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2000년 6월 15일 목요일 오후 04시 00분 43초 제 목(Title): [펌] 김상환/철학이 동쪽으로간 까닭은? 역사 보드에 호연지기님이 펀 거 또 퍼옵니다. -------------------------------------------------------------- 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다음][이전]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artistry) 날 짜 (Date): 2000년 6월 10일 토요일 오후 12시 49분 35초 제 목(Title): 김상환/ 철학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서양 철학은 동쪽으로 오고 있다. 이것이 20세기 사상사에 대한 가장 짤막한 요약일 수 있다. 지난 한 세기의 철학사를 평가하기 위해서 그 동안 있어왔던 수많은 사조와 학파를 모두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현재적이라 해서 현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가란 선택이고 해석이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망각이다. 망각의 잔인성, 그러나 잔인한 것만이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20세기의 잔인한 풍경, 그것은 서양이 동쪽으로 향하는 항해였다. 동양인으로서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이번에는 철학이 오고 있다. 또 한번 끔찍한 풍경, 그러므로 오래 기억될 풍경이다. 서양 사상이 동쪽을 찾는 이유, 동쪽으로 길을 내는 여정이 지난 세기의 철학사를 평가할 때 가장 먼저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다. 서양 사상은 그 사건 속에서 자신의 서양적 정체성을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거를, 과거를 통해서 형성된 육체를 절단하는 일도 있었다. 피로 얼룩진 그 자해의 크기는 잊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 자해 이후 달라져가는 서양 철학의 성격, 그 변화된 체질을 특징짓기 위하여 세 가지 정도의 주제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 세 주제는 복잡성, 차이, 그리고 내재성이다. Ⅰ. 어떤 불면의 밤: 탈서양과 탈근대 서양적인 것, 가령 우리가 합리적이라거나 과학적이라 부르는 서양적 사유는 철학(필로소피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태어났다. 철학이 탄생할 때 서양이 잉태되었음을 기억하자. 그리스의 빛, 그 아래 싹튼 로고스와 테오리아가 가지를 뻗고 줄기를 틀어 열매를 맺는 과정이 서양의 역사이다. 그리스에서 오전을 허락한 태양의 궤적, 그것이 논리와 학문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서양 문명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문명사는 아침의 땅, 동양Morgen-land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동양에서 정신은 아직 물질성과 즉자적 추상성 속에 함몰되어 있다. 아직 수면을 벗어나지 못한 태양이 동양에서 처음 얼굴을 내민 정신의 모습이다. 역사의 진보는 정신의 이륙에, 태양의 상승에 있다. 그 상승의 궤적은 그리스를 지나 유럽에서 정오에 이르고, 마침내 저녁을 맞이한다. 저녁의 땅, 정신이 기나긴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고향이 서양Abend-land이다. 정신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취하는 휴식, 그것이 역사의 완성이자 종말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서양의 황혼기를 표시한다. 낮 동안의 모든 갈등과 모순 뒤에 오는 화해의 시간, 노동과 수고로부터 면제된 고요한 취침의 시간이 헤겔의 현대였다. 현대 철학사는 보통 헤겔 이후를 가리킨다. 1831년 콜레라에 감염되어 영면한 헤겔 이후, 그가 모두 자야 할 평화의 밤이라고 선언한 이후, 그 이후의 밤샘이 다음 세기로 이어지고 있는 현대 철학사이다. 지금은 시대 착오와 시행 착오가 절정에 이른 자정인지 모른다. 번잡한 밤, 왜냐하면 쉽게 결성되는 학회, 손쉬워진 출판, 일반화되어가는 강단 교육과 학위 수여 제도 등에 힘입어 무덤 속에서 잠들던 사상마저 다시 눈을 뜨고 쉼없이 중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해뜨기를 기다리는 불면의 눈, 잠의 유혹을 견디는 눈, 어둠 속에서 안광을 밝히는 눈은 소수이다. 그 소수만이 서양의 어제를, 그 새벽부터 황혼까지의 이행과 그 이행의 필연성을 회상하면서 또 다른 태양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 이 밤샘의 최대 고비, 그 칠흑 속의 사건은 '철학의 죽음'이다. 철학적 물음의 절대적 바깥, 서양적 사유의 저편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20세기 사상사에서 일어난 최대의 동요이다. 이 동요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공포의 사건은 헤겔이 가리켰던 세계사의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는 기회였다. 그 죽음의 주제가 제기하는 것은 그리스에서 싹트기 시작한 특정한 유형의 사유가 그 역사적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물음이고, 그 범위 밖에서 새로운 유형의 사유가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아침을 기다리는 해맞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해맞이의 의미를 모르는 사상,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는 사조는 어제의 꿈을 되풀이해서 꾸고 있는 과거의 철학에 불과하다. 그 죽음의 주제를 중심으로 현대 사상사를 바라보자면, 니체와 프로이트가 시초의 봉우리를 이룬다. 뒤이어 후설과 하이데거,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그리고 그 이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계속 이어져 산맥을 이룬다. 마르크스에서부터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또 다른 인접 산맥을 표시하고 있다. 이 두 산맥과 봉우리들이 서로의 위세를 넘보는 지점에서 탈근대론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나온다. 협곡, 탈서양의 물음이 탈근대의 물음으로 가파르게 깊어지는 대목이다. 서양의 철학적 근대는 데카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확립된 물질 및 정신 개념은 근대적 자연관과 인간관의 초석이 되었다. 중세의 인간은 복음의 약속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파악했다면, 근대인은 과학의 약속 안에서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생태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서양인은 이 믿음 속에서 살아왔다. 오늘날까지 과학의 진보가 곧 역사의 진보라는 등식만큼 널리 공유된 믿음은 그렇게 흔치 않다. 현대는 그런 믿음을 처음 심어주었던 데카르트적 자연관의 기초 개념들이 폐기되어야 하는 지점을 지나왔다. 상대성 이론·불확정성 이론·비유클리드 기하학·양자역학 등이 출현함에 따라 시간·공간·물질·정신·지각 등과 같은 초보적 범주들이 재정위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 필요성에 부응하는 것, 그것이 한때 철학함의 의미였다.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바슐라르, 카시러, 논리실증주의(비엔나 학파) 등은 현대 과학이 성취한 발견을 토대로 새로운 인식론적 모델을 수립하거나 새로운 자연관을 펼치고자 했다. 그런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병행하여 고전 논리학을 대신하는 기호논리학의 발전이 있었고, 이 정교한 형식 언어에 바탕하여 과학의 방법론은 물론이고 전통적 인식론과 존재론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것이 현대 영미 분석철학의 시작이었다. 이 분석철학은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쿤을 지나면서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경험과학을 지식의 모델로 하여 인식론적 원리를 도출한다거나 철학을 과학화한다는 시도가 백일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기는 마치 제2의 과학 혁명기 같은 인상을 주었다. 17세기 이래의 과학적 패러다임이 교체되고 있다는 확신이 일반화되기에 이른 이 시기에 많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상사적 의미를 반데카르트주의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것,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반대는 질투였으며, 현대의 데카르트가 되고자 하는 의욕이었다. 데카르트보다 더 위대한 데카르트주의자임을 자처한 철학자로서는 헤겔과 후설이 두드러진다. 이들이 생각하는 데카르트주의는 초보적 사고 범주들에 대한 데카르트적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의를 통해서 시작하는 데카르트적 성찰의 대담성에, 코기토 명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서 표명되는 반성적 내면성의 발견에 있다. 이성적 진리의 가능 조건을 묻기 위해서 절대적 비이성의 관점으로 옮아가는 과격한 사고 실험, 그리고 철학의 왕국이 건설될 수 있는 신대륙으로서 떠오른 반성적 내면성, 바로 여기에 데카르트주의의 핵심이 있다. 헤겔과 후설은 이런 데카르트주의적 유산을 플라톤 이래의 서양 철학사 전체 안에서 평가하였다. 그 평가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성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를 진리의 지반으로서 자각하였다. 자신의 자유가 의미 현상의 일차적 조건임을 깨달아 한 차원 높은 형태의 이성, 자기의식적 형태의 주체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로고스의 역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플라톤에게서 싹튼 서양 철학은 아직 미완의 계획으로 남아 있다. 헤겔은 절대적 관념론을 통해서,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서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의 계획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와 대칭을 이루는 시각이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로 대변되는 이 시각에 따르면, 플라톤은 그리스적 사유의 절정이자 철학의 탄생 지점으로서 평가되어야 하지만, 이 철학의 탄생은 어떤 퇴보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의 탄생 지점은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망각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가 망각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론적 사유를 본성으로 하는 서양 철학은 보다 근원적인 지혜의 퇴조 속에서 성립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그 퇴조의 정도가 심화되어가는 파행의 역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 철학사는 그 파행이 지나쳐 파산으로 이어지는 역사, 최후의 몰락으로 치닫는 역사로서 평가된다. 퇴행의 역사로서의 서양 철학사, 파행적 문화로서의 서양 문화를 그 기원에서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더 이상 서양적 사유의 실효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 극복의 계획은 (서양) 철학의 죽음에 대한 선언을 의미했다. 서양적 물음의 한계 저편, 서양적 문화 한계 저편으로 향하는 이 극복의 계획은 데리다의 해체론을 비롯한 후기 구조주의로 계승되었고, 이에 바탕한 여러 가지 탈근대론의 배후에서 미래 문화에 대한 구상을 부추기고 있다. 요컨대 탈근대론은 철학의 죽음이라는 주제에서부터, 그리고 이 죽음의 주제는 서양적 사유의 극복과 탈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유래한다. Ⅱ. 복잡성의 사유: 분석에서 해석으로 탈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 이 유례없는 계획에 속하는 사조들은 종종 비합리주의로서 요약되곤 한다. 서양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합리성에 있으므로 그런 요약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계획에 대한 몰역사적 이해에 있다. 그 계획은 단순히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그 반대는 전통적 합리주의를 상대적 관점에서 재정위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문맥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서양 문화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상과 병행하고 있다. 2천 년의 역사에 대한 도전, 이것을 지난날에 있어왔던 비합리주의의 한 유형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적 합리주의는 논리적 분석과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에서 발견된 이래 서양의 과학적 방법론의 근간으로서 발전되어온 논리적 분석은 단순성에서부터 복잡성으로 이행한다는 의미에서 단순성의 사유이다. 전체를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하고, 그렇게 주어진 단위 요소들을 결합하여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논리적 분석의 기본적 특성이다. 이런 분해와 구성의 절차는 사물의 생성 과정을 반복하고, 따라서 사물을 제작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서양의 과학이 그토록 효과적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논리적 분석은 이미 제작과 조립의 관점에서 시작된 대상 관계이다. 이 대상 관계 안에서 안다는 것은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논리적 분석은 사물의 생성 과정을 반복하고 번역하면서 생성의 의미 자체를 은폐한다. 이는 요소 단위의 기계적 결합이 생성의 의미를 대리하게 됨에 따라 빚어지는 일이다. 사실 논리적 분석은 생성의 망각이다. 사물의 자연적 생성을 이미 지나갔거나 완료된 사건으로 전제할 때만 논리적 분석이 성립할 수 있다. 정태성이 논리적 분석의 일차적 조건이다. 시간의 망각이 요소 분해와 재구성의 기본적 토대이다. 단순성의 사유인 논리적 분석은 시간성을 배제하는 공간적 사유이다. 이 공간적 사유는 이질화의 과정인 생성 자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논리적 분석은 또한 진화론적 사유이다.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신념 안에서 바라볼 때,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진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신념은 지극히 빈곤한 존재론으로 귀착한다. 이 존재론에서 1차원은 2차원보다 먼저 존재한다. 선행 차원은 후행 차원의 성립 여부와 무관하게 자족적으로 존재한다. 반면 후행 차원은 그 존재 방식에 있어서 의존적이다. 3차원은 1차원과 2차원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어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가능성을 선행 차원에 빚지고 있다.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에서 발생하고, 따라서 그것의 본성도 단순한 것의 본성에서부터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2차원은 3차원으로부터, 어떤 추상화나 배제를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1차원은 2차원이 단순화된 결과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복잡성의 사유이다. 상대성 이론·불확정성 이론·양자역학 등과 같은 새로운 과학 이론들은 논리적 분석의 유효성과 단순성의 특권적 지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복잡성의 사유가 단순성의 사유를 대체해야 할 필요성은 그렇게 자각되기 시작했다. 복잡성의 관점에서 단순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복잡한 것이 지녔던 잠재력이 퇴행적으로 단순화되거나 그 역동성이 고착화되어 정태적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20세기의 중요한 철학 사조들은 이런 복잡성의 사유를 심화시키는 작업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 단순성의 사유가 아르케의 추구라면, 복잡성의 사유는 어떤 흔적에 머문다. 이때 흔적이란 보다 복잡한 것이 단순한 사태에 남겨놓는 탯줄 자국, 배꼽이다. 사물의 생성적 기원으로서 상정되는 복잡한 것은 이 배꼽을 통해서 그것이 낳고 양육했던 사물에 여전히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 복잡성의 사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차원에 대하여 2차원이, 2차원에 대하여 3차원이 개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3차원은 상위의 차원과 모종의 영향 관계를 맺고 있다. 하위 차원은 상위 차원에 의하여 구속되어 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복잡한 것의 일부이다. 주어진 사태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사태의 일부이다. 보이는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의 함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 세상에 정태적인 사물은 없다. 사물은 그것이 놓여 있는 차원의 규칙에 의하여 안정화되고 구조화된다. 그러나 동시에 상위 차원의 개입에 의하여 탈구되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데리다의 '이중 회기'와 '결정 불가능성,' 베르그송-들뢰즈의 '잠재성' 등은 이런 복잡성의 사유에 부응하는 개념들이다. 단순성의 사유가 논리적 분석과 공모 관계에 있다면, 복잡성의 사유는 해석적 태도를 부추긴다. 흔적은 논리적 분석의 한계이다. 분해·지시·재현 등 논리적 분석에 기초한 인식론의 주요 범주들이 이 흔적 앞에서 무력해진다. 논리적 분석은 흔적을 무시할 때 비로소 태어날 수 있다. 한 사물에 대하여 흔적은 이미 완료된 생성의 내력을 간직하는 동시에 미래 완료적 생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흔적 속에 사물의 비밀이 있다. 자기 동일성을 띠는 것과 이질화되는 것, 구조화되는 것과 탈구되는 것은 모두 이 흔적의 운동에서부터 비롯된다. 흔적은 어떤 관계의 산물이다. 전체와 부분,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상위의 구조와 하위의 구조가 관계하면서 남기는 자국이 흔적이다. 환원적 분석을 파탄에 빠뜨리는 이 흔적에 관계하는 것, 그것이 해석이다. 논리적 분석의 낙관적 객관주의에 비할 때, 해석은 비관적이다. 논리적 분석은 자명성·직접성·현전성을 이념으로 한다. 논리가 진리 자체라는 믿음, 언어와 이론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번역하거나 반영할 수 있다는 믿음, 개념에 주어지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신념 속에서 논리적 분석이 발전해왔다. 진리는 자명하고 이성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현전할 수 있다는 이 신념이 깨지는 곳에서 현대적 해석의 전통이 싹텄다. 현대적 의미의 해석은 차라리 그 낙관적 신념의 계보학으로서 탄생했다. 계보학적 관점에서 논리적 분석의 이념들은 어떤 사유의 결여로서, 혹은 허위 의식으로서, 혹은 어떤 징후로서 간주된다. 자명한 것은 언제나 자명하지 않은 것의 효과이다. 직접적인 것은 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의 표면이다. 자명성은 가짜의 자명성이고 직접성은 은폐된 간접성이다. 여기서 직접성의 신화를 깨뜨린 거장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기억하자.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도덕적 가치 해석과 권력 의지를, 프로이트는 의식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불투명한 무의식을, 마르크스는 문화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계급 갈등과 정치경제학적 이해 관계를 서술했다. 이들의 서술에 따르면, 의식은 허위 의식이고 기원은 결과이다. 인식은 언제나 이미 선택적 해석이다. 출발점을 자처하는 아르케는 어떤 도달점이다. 그 세 저자들 이후 열린 해석의 시대, 이 시대는 상대주의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종종 해석적 상대주의를 지적 패배주의나 허무주의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전도된 평가는 없을 것이다. 해석적 상대주의는 상대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성은 복잡성의 사유와 생성의 존재론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 입구에 표시된 것은 인간의 역사적 유한성이다. 상대성은 그 유한성을 일깨우는 무한한 해석의 과제이다. 무한하고 따라서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 그러나 회피하기 어려운 책임, 그것이 해석이다. 상대성을 곧바로 패배나 함정 등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적 유한성을 망각하거나 진리를 손쉬운 과제로 여기는 낙관주의 속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성의 신화가 깨질 때 흔들리는 것은 분해·지시·재현 등과 같은 인식론적 범주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총체성의 개념이다. 총체란 부분들의 단순한 집적이 아니다. 위계적 질서와 체계적 통일이 있는 곳에 총체성이 있고, 따라서 가장 먼저 어떤 중심이 있어야 한다. 이 시대가 해석의 시대인 것은 그 동안 철학이 설정해왔던 어떠한 중심이나 이념도 역사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탈역사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주장되어온 아르케나 기원은 여전히 어떤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고, 따라서 해석의 대상이다. 중심은 구조적 총체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환의 유희를 안정화시키는 준거점이지만, 이 준거점 자체는 어떤 해석을 요구하는 또 다른 유희의 효과이다. 해석은 그러므로 이 중심을 통하여 구조적 총체성의 안과 밖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말해서 닫혀진 구조와 그것을 포괄하는 상위 구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여야 한다. 복잡성의 사유가 위치하는 곳, 그곳은 이 두 구조의 사이에 있다. 해석적 사유의 과제는 그 두 구조 사이의 경제이다. 역사의 기원이자 언어의 기원, 나아가서 모든 구조적 총체성의 닫힘과 열림에 대한 이중적 기원은 이 두 구조 사이의 경제에 있다. 접경적 경제, 그것이 복잡성의 사유가 모든 의미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탐구하고자 하는 중심적 주제이다. 그러므로 복잡성의 사유는 총체성을 단순히 폐기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중심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접경적 경제라는 대단위 주제의 일부로서 포괄하고 있다. 총체성과 중심, 나아가서 논리적 합리성은 총체성의 열림과 닫힘, 그 안과 밖 사이의 관계라는 포괄적 주제를 구성하는 하위의 주제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Ⅲ.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총체성 복잡성의 사유는 관계적 사유이다. 중심과 총체성이 과거의 특권적 지위와 역할을 박탈당해야 했던 것은 이 관계적 사유의 진리에 종속되기 위해서였다. 관계적 사유의 진리는 차이에 있다. 사실 총체성은 어떤 동질화 혹은 매개의 최대 규모이다. 중심은 이 매개적 동질화의 출발점이자 한계이다. 동일성 위주의 사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중심을 전제해야 하고, 때문에 닫혀진 총체성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 총체성 안에서 관계의 가능성은 차이의 배제에서 온다. 관계 가능성이란 매개 가능성이고, 매개란 차이의 동화(同化)이다. 복잡성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동일성에 근거한 관계는 퇴행적이고 왜곡된 관계이다. 왜곡되기 이전의 관계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동일성은 이 차이 관계의 산물이다. 동일성과 차이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개념 짝이다. 서양 철학사의 주류 안에서 동일성은 진리의 속성으로서, 차이는 오류의 속성으로서 규정되어왔다. 고유한 것, 변하지 않는 것, 초감성적이고 정신적인 것 등이 동일성 아래 표상되었다. 반면 차이 아래에서는 그 반대의 것들이 표상되었다. 항구적 실체성, 어떤 불변적 본질이 동일성의 사유 안에서 추구되어왔다. 동일성의 관점 배후는 그러므로 변화의 기피, 관계의 거절이다. 변화와 관계는 여기서 오로지 동일성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계기로서 도모되어왔다. 변화 없이, 타자에 대한 관계 없이 동일자의 확대 재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 이래의 철학은 언제나 타자를, 변화와 관계를 성찰해왔다. 그러나 이 성찰은 동일자로의 회귀에 불과했다. 타자는 이 회귀의 가능성 안에서만 정립되었고, 그렇게 정립된 타자는 이미 순치된 타자에 불과했다. 타자와의 관계는 동일자의 자기 관계 안에서 수립되었다. 따라서 관계란 동일자가 소유하는 여러 가지 속성들 중의 하나로 파악되어왔다. 관계를 어떤 속성 혹은 형용사적 성질, 따라서 타동사적 관계로 파악하는 제한된 시각에서, 차이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플라톤주의자는 주장한다. 차이란 사물들 사이의 다름이라고. 따라서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사물의 자기 동일성이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복잡성의 사유에 따르면, 우리는 각 사물의 동일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여러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차이 관계가 개별적 동일성의 바탕이다. 이런 차이 위주의 관점에서 실체적 자기 동일성은 임시적이다. 실체적 자립성은 가상이다. 사물들은 생성의 과정 속에 놓여 있고,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각기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이런 관점이 설득력을 얻기까지 현대 사상사가 지나온 몇몇 이정표를 회상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있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위대성은 인식의 구조적 측면과 발생적 측면을 포괄적으로 서술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 두 측면의 탐구에서부터 소위 선험적 현상학과 생활 세계의 현상학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 두 계획은 봉합될 수 없었다. 양자 사이의 균열은 현상학적 환원의 한계, 구조적 총체화가 불가능한 지점을 표시한다. 그 균열은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바깥이 이성적 사유의 내면에 간섭하는 어떤 통로이다. 이 총체성의 바깥은 실존주의의 이념이 되었다. 키에르케고르의 반헤겔주의와 후설의 현상학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등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실존주의는 논리적 언어로 잡히지 않는 부조리한 경험을 지시하고 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총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로서, 무의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부각되었다. 그 다음 아도르노의 부정성 이론이 있다. 여기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초월론적 성격을 더해갔다. 그리고 동일성의 사유가 현실적 문맥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배제의 사태에 대한 선험적 조건임이 니체 이후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국가·사회·집단·문화 등 동질화를 추구하는 모든 위계적 단위가 차이 배제적 환원 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계몽주의적 진보의 이념 안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도르노의 사회철학이다. 물론 계몽주의의 내재적 한계로서 밝혀진 이 환원 구조는 동일성의 사유의 연장선 위에서 파악되었다. 그러나 동일성의 사유에 대한 적대자로서 레비나스만큼 과격한 비판자는 없었다. 유대적 전통 안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을 변혁시키려 했던 이 철학자에게서 비동일적 및 탈총체적 사유의 과제는 탈그리스적 사유의 모색과 등식을 이룬다.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는 레비나스는 새로운 무한자론의 형태를 띤 타자의 철학에 이른다. 아도르노는 이성적 사유가 도달하는 동일성을 예술적 영감의 무한한 부정성 안에서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면, 레비나스는 이성적 사유의 절대적 바깥으로 향한 윤리적 초월성 안에서 동일자의 폭력을 극복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구조주의가 있다. 데카르트 이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의미 구성의 주체로서 이해되어온 자율적 인간은 구조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외부에 의하여 구성되고 지배되는 타율적 주체, 거대 체계의 부대 효과로서 전락했다. 이 전락은 어떤 전략적 효과이다. 사실 과학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구조주의는 탈신비화의 전략이다. 이 구조주의의 기원에 있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우리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드러나는 것과 유사한 균열을 발견할 수 있다. 사후 출판된 강의록에서 펼쳐지는 랑그의 언어학, 그리고 출판되지 않은 유고에 담겨 있는 파롤의 언어학 사이의 단절이 그것이다. 랑그의 언어학은 정태적 언어학이고, 언어의 공시적 구조와 안정된 질서를 탐구한다. 여기서 구조주의가 유래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파롤의 언어학은 동태적 언어학이고, 언어의 불안정하고 생성적인 측면을 탐구한다. 후기 구조주의가 역사적이고 발생적인 측면에서 언어에 접근한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정태적 언어학은 언어가 닫혀진 총체성을 이루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동태적 언어학은 이 전제를 배반한다. 구조적 총체성이 무한히 새롭게 개방된다는 사실이 동태적 언어학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구조적 총체성의 안과 밖 사이의 관계, 그 열림과 닫힘을 결정하는 규칙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가장 깊이 천착해간 철학자는 데리다이고, 그의 탐구는 차연론으로 귀결된다. 데리다의 차연론은 헤겔의 변증법적 차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가 서로 겹치는 곳에 위치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차이는 동일성의 내재적 구성 요소이다. 변증법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동일성은 차이 속에서, 차이와 더불어 현상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가상을 구성 요소로 하고, 가상을 통하여 현상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자(현실적으로 있는 개별적 사물)와 존재(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있게 하고 개방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 안에서 존재는 존재자처럼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한다. 존재는 오로지 존재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존재를 통하여 탈은폐되는 존재자는 동시에 존재를 은폐한다. 탈은폐와 은폐 사이, 그 사이가 존재론적 차이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는 기표들 사이의 대조 효과를 말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따르면, 이 대조 효과로서의 차이가 기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기의에 대해서도 그 발생과 자기 동일성의 기원이다. 차이의 그물망이 있고, 그 안에서 동일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를 급진화하자면, 기호학적 교환 이전에 존재하는 의미, 그 교환의 연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지시 대상은 없다. 총체성은 의미의 총체성도, 실재의 총체성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교환의 총체성이다. 그러나 교환의 유희는 무한하다. 이 무한성, 이것이 원형의 신화를 찾던 구조주의자 레비 스트로스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교환의 무한성은 총체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응급 수리'(브리콜라주)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전략은 그런 무한성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푸코와 료타르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도 역시 총체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한성의 체험을 존중하고 있다. 많은 경우 총체성에 대한 비판은 그것의 정치적 및 실천적 함의를 겨냥했고, 이것은 동일성의 사유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다양성·개체성·이타성·개방성·역사성의 옹호를 위해서 행사된 비판, 그것은 동일성의 사유가 행사할 수밖에 없는 배타성으로 소급해갔다. 총체성은 그런 배타적 동일성의 체계적 완결로서 심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이 레비 스트로스적 절망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 정치적 억압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총체성이 심판되기 이전에 총체성의 닫힘과 열림, 구조적 안정성과 불안정성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 없이 차이 위주의 사유는 동일성 위주의 사유를 포괄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단지 일면적 비판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성적 사유의 건전한 측면에 눈감고 있다는 반대자의 논박 근거 앞에서 무력해질 것이다. (이성적 사유의 건전한 측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리적 분배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계산의 힘, 행정의 능력이다. 개체의 희생은 언제나 전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강요되었다). 변증법적 차이, 존재론적 차이, 그리고 언어학적 차이가 만나는 곳에 서 있는 데리다의 차연론은 동일성의 논리를 포괄한다. 기호논리학이 삼단 논법을 포괄하듯이, 상대성 원리가 고전적 역학의 설명 범위보다 더 넓은 외연을 지니듯이, 차연론은 동일성의 논리를 자신의 일부로 거느린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차연론이 말하는 차이는 공간적 차이면서 시간적 차이다. 또한 수평적 차이면서 수직적 차이다. 수평적 차이란 개체적 사물들, 총체성을 이루는 사물들 사이의 차이다. 수직적 차이란 총체화되는 구조와 그것을 포괄하는, 그러나 한정 불가능한 상위 구조 사이의 차이다. 이 수직적 차이가 한정된 구조 안의 질서를 재편하는 변화의 원천이다. 역사의 원천인 것이다. 한정된 구조에 대한 한정 불가능한 상위 구조의 개입, 이것이 구조적 총체성의 닫힘과 열림의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한 최후의 전제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총체성을 포기하면서도 단순히 상대주의자가 아닌 것은 이렇게 두 가지 위상의 구조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계론자이고, 복잡성의 사유를 추구하고 있다. Ⅳ. 외재적 초월에서 내재적 초월로 서양적 사고 방식을 특징짓는 표현들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플라톤주의·기독교·이론과학·논리와 합리성 등이 그것이다. 서양의 사상사적 전통을 규정해왔던 이런 요소들은 어떤 공통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외재적 사유라는 데 있다. 이것들은 모두 외재적 초월의 여러 가지 형태들이다. 외재적 사유란 밖으로부터 안으로 향한 사유이다. 또는 안으로 향하기 위해서 먼저 밖으로 향하는 사유이다. 일차적으로 주어진 사태의 외부에 어떤 기준(이상·목적·이념·모델·원형 등)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사태를 설명(분석·평가·단죄)하는 것, 그것이 외재적 초월이다. 플라톤주의를 보라. 경험적 세계의 밖에 이상적 원형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된 피안으로부터 이 차안의 존재론적 유래와 지위를 해명하는 것이 플라톤주의이다. 피안의 관점에서 차안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경험적 관찰을 중시하는 과학도 여전히 외재적 사유이다. 어떤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통하여 경험적 세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학의 진보는 모델의 진화 과정이고, 과학에 대하여 경험적 관찰은 이 모델을 검증하거나 수정하는 절차이다. 플라톤주의 전통 안에서 논리와 개념은 동일성의 생산 기제이다. 이 동일자는 다양한 개별자와 다른 위상에서, 다시 말해서 군림하는 상위의 위상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어왔다. 논리적 사유란 다양성의 차원에서부터 동일성의 위상으로 향한 이행이며, 동일성의 관점에서 다양성의 차원을 총체화하는 작업이다. 20세기의 사상사에서 자라나고 있는 미래의 싹으로서 우리는 복잡성과 차이 위주의 사유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복잡성과 차이 위주의 사유가 탈서양 및 탈근대적 대안으로서 구체화되기 위해서 넘어서야 하는 마지막 고비가 있다. 그것은 외재적 초월과는 다른 방식의 초월을 제시해야 한다는 난제이다. 사유의 일차적 조건은 일관성이고, 일관적이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유는 합리성, 일관된 포용성을 띨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사유는 (헤겔적 의미의) 직접적 추상성을 벗어날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초월적이다. 이제까지 서양 사상사의 주류 안에서 초월은 외재적 초월이었다. 합리성은 이 외재적 초월성 안에서만 파악되어왔다. 따라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성의 사유였다. 동일성의 사유를 극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일성의 사유를 낳은 그 유래, 즉 외재적 초월을 극복할 때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재적 초월의 극복은 모든 초월의 거부로서 귀결되지 않는다. 초월성의 거부는 사유 자체의 거부와 같다. 사유는 초월적일 때만 사유일 수 있다. 초월은 또한 한 가지 종류가 아니다. 외재적 초월이 모든 초월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사상사에 대하여 아마 이에 대한 몰이해보다 더 큰 장애는 없을 것이다. 현대 사상사의 최대 고비가 외재적 초월의 극복에 있다면, 이 외재적 사유의 한계란 무엇인가? 어떤 이유에서 우리는 외재적 사유를 비판하고 넘어서야 하는가? 경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억압과 배제 혹은 폭력의 문제에서 그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창조성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니체가 간파했고(『도덕의 계보』, 「첫번째 에세이」, 10절) 후에 들뢰즈가 부각시켰던 것처럼, 플라톤적 사고법이나 기독교적 사고법은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외재적 사유를 극복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이 점에 있다. 외재적 사유란 자기 밖의 규칙에 순응하는 사유이다. 규칙의 강요와 명령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사유, 규칙에 대한 예속을 의미있고 정당한 행위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유, 외부로부터 주어진 원리와 이념의 인도 없이는 혼돈을 대처할 능력이 없는 사유, 그것이 외재적 사유이다. 공문이 있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관료를 생각해보라. 복지부동, 그 밖의 모든 관료주의적 병폐의 기원은 외재적 사유에 있다. 외재적 사유는 사태의 안이 아니라 사태의 밖에 원형과 모델을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외재적이다. 이때 밖이란 감성적 소여, 시간, 역사, 언어의 밖이다. 여기서 사태가 발생하는 장소 이외의 또 다른 장소가 설정된다. 이 장소가 입법의 공간이며, 심판의 무대이다. 그러므로 외재적 사유에 대하여 언제나 어떤 본부가 있다. 명령을 시달하고 옳고 그름을 결재하는 사령부가 있으며, 철학자는 그 중앙을 위하여 일하는 행정가이다. 외재적 사유는 그런 의미에서 행정적 사유이다. 행정적 행위는 상부로부터 내려온 명령에 따르므로 그 동기를 자기 안에 갖고 있지 않다. 그 행위는 반응 행위이며 작용은 반작용이다. 밖으로부터 동기가 주어질 때 움직이는 행위는 능동적 행위가 아니다. 본성상 그것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행위인 것이다.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 가지는 행위, 스스로 규칙과 방향을 창출해가는 행위만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행위,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에 대한 사례는 예술적 행위 속에 가장 잘 구현되어 있다. 예술적 행위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규칙을 사례화한다는 데 있다.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규칙의 사례가 아니라 사례적 규칙 자체이다. 이런 예술에 대하여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타성, 즉 외재성이다. 예술적 행위처럼 그 동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행위, 예술적 사유처럼 판단의 규칙을 스스로 창출하는 사유에서부터 외재적 사유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초월론을 생각할 수 있다. 현명한 관념론의 길, 왜냐하면 예술적 사유는 물론이고 모든 사유는 초월적인 한에서 관념론적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초월론은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태의 밖에 입법적 장소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내재적이다. 일원적 초월론의 길, 왜냐하면 설명하는 것과 설명되는 것이 각각 서로 분리된 장소로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범례주의의 길, 왜냐하면 질서를 창출하는 규칙과 그 규칙의 선험적 규범성은 계승 가능한 역사적 범례 안에서, 그 범례에 대한 창조적 해석을 통하여 추구되기 때문이다. 외재적 사유는 입법적 피안을 설정하고, 따라서 이원적이다. 이 이원적 사유는 생성과 변화의 범위를 제한한다. 생성의 기피, 이것이 수동성 혹은 타성과 더불어 외재적 사유의 부정적 측면을 이루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입법적 외면을 끌어들이는 동기를 생각해보라. 이 세계에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정당성과 부당성을 구분하기 위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판정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탈세간적 성격의 입법적 외면이 필요했다. 입법적 외면을 설정하지 않는 내재적 사유에 대하여 그런 구분과 판정은 그 동기부터 의심스럽다. 많은 경우(니체, 아도르노, 푸코, 료타르) 그 동기는 지배 권력의 자기 보존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내재적 사유는 단순히 지배 권력의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내재적 사유는 무엇보다 생성론적 사유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의미의 상하(上下)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상하는, 그리고 서양의 형이상학이 구분해온 온갖 대립 짝은 동등한 자격에서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재적 사유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의미의 위와 아래는 나눌 수 없는 상호 함축적 관계에 있다. 하나의 장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재적 사유를 초월론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례는 별로 많지 않다. 헤겔과 니체 이후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 지금까지의 서양 철학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이다. 최고류의 존재자를 존재자의 존재로서 혼동해온 것이 서양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존재자를 존재자 되게 하는 존재는 존재자의 영역과 분리된 다른 장소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로서만, 그래서 존재자의 세계 안에서만 드러나거나 숨는다. 형이상학의 역사가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면, 존재 사유는 단순히 이 역사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망각과 파행의 역사가 존재 사유의 유일한 안내자이다. 존재는 역사적 시간 안에서, 존재자에 의한 파행과 왜곡과 은폐를 겪으면서 존재한다. 존재 사유는 이 파행과 왜곡과 은폐에 대한 사유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이런 하이데거적 존재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해체론의 지향점은 서양적 사유(로고스 중심주의)의 울타리를 그리는 것, 그리고 그 바깥으로의 외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출은 로고스 중심주의 밖으로 향한 도약도, 그 밖에 대한 직접적 경험도 아니다. 그 밖은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 그것이 남긴 말과 담론 안에 기입되어 있다. 초월자는 텍스트의 짜임 속에, 그 그물코 사이에 왜곡된 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탈로고스적인 것, 그 이름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자(무)는 로고스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다른 세상을 이루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밖은 없다. 그 밖은 언어적 질서에 예속되면서, 따라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문법에 의하여 변형되고 고착화되면서, 그러나 그 언어적 질서를 재편했던 충격의 흔적으로서 언어 안에 기록되어 있다. 초월자는 언제나 씌어지고 기록된 초월자, 언어 안에 기입된 내재적 초월자이다. 따라서 해체론적 의미의 해체란 초월자가 로고스를 통하여 변형되고 지워져 있는 텍스트를 일정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사라진 초월자의 흔적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읽어가는 과정이다. 초월자를 독립된 방식으로 또는 순수하게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은 들뢰즈의 표현주의가 강조하는 첫번째 사항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내재성의 탐구에 두었다. 이것은 무한자(신)를 이 유한한 세계 밖에 위치시키는 것에 반대했던 스피노자의 영향이다. 들뢰즈의 무한자, 그 무한한 일자는 순수한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은 다양한 개체를 통하여 표현되고 펼쳐지는 한에서 존재한다. 표현되고 다양화되는 것, 이질화되고 변형되는 것이 힘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힘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이질화되어 있고 여전히 이질화되어가고 있는 것들, 다양한 개체들이다. 그 다양한 개체들은 그 하나된 힘을 표현하되 자기 안에 숨기고, 그 숨김으로서의 함축이 동시에 표현이다. 그러므로 표현되는 일자는 표현하는 다자와 하나이면서 둘이고 같으면서 다르다. 초월자는 다양한 개별자 안의 함축으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지는 복잡화의 여정 안에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개척되고 있는 내재적 사유의 길, 아마 이 길을 따라서 서양인은 새로운 동쪽에 이를 것이다. 해뜨기는 아직 멀었지만, 그리고 해뜨는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철학사의 내일은 분명히 그리스에서 시작된 하루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얼마큼 다를 것인가? 또한 두렵지 않은가? 왜냐하면 서양인이 동쪽을 찾는 까닭은 여전히 서세동점(西勢東占)의 한 과정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고 싶다. 새로운 해가 뜨는 곳, 그 동쪽의 땅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자들, 그들은 혹은 우리는 어떻게 밤을 보내고 있는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어떻게 눈을 떠야 하는지. 그러나 과연 뜰 수 있는지. 누가…… 해가? ▨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 그리운이여/그대는/나를/기억하시나요 -------------------------------------- [키 즈]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다음][이전]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