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purunsan (강철단풍잎�) 날 짜 (Date): 1995년11월06일(월) 18시41분13초 KST 제 목(Title): 군인의 길 익명보드가 왜 이런 식으로 쓰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 언젠가 스누보드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모처럼 익명보드에 어울리지 않는(?) 글이 올라왔기에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육사를 지원하는 학생들이나 지금 군인의 길을 고려하고 있는 육사생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강철 새잎 -- -------------------------------------------------------------------- ** A sound use in a sound KIDS. I can delete your dirty article ** 글 쓴 이(By): anonym (Who Knows ?) 날 짜 (Date): 1995년11월06일(월) 13시59분13초 KST 제 목(Title): RE]장태완..이런글을 왜 여기다 쓰셨어요.. 굳이 익명보드 말고 여러곳에다 올려주시지않구.... 정말 잘 봤습니다...장태완 장군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았는데... 이런 장군님이 우리나라에 한분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희망이있나봅니다... 감사합니다... ** A sound use in a sound KIDS. I can delete your dirty article ** 글 쓴 이(By): anonym (Who Knows ?) 날 짜 (Date): 1995년11월06일(월) 13시51분55초 KST 제 목(Title): 장태완 그는 누구인가..?? NowNuri ─────────────────────────────────── PLAZA 게시판-열린광장 (#18036/18058) 1/23 ─────────────────────────────────────── 제 목 : [인물탐구] 장태완 그는 누구인가..?? 올린이 : kimjusik(김주식 ) 95/11/06 02:11 읽음 : 230 관련자료 없음 ------------------------------------------------------------------------------ “고 장성호의 종착지.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저 높은 곳 어디 멘지 찾고 찾았으나 네가 찾은 곳이 바로 여기구나. 엄마 아빠가 태어난 중간, 이곳을 찾아서 한맺혀 못다핀 20세의 젊은 나이 푸른 강물 바라보 며 못다핀 꽃이 되어…. 아빠:장태완―1979년 12·12군사쿠데타를 진압하 다 구속 예편되어 위로는 아버지, 아래로는 외아들을 잃게 된 죄인…” 12·12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려다 오히려 잡 혀 군복을 벗은 장태완(62) 예비역 소장이 82년 먼저 세상을 버린 외아들 을 기려 써놓은 비문이다. 장태완은 지금도 `가슴에 묻은' 아들 얘기를 잇지 못한다. 복받치는 설움 때문에.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24일 만에 쿠데타를 맞은 장태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격멸하려 했으나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일을 벌 인 반란군에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장태완은 12월13일 새벽 4시30분 패창으로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갔고, 그곳에 서 이듬해 3월초까지 조사를 받은 뒤 별 두개를 뗀 채 풀려나왔다. 그렇게도 사랑했고 모든 것을 바쳐 지켜왔던 군을 이런 처참한 모습으 로 떠난 장태완은 그로부터 6개월 동안 보안사 요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가택 연금됐다. 피를 말리는 시간 시간이었다. 이때 장태완을 덮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경북 칠곡군 인동면의 중농으로 유학을 했던 아버지는 12·12 소식을 듣고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곡기를 끊었다. 아버지는 “예로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 집안은 모반자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법”이라며 그렇게 버티다가 그해 4월18일 생을 마쳤다. 73살이었다. 자신이 지켰어야 할 나라가 반도들에 의해 유린되고, 그 충격으로 아버 지마저 삶을 버리자 장태완은 자책감과 자괴심을 견디기 어려웠다. 연금 이 풀린 뒤 그는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한번 집을 나서면 몇일이고 전 국 이곳저곳을 돌며 그제나 지금이나 말이 없는 뺐� 들을 바라보면서 한 을 삭였다. 방랑자 장태완에게 또 한차례의 견뎌내기 어려운 시련이 닥친 건 82년 초였다. 한가닥 희망이었던 외아들 성호가 사라진 것이다. 여느날처럼 집 을 나서며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했던 성호가 한달 뒤인 2월10 일 할아버지 묘지 근처 산기슭에서 빳빳이 얼어버린 사체로 발견됐다. 그 것은 장태완과 그 가족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장태완은 그날을 이렇게 쓰 고 있다. “그의 차디찬 얼굴에 내 얼굴을 부벼대며 흐르는 눈물로 씻겨 주면서 그의 눈부터 입으로 빨아 녹였다. 얼마동안 빨다보니 눈 안에서 사탕만한 모난 얼음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그놈이 마지막 흘린 눈 물임을 생각하여 그대로 입에 넣어 삼키고, 양눈으로부터 코, 입까지 녹 이면서 나오는 얼음을 삼키다보니….” 아버지의 `비운'을 보다 못한 아들은 이런 모습으로 아버지 곁을 떠났다. 살아남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정신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생각을 이길 수 없으면 아무 때고 무덤에 찾아가 목을 놓아 울기도 하고 그 곁에 누워 밤을 새기도 했다. 을 쥐어뜯던 장태완은 “더이상 살아 뭐하나”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 다. 소주병 하나 달랑 들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통음하곤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까 생각한 적도 여러번이었다. 산다는 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는 게 있었다. 12·12쿠데타 현장 한복판 에 있었던 자신이 입을 다문 채 사라져버리면 그건 역사 앞에 또한번의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는, 어떤 의무감이었다. 그에 덧붙여 친지의 소개 로 만나게 된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에의 귀의는 그의 마음을 붙들어주었다. 장태완은 잠 못이루는 수없는 밤을 보내면서 79년 12월12일을 기록해나 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 알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과거 군 동료들 의 도움을 받아가며 `역사'를 정리해 나갔다. 그는 이 기록들을, `패륜아 '들이 자신과 같은 위치로 돌아오게 되는 날 대등한 입장에서 옳고 그름 을 가려야 한다는 일념 아래 차근차근 준비했다. 환난신고가 겹친 탓이었을까. 87년 장태완은 심근경색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상에 누운 그는 회한에 사무쳐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가다니…” 장태완은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수백여쪽에 이르는 `12·12 전말기'를 다듬고 다듬었다. 이때 그를 찾았던 정병주(12·12 때 특전사령관으로 반 란군의 총격에 의해 부상당하고 강제예편됨. 89년 3월 변사체로 발견됨) 는 장태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동생(장태완)은 역사의 증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 증언이 끝날 때까지는 건강하시어야 하고… 목적하는 바가 성사될 때까지 자중하시고 보안에 유의하시고… 자료 수집에 열중합 시다….” 장태완은 87년과 91년 두차례 미국에 건너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는 그때 그처럼 자신을 독려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정병주가 실종 5개월 만에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는 데 대해 의 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장태완은 순수 야전군 출신이다. 경북 칠곡의 중농 집안에서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대구상업을 다니다가 6·25전란 중에 육군종합학교 11기로 들어가 소위에 임관된 뒤 전쟁기간 내내 수도사단에서 공산군과 맞싸웠다. 전쟁기간 중 `하루살이 소위'라고 까지 불릴정도로 목숨을 부 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장태완은 어렵게 사선을 넘었다. 전쟁이 끝나고 장태완은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학을 다녀온 뒤 광주 육 군보병학교 전술학 교관을 하면서 조선대 법학과(야간)를 마쳤다. 그 뒤 육본 정보참모부, 보병2사단 31연대 3대대장 등을 거쳐 수도사단 작전참 모로 있던 중 수도사단이 월남파병부대로 선정됐다. 그런데 장태완은 육 군대학 졸업논문이 문제가 돼 신원조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의 논문은, 창군 이래 정권에 기생해 월권을 자행해와 군기강을 문란케함으 로써 대다수 군간부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보안사령부를 해체하고 모든 정보부대를 통합해 순수 군사정보 지원업무에만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었다. 이 때문에 `사상 불순자'로 몰렸던 장태완은 우여곡절 끝에 불합격 해제 판정을 받고 맹호사단 1연대 부연대장으로 1년 동안 월남전선에 나 가게 됐다. 월남서 돌아온 장태완은 5군단 작전참모로 있으면서 자신이 군생활 중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것은 휴전선을 따라 대 전차장애물(방벽)을 중복 설치하는 일이었다. 군 내부에서 반대의견도 있 었으나 장태완은 이를 끈질기게 주장해 관철해냈다. 당시 1군사령관 한신 장군의 극찬을 들은 장태완은 71년 1월 대망의 별을 달게 된다. 육본 군사연구실장→5군단 참모장→수경사 참모장→26사단장(소장 진급)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을 거쳐 10·26 이후 수경사령관이 된 장태완은 그 경력만으로도 반란군 주모자들에겐 경계 대상이었다. “때로는 죽기보다 더 괴로웠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장태완은 “다시 는 이 땅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내 모든것을 걸고 12·12의 진상규명과 주모자 단죄에 나설 것”이라면서 그것만이 자신이 국가와 국민과 국군 앞에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방법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헌법·형법·군형법·계엄법·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군인복무규율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란죄·반란죄·이적죄·국헌문란 죄·집단항명죄 등을 `빠짐없이' 저지른 12·12주모자 30명(중장 3, 소장 4, 준장 7, 대령 11, 중령 5)과 그 추종세력이 실정법에 의해 `어김없이' 처단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와 국민과 국군은 명예와 정통성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장태완의 굳은 믿음이다. 장태완은 김영삼 대통령이 12·12쿠데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한 데 대해 “주모자들의 범죄행위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마당에 이 들에 대한 단죄를 역사에 넘기려는 것 자체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일”이 라고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