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2000년 1월 24일 월요일 오전 12시 22분 37초 제 목(Title): 소쉬르, 데리다 그리고 노자 다음주 쳇팅에서 얘기할 소쉬르의 기호학과 데리다의 해체 철학에 대해 미리 포스팅으로 자세하게 집고 설명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좀 복잡한 개념이라 쳇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네요. 그렇다고 소쉬르나 데리다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일주일만 공부하면 저만큼 다 됩니다. ^^ 이 사람들의 철학을 자세히 알아본다는 측면보다는 이 사람들이 쓰는 도구만 가져오는 것이니... 그래서, 여기서는 소쉬르와 데리다에서 제가 필요한 것만 가져와서 설명합니다. 1. 소쉬르의 기호학 ㄱ) 언어 기호와 그 대상과의 자의성 일테면, 어떤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사물 또는 관념)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개인 또는 사회에 따라 제각각 자의적으로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보통 단어와 그 대상의 관계는 1:n 대응이 됩니다. 1:1 대응은 아주 희소한 경우로 특수한 경우입니다. 아예 대상을 손으로 가르키며, '이 것'할 때 외는 별로 없습니다. 예로 '진리'라는 단어를 들어보죠. 이 진리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이 것은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니, 그 대상은 관념이겠죠. 그러나 이 진리라는 단어의 대상인 관념을 한 가지만 지적해서 정확히 이 것이 진리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얘기하며, '이 것이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시오'라고 하지만, 어느 것이 참 진리인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진리와 그 대상과의 대응 관계는 1:무한대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들마다 다른 매우 자의적이고 애매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진리 체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전제합니다. 플라톤은 그 것을 '이데아'라고하고, 이런 플라톤의 전통을 이어 이데아를 탐구해가는 것이 바로 서양 형이상학(=철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아직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것이 하나의 체계만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전제일 뿐입니다. 도리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모순이 없는 공리 체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수학에서도 그런 형편이므로 따라서 서양 형이상학에서 얘기하는 진리 체계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20세기 초까지 유지된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은 이렇게 진리라는 단어의 자의성을 무시한 결과, 붕괴하고 맙니다. ㄴ)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 소쉬르는 언어와 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들을 기호라는 더 큰 범주로 확장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문자 또는 말 뿐만 아니라 거리의 신호등, 거리의 네온 사인, 미술 작품, 음악, 등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의미를 가진 모든 것이 기호의 범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소쉬르는 기호를 일반적으로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이뤄졌다고 봅니다. 즉, 기호 = 기표 + 기의 여기서 기표는 기호의 형태(표식)이고, 기의는 기호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기호에서 이 기표와 기의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기표와 기의는 마치 종이의 앞뒤면과 같아서 그 종이를 찢어서 한 부분을 기표라고하고, 나머지 부분을 기의라고 할 수 없는 것에 비유합니다. 근데, 소쉬르는 이 기표와 기의의 관계도 자의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기표에 대한 의미를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르게 본다는 거죠. 예를 들어, 죽음을 의미하는 색은 동양에서는 '흰색'이지만, 서양에서는 '검은색'으로 정반대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사랑'이란 기호를 생각해보죠. 누구나 연인 관계를 이 '사랑'이란 같은 기표로 씁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의미는 제각각입니다.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남녀는 사랑은 'fuc*ing'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것이 사랑의 완성이네 머네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플라토닉 러브'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플라토닉 러브란 것이 서양 형이상학의 시조인 플라톤이 사랑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해서 나온 실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란 아예 없는 것으로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fuc*ing과 플라토닉 러브를 1:1로 섞은 것을 의미하고, 어떤 사람은 2:1, 다른 사람은 1:2,... 등등 사람마다 천차 만별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기표가 의미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후설(1859-1938)은 언어와 대상과를 1:1로 대응시키지는 못해서 실제의 진리 체계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인간이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진리 체계를 언어를 사용해서 세울 수는 있다고 버팅깁니다. 하지만, 이 후설도 데리다가 소쉬르 기호학에서 기호와 기표의 자의적인 관계를 지적함으로써 깨지게 됩니다. 관념을 기호로 표시하면 그 기호의 기의는 자의적이기 때문에 원래 의도한 관념이 재현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ㄷ) 언어의 의미는 차이에서 온다. 보통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 물체 또는 단어 자체가 가진 의미가 있어서 나타난다고 보지만, 소쉬르는 그 것을 부정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든 ㄱ)과 ㄴ) 항의 성질에 의해서죠. 언어와 그 대상의 자의성에 따라 그 한 단어의 대상은 유일하게 확정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에 따라 그 단어의 의미도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소쉬르는 그 단어의 의미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에서 발견해냅니다. 이 것이 바로 소쉬르의 뛰어난 점이죠. 소쉬르 이전에도 언어의 자의성은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 점에까지는 미치지 못 한 듯 합니다. 이런 점은 예를 들자면, 색깔과 숫자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색깔의 경우 붉은색이라면 이 붉은색이란 단어의 대상은 너무 많아서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이 붉은색의 의미는 다른 색과의 비교에 의한 차이에서만 나타납니다. 만약 붉은색이 자체에 그 의미를 가진다면 다른 색은 없어도 붉은색 하나만 있어도 붉은색의 의미가 나타나야하는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붉은색 하나만 있다면 색깔이라는 것의 의미조차 없어집니다. 그냥 흑백 화면이 되겠죠. 따라서, 붉은색은 다른 색깔들이 있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붉은색은 전체 색깔이란 체계의 구조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숫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정수 3은 그 혼자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정수와 비교에 의해 그 의미가 나타나죠. 즉, 전체 정수 체계의 구조 안에서만 숫자 3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이런 식으로 소쉬르는 모든 단어는 전체 언어 체계의 구조안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소쉬르의 발견에 따라, 그동안 언어로 명확하게 그 체계를 세우려던 서양의 형이상학은 그 근본부터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의 붕괴는 종전에 형이상학의 발전 과정에 있었던 모든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형이상학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문제가 되어 형이상학의 존립 자체가 의심되게 됩니다. 그 후 서양 철학은 모든 것을 전체적인 구조 내에서 고려하는 구조주의로 전환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쉬르의 기호학은 서양 학문의 대부분의 분야에 걸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기폭제가 됩니다. 2. 데리다의 차연, 텍스트 데리다(1930-)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좀 더 진전시킵니다. 그는 소쉬르가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을 수정합니다. 데리다는 기호의 의미는 없다고 부정합니다. 즉, 기호를 이루는 기표와 기의 중에서 기의는 없다고 보고 기호는 기표로만 이루어진 다고 주장합니다. 이 것이 바로 '차연(differance)'이라는 개념입니다. 즉, 차연 = 소쉬르의 '차이' + 기호의 의미의 영원한 '연기' 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제시합니다. differer는 불어로 다르다, 연기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인데 이 것의 명사형인 difference에서 두번째 e를 a로 바꾸어 differance(차연)이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냅니다. 데리다가 기의를 부정하는 이유는 소쉬르는 단어의 기의는 단어 구조내에서 유한개의 다른 단어와 비교해서 그 차이에 의해서 정해질 수 있다고 봤지만, 데리다는 단어 체계의 구조내에는 무한개의 단어가 있으므로 다른 단어와의 비교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단어와의 차이가 결정돼지 않으므로 단어의 기의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따라서, 언어로 이뤄진 텍스트는 이 차연으로 짜여진다고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언어를 기호로 확장하면 기호로 씌여진 텍스트는 종래의 언어로 씌여진 텍스트보다 그 범위가 훨씬 확장됩니다. 기호는 어는 것이나 될 수 있으므로.. 데리다에 의하면 기호는 기의는 없고 기표로만 이뤄지므로 모든 형태는 그 의미가 없어도 다 기호가 됩니다. 따라서, 거의 모든 것이 다 텍스트가 됩니다. 이 텍스트는 차연으로 짜여진 '직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텍스트는 의미가 없는 기표들로만 이뤄지기 때문에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냥 텍스트만 존재하게 되고, 텍스트 바깥으로 나가는 의미는 없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3. 데리다의 해체 이론과 노자 이런 차연 개념을 바탕으로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을 전면 해체합니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 을 집중적으로 비판합니다. 로고스란 언어, 이성, 논리 등을 나타내는 말로써 서양 형이상학은 이 로고스를 그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듯이 언어는 부정확한 것이고, 이성과 논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보듯 자체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은 이러한 불완전한 로고스를 도구로 삼아 완전한 진리 체계인 이데아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데리다가 모든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형이상학에의 욕망이 권력을 낳고, 거꾸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 밖으로 나가든가, 다른 형이상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데리다가 생각한 것이 탈구축(또는 해체(또는 탈구축) 이라는 방법이다. 이것은 진리에의 욕망을 지속하면서 끊임없이 절단한다는 전략적 사고법이다.' (현대 철학 산책, 황원권 엮음, 백산서당(1996)) 이것이 간단하게 본 데리다의 해체 이론입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자신 나름의 형이상학은 세우지 않는 전략을 취합니다. 만약 자신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세우면 그 것도 자기 자신의 해체 이론에 따라 해체될 운명이라는 논리가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리다 이후 서양 형이상학은 몇 십년동안 무너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니체를 계승한 들뢰즈가 있기는 하지만, 데리다를 극복하지 못 하는 한 서양 형이상학의 부활은 불가능하게 되는 묘한 상황이 되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이 데리다의 해체 이론에 따라 노자를 해석하는 이유는 노자 1,2장을 보면 나타납니다. 바로 노자 1,2장이 소쉬르는 기호학 ㄱ), ㄴ), ㄷ)을 다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건 우연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노자는 소쉬르의 기호학(또는 언어학) 이론을 2000년전에 분명히 알았고 그래서 1,2장을 맨앞에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노자의 기호학적 발견하에 노자는 중구남방의 제자백가 철학들을 해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으로 노자를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노자를 읽다보면 소쉬르 또는 데리다와의 기호학적 일치 외에도 데리와와 들뢰즈와의 유사성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반로고스 주의는 바로 노자의 無知와 통합니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말은 안 하지만 열심히 노자를 표절해 왔는 지 어찌 알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