쓰기엔 아직 모자란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과거엔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을 하는 그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 는 말처럼.. 그 당시에 그들의 뛰어난 역량과 재능과 학식때문에 신군부에게 강요당했다면... 차라리 말을 않거나, 절필하거나 ... 그것도 아니면 지금 참회라도 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진다는 진리가 있습니다만, 진실을 밝히려 노력하지 않는 사회에 진실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모두 후대에 평가받을 텐데... 양심적으로 살아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데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