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11월 20일 월요일 오후 06시 28분 20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72) 이제 제11장이다. 이 장도 대단히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도올의 개그도 점점 그 수준이 높아져 간다. 벗님들이 하나같이 '제발 도올이 얘기는 좀 빼고 하자'고 주문을 하시는디 이기 참 고민이다. 제목이 '노자를 웃긴 남자'인데 주인공을 빼불면 '노자를 울린 여자'가 되 부자나. 글고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낀데 우짜면 좋겠노? 내가 도올이 강의를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도올한테 머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이다. 글고 도올이 특별히 노자를 잘못 알고 있어서도 아이다. 사실 도올의 강의는 별시리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내용이 없다. 지 말 마따나 전세계의 연구성과를 집약해서 나발을 분 거 뿐이다. 그노무 전세계의 연구 성과 자체가 그 꼬라진께네 도올이 머라할 일도 엄써.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도올의 강의를 붙들고 내가 이야기를 하는게라. 왜냐하면 도올의 강의를 보면 일반적인 노자의 해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으면 노자 야그를 하면서 세계의 온갖 구라들을 끌어다가 소개를 해주야 되는게라. 다행시럽게도 도올이 하나만 조패면 그걸로 한꺼번에 다 해결이 야께네 얼매나 쉽노 말이다. 일단 11장 첫줄부터 함 보자. 三十輻共一 ,當其無蔭車之用 삼십복공일곡,당기무유거지용 역시 할아방은 문학적 재능이 대단한 사람이다. 글에 감칠맛이 있다. 단 몇 글자로 상당히 깊고 넓은 사변을 펼쳐 보인다. 한자라는 문자가 아니면 역시 불가능한 문화적 유산이다. 다음 기회에 참 그윽하고 향기로운 문체와 아름답고 심오한 사유로서 할아방이 가 있던 그 경계를 벗님들과 함께 소요해볼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복(輻)'은 바퀴의 살을 말한다. 그리고 '곡(이기 또 새롬에서 한자가 안 찍힌다)'은 바퀴의 축에 끼우는 살통이다. 그래서 '삼십복공일곡(三十輻共一 )'의 뜻~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하나의 살통에 모인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기무유거지용 (當其無蔭車智之用)'은 '(무엇이) 없는 것에서 차의 쓰임새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 무엇인가가 되겠다. 힌트는 서른개의 바퀴살과 그것이 하나로 모이는 통이다. 바퀴는 여기에 바깥쪽 테(요즘 자동차로 치면 타이어)를 합해 세 가지로 구성되는 물건이다. 여기에서 '그것'이 없어야 바퀴가 제 구실을 해서 차가 굴러갈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도올은 그게 무엇인지를 몰라서 또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다. 바퀴 살통이 비어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바퀴 살통은 그 속이 비어있어야 축을 끼울 수가 있다. 그러나 축이 끼워진 살통의 속은 이미 빈 것이 축이 속을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은 무가 차의 쓰임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를 채운 것에서 차의 쓰임이 생기는 원리의 예가 된다. 차의 쓰임을 불러오는 바퀴의 무(無)에 대한 답을 찾는데는 한자 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도올처럼 겐또 치는 요령 갖고 덤빌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차(車)'라는 것의 역사를 생각해볼 줄 아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야 바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지마는 고대에 있어서 바퀴의 발명은 20세기의 인공 위성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잉카인들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도 바퀴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車)라는 것이 만들어지던 고대의 역사에서 '무엇'으로 해서 차가 구실을 못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처음에 인류가 구를대의 효용성을 알게 된 것은 무거운 돌을 나를 때 그 밑에 나무를 받쳤던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무 기둥들이 굴러줌으로써 돌은 쉽게 움직여 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퀴로 발전했던 것인데, 인류가 제대로 된 바퀴를 만드는데는 실로 일만 년의 세월이 걸렸다. 바퀴를 만드는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을까? 무엇이 고대의 인류를 그토록 고심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바퀴의 강도와 무게, 그리고 회전성(回轉悚)이라는 세 가지 문제였다. 차라는 것은 무거운 것을 싣고 나르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퀴는 차의 하중에 견딜 수 있어야 하고, 무게가 가벼워야 하고 가능한 한 완전한 원형이 되어야 하는 세 가지가 충족 되어야만 한다. 고대인들이 처음에 만들었던 바퀴는 통짜 바퀴였다. 나무판자를 덧대어 가장자리를 원형으로 잘라서 이것을 축에다 끼워 넣은 형태였다. 즉, 바퀴 테와 바퀴 살 부분의 구분이 없는 두꺼운 디스크였던 것이다. 전체가 이렇게 통 나무판이다 보니 무게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중에 견디는 힘은 충분치가 못했다. 바퀴가 찌그러졌던 것이고 테두리가 손상되었을 경우에 바퀴 전체를 못쓰게 되었다. 좀더 고대에는 나무를 가공하는 기술의 부족으로 이 디스크를 돌로 만든 시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바퀴 하나를 제작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을까는 쉬이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힘들게 만든 바퀴가 제대로 굴러주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낙담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바로 바퀴의 살을 모아서 지지해 주는 바퀴 살통과 바퀴테 사이를 빈 공간으로 두어 그 사이를 똑 같은 길이의 바퀴 살 여러 개로 받친다는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살통과 바퀴 테 사이를 비게 한다는, 즉 무(無, 빔)의 효용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쉽게 굴러가는 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차의 쓰임이 무(無)에 있다'고 한 노자의 말은 바로 이 테와 살통의 사이를 살이 받치고 있는 빈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기술적 측면과 차의 발달사에 대한 고찰이 있을 때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이 정확한 지적이다. 그래서 인류를 괴롭혔던 바퀴의 세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것이다. 가벼워졌고, 튼튼해졌으며, 원형의 구현이 쉬워져 잘 구르는 바퀴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차의 쓰임새를 가져왔다. 또 다른 문제들인 바퀴 축에 살통을 끼워 고정시키는 방법과 회전 마찰력을 줄이는 기술, 그리고 축의 설치(차대 와 축의 연결) 등도 난제였지만 그런 것들은 바퀴의 완성 다음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도올은 이 '무엇'을 바퀴 살통의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틀린 답을 우기고 있다. 더욱 웃기는 것은 그 책에 실려 있는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마차의 바퀴 사진이다. 그 사진만 보더라도 살통의 내부가 비어있는 것은 축을 꽂아 넣기 위함이지 바퀴살을 꽂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올은 바퀴 살을 살통에 꽂아 넣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축의 내부가 파이프처럼 비어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하면 거시기가 생각나고 '차'하면 엑센트나 에쿠우스, 체어맨이 생각나는 수준에서 노자가 말하는 무(無)가 바퀴의 어느 부분인가를 알기 바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겠다. 자전거 바퀴조차도 살을 살통에 꽂아놓지는 않는다. 팽팽하게 당기기 위해서 구멍에 걸어놓는 것이다. 아무리 철학자라 하더라도 자전거는 타봤을 테고 손수운전은 해봤을 것 아닌가? 바퀴 살을 살통에 꽂아놓는다는 무식이 홍수난 소리를 어찌 책에다 그렇게 써놓고 광고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껏 감탄을 한다는 것이 노자가 바퀴 살이 서른 개라고 했던 것과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마차의 바퀴살 수가 똑같더라는 것이다. 바퀴 살이야 서른 개일 수도 있고 스무 개일 수도 있고 일곱 개일 수도 있다. 그건 이 문장에서 감탄해야 할 부분이 전혀 아닌 것이다. 엉뚱한 것만 잡고 탄복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에 본질적인 문제에 가서는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가 짝이 없다. 그러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관심은 참 해괴한 곳에 있었다. 30개의 바퀴 살이 한 개의 바퀴 살통에 꽂힐려면 그 바퀴살통의 속이 비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 빔의 지혜가 하필이면 살통( )의 속의 빔에서 찾으려 했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자는 바로 그의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때의 수레란 곧 바퀴(輪)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허가 있기 때문에 三十輻을 공유할 수가 있고, 또 그 빈곳으로 軸이 지나갈 수가 있어 수레 전체의 "굴름"이란 현상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노자와 21세기$>$ 하권 120쪽 할아방은 해괴한 관심을 갖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명확하고 정확한 비유도 못 알아먹으니까 해괴하게 보이고, 쉽고 분명한 말도 이해를 못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인류가 차(車)라는 이기(利裸)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바퀴살통과 바퀴 테 사이의 공간을 발견한 다음부터다. 이것을 노자는 당기무(當其 無)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모든 차량의 바퀴는 테와 축 사이를 메워 버린 디스크형태로 만들지 않는다. 디스크에 구멍을 뚫어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훨씬 하중에 잘 견디기 때문이다. 경주용 자전거 중에는 디스크형 바퀴를 많이 쓴다 . 그 이유는 공기의 저항을 덜 받고 알미늄이라는 가벼우면서도 강한 재료를 쓸 수 있기때문이고 잘 딱아놓은 아스팔트 경주로 위에서만 달리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디스크형 바퀴는 빈 공간을 살로 받친 바퀴보다 훨씬 약해서 비포장 도로를 무거운 짐을 싣고 달리면 짜부러지거나 깨진다. 접지면의 충격이나 하중이 축의 한 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디스크 전체에 분산되기 때문이다. 노자는 2천년 전의 사상가이지만 이 정도로 기술공학적인 부분에도 정치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초라한 소형 자동차! 삐까번쩍한 대형 자동차! 엑센트 와 에쿠우스는 역시 크나큰 신분의 거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나 해서 될 일이겠나? 지 말마따나 달구지나 똥구루마도 아깝다. 도올이 책에 그려놓은 그림을 같이 볼 수 있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텐데 그게 안된께로 설명키가 쪼께 어렵다. $<$노자와 21세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권 120쪽의 그림을 보면 되겠다. 이 그림에서 도올이 '허(虛)'라고 짙게 표시해 놓은 부분이 바로 바퀴살통이다. 그러나 노자가 '차의 쓰임새를 가져오는 무(無)'라고 한 부분은 그것이 아니라 그 바깥부터 바퀴의 테두리 사이 공간, 즉 바퀴살들이 지나가고 있는 그 공간이다. 차와 바퀴의 발달사에 대해서도 할아방은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어떻노? 바퀴가 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