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chaconne (샤콘느) 날 짜 (Date): 1999년 11월 16일 화요일 오후 08시 08분 48초 제 목(Title): Re: 극단적인 허무주의는 보수화된다 라임라이트님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는, 니체의 철학과 실존주의는 패배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며, 극단적인 허무주의는 보수적 성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이란 전제를 단 것입니다.) 실존주의에 대해 처음 글을 쓸 때, 그 기사를 참조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그냥 참고용으로 올린 것인데, 논점을 빗나가게 한 모양이군요. 관점이나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 보수적 시각을 유지하는 일반신문에 기고된 기사인 이상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정세나 실존철학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알지못하는 일반 독자가 읽었을 때는 왜곡해서 받아들일 위험성도 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쓴 장본인이 아니니 변호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카뮈의 입장이 강조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르트르의 투쟁적 자유인 보다는 카뮈의 고뇌하는 인간상이 더 친근한 우리나라의 지적 분위기가 문제겠죠. 난해한 사르트르의 철학 보다는 카뮈의 문학이 더 대중적이기도 한 탓이죠. 미국에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가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이듯이 사르트르 또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기존체제에 흡수되지 않으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을 주도해온 자신을 제쳐두고 카뮈에게 먼저 노벨문학상을 준데 대한 자존심의 표현이라고도 합니다만) 그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 대목일 겁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까지는 '프라하의 봄' 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르트르가 소련으로 대표되는 현실 공산주의 국가를 비판했다고 해서 맑스주의의 이상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고 시도했지만 미완으로 남겨졌습니다.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소련이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 사르트르는 좌우 양진영을 모두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곧 제국주의의 옹호가 아님을 고려해야 합니다. 당시 유럽의 시각에서는 공산당 또한 제국주의의 대변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옹호가 되는 것은 (현재 국민회의에 대한 비판이 한나라당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이 곧 국민회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몰고가려는 사람들이 있듯이), 너 아니면 나밖에 없다는 흑백논리로 가득찬 우리나라의 폐쇄적인 상황 때문이죠.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나라의 레드 컴플렉스의 반영이기도 하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정당이 실제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는 정당으로서가 아니라 막연한 이념적 수준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겁니다. 실존주의와 맑스주의 특히 사르트르와 공산당과의 관계는 [현대프랑스 지성사] 5장. 현상학과 맑시즘의 결합 / H.S.휴즈 / 문학과 지성사 [실존과 혁명: 실존주의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 논쟁사] / G.노바크 엮음 / 한울 등의 책을 참고하면 될 것이고, 보완해서 사르트르에 대한 현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후반부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또 그런 기사 올렸다고 탓하지는 마시기를... chaconne : ykkim21@neti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