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12월 1일 금요일 오후 03시 29분 21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80) [주 제] 노자를 웃긴 남자(80) ─────────────────────────────────────── 내가 도올의 티비 강의를 보면서 더 수상했던 것은 강사가 아니라 수강생들이었 어. 중간 중간에 계속 탄복의 신음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가 방청석을 잡으면 하나 같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맞어! 맞어!'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더라는 거지. 근 데 저런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 지가 나는 참 신기하더라고. 나는 당췌 무신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말이야. 저런 소리가 정말 이해가 되고 알아들으면서 앉아 있 는 것인지 나는 참 신기했어. 울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이해력과 인내심이. 철학이란 말이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횡설수설하는 게 아니야. 딱 들어봐서 이해가 안되고 골에 쥐나는 소리를 하면 그건 엉터리 학자로 봐도 틀림없고 하는 소리도 학문이 아닌 개그라고 보면 맞능기야. 자고로 제대로 된 철학이란 시골 농 부가 듣고 일곱 살 짜리 얼라가 들어도 알아먹을 수 있는 소리를 말하는 게지. 입 만 열면 당췌 못 알아먹을 소리들, 앞뒤가 안 맞는 말들, 세상에 지밖에 안 쓰는 어려운 단어들로 도배를 하는 인간 치고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없는 것이야. 왜 말이 어렵고 글이 난해하냐? 그 이유는 바로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이야.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은 쉽게 되어 있어. 왜? 지가 아는 것을 갖꼬 나발부는데 어려븐 소 리를 할 필요가 뭐 있노 말다. 안 그래? 지가 조오또 모르능걸 갖꼬 사기 구라를 칠라 항께네 말이 골 때리게 나오능기야. 그래서 나는 일단 구라를 조오가치 어렵 게 풀면 일마는 조오또 모르는 넘이다꼬 꼽표를 치 부리. 꼽표가 뭐꼬? 하고 딴지 거는 사람 나올라. 사전 찾지 마라. '꼽표'는 '가위표' 또는 'X표'의 문디들 사투 리다. 이 장의 마지막 휘날레를 보자. 12장 개그쑈의 크라이막슨데. 배꼽들 조심하고. 『노자의 최종적 결론은 이러하다. 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저것 (彼)이란 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다. 이것이란 나에게서 가까이 있는 것이다. 여 기서 저것이란 눈(目)이요, 이것이란 배(腹)다. 저것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모든 것이요, 이것은 나에게서 가깝게 있는 것이다.』<노자와 21세기> 하권 130쪽 상단 존나게 그럴 듯 하제? 나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정말 '왠일인가?'싶더라. 도올 답지 않게 너무나 정돈된 학설 아이가? 해석도 얼마나 평이하고 쉬운 말로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노 말다. 한자도 제대로 잘 읽은데다가 번역도 아주 쉽자나. 저렇 게만 계속 나가주면 얼매나 좋겠노? 그런데 도올의 개그는 언제나 고 담을 봐야 된 다. 사람들을 웃기려고 준비해 놓은 것이 꼭 있응께네. 도올은 준비된 개그맨이자 나. 그 중에서도 이 12장의 해설 부분은 세계 개그 사상 유례가 없는 엽기적인 걸 작이다. 이 부분만 읽어도 <노자와 21세기>라는 책 값의 본전은 건진다. "당신의 배꼽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가 만약 저 책의 광고 카피라이트라면 이렇게 뽑 는다. 옮기는 나도 당신의 배꼽을 책임질 수 없다. 자기 배꼽은 자기가 관리하자. 『"저것"이란 플라톤적 관념이요, 可道之道요, 彼岸的인 모든 이상이다. "이것" 이란 항상 변화하는 이 세계의 생성이요, 常道의 세계며, 此岸的인 모든 현실이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이것은 동양인의 실천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범인 것이다. 노자적인 실용주의 가치관의 구호인 것이다. 나는 노자적인 실용주의를 미 국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과 구별하여 프랙티칼리즘(practicalism)이라 부른 다. 우리는 이러한 노자적인 프랙티칼리즘의 구조 속에 이미 <금강경>의 대승적 지 혜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彼岸"이니 "此岸"이니 하는 불교 용어도 바 로 이 12장의 "去彼取此"의 "彼 : 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피안(열반, nirv ana) 그 자체를 부정하고 차안(윤회, samsara)의 현실을 긍정하는 대승의 지혜도 이 12장의 노자 철학의 구조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뇌의 이(此) 현 실이 바로 저(彼) 보리의 깨달음인 것이다. 보리(菩提, bodhi)가 곧 번뇌(煩惱, kl esa)요, 번뇌가 곧 보리인 것이다. 이 말은 곧 번뇌의 현실 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의 저 피안을 버리고(去), 번뇌의 이 차안을 취(取) 해야 하는 것이다. "煩惱卽菩提"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이 이미 老子의 "去披取此"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노자와 21세기>130쪽-131쪽 상단 뚜잉!$##%$&*&)*_)_(+_*&%^$%^#%^#&%(~~~~~ 통! 떼구르르르르르르~~ '뚜잉' 이하는 부풀어오르던 구르미 배꼽이 마침내 튀어나가는 소리고, 통! 하는 소리는 그게 방바닥에 떨어진 소리다. 떼구르르르는 뭐겠노? 야, 차말로 유구무언이제. 존경시럽다. 야 대글빡은 천연기념물이다. 아이다. 국 보다 국보. 할아방을 뽈갱이로 맹길더마는 인자는 실용주의자를 맹길고 있다. 봐라 이 얼간 아. 구름가 암만 좋게 말을 하고 싶어도 도저히 더 이상 봐줄 수가 엄따. 할아방은 물의 선을 본받아 사람들 사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외기신을 권한 사람이 다. '실용주의'를 찾을 데가 따로 있지, 그래 노자 할아방한테서 실용주의를 찾는 다 말가? 내가 하도 웃기는데다가 얼척이 엄서써 말을 몬하겄다. '육체적인 감각 과 향락을 쫓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라'고 권하는 말을 갖꼬 머시라? 저것은 피안 이고 이것은 현실 세계라? 이기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제? 도대체 앞줄들은 읽 고 뒤로 오는기야, 아이마 한줄 마다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는기야? 눈과 귀와 혀 의 감각은 사람을 베리놓고 말타고 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짓이고 보물은 사람 마음을 어지럽게 항께로 그런 것은 버리고 그저 배나 채우면 만족할 줄 알아라꼬 말하고 있자나. 그런데 여서 피안, 차안, 열반에 보리에, 플라톤적인 관념에, <금강경>의 대승적 지혜에, 머? 프래그머티즘에 프랙티칼리즘이 다 나와. 봐라. 이 황당한 인간아. 이런 글은 초딩이 얼라가 봐도 앞 글 보고 뒤를 보면 '이것'과 '저것'이 뭔 주 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고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니가 뭔노무 학자고? 니가 무신 철학자라 말이고?' 초딩이 얼라도 알아묵 을 글도 똑바로 못 읽으면서 무슨 학문이고? 나가 죽어라. 쌀 아깝다.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