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porori (포로리) 날 짜 (Date): 1999년 5월 22일 토요일 오후 09시 41분 01초 제 목(Title): 바슐라르 바슐라르의 <초의 불꽃>은 limelite님이 소개한 '자연 연소'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책입니다. 바슐라르 자신이 촛불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여러가지 상념들, 몽상의 전개, 문학적 수사와 인용 등등이 있을 뿐, 무슨 현상에 대한 원리 설명의 의도나 시도를 한 것은 없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촛불 하나를 두고 어떻게 이런 긴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감탄밖에 안나옵니다. 바슐라르는 수학과 물리학 학사,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등을 가르쳤던 경력의 사람입니다만 뭐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아주 독특한 사유 체계를 가졌습니다. 초기엔 상당히 냉철한 과학철학 저서를 발표했는데, 사실상 현대 인식론의 태두라고까지 불리면서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고, 존경(?)까지 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학부때 바슐라르의 주저 <부정의 철학>이란 책을 처음 봤는데, 그 유명한 '인식의 단절'이란 개념을 읽으면서 거의 '전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바슐라르 주장은 과학의 역사는 연속적이지 않고 일련의 불연속적인 문제들의 집합이며, 과거의 지식은 오류로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발견을 가로 막는 완고한 인식론적 장애물로도 곧잘 작용한다는 전제에서 전개된다 할 수 있습니다. 바슐라르를 조금이나마 읽고나니까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구조> 에서 제시한 '과학의 불연속적인 발전' 이 아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규정 및 통사론적인 논의, 'normal science'에 대한 중요성 부각및 인정 등을 제외하곤 기본 모티브와 과학적 발견에 존재하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영향 등등은 거의 바슐라르 주장의 반복에 지나지 않더군요. 아마도 바슐라르가 아닌 쿤이 과학철학의 논쟁에서 핵심인물로 자리 잡은 건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다의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과학에 관한 폄하적인 느낌을 더 강하게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미 철학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인식론=과학사의 철학적 이해' 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슐라르가 프랑스 철학에 끼친 영향 또한 엄청납니다. 헤겔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적대적 반대자로서의 들뢰즈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듯이, 바슐라르에 관한 선행 지식 및 이해가 없으면 미셀 푸코의 저서는 거의 독해가 불가능합니다. 바슐라르 -> 깡길렘 ->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발전 계보는 프랑스 철학을 얘기할때 곧잘 나오는 말이지요. 이런 철학계의 거물이 상당히 풍부한 문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사실 그의 저서 제목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불의 정신 분석>이나, <물과 꿈>, 앞에서 언급된 <초의 불꽃>등은 왠지 야리꾸리(?)한게 신비적인 냄새를 풍깁니다만 바슐라르의 과학사에 관한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주시해야 합니다. 과학 지식을 가능케한 냉철한 이성의 세계와 감수성이나 상상력의 세계와의 관계나 상호간의 개입 가능성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개인의 독특한 경험이나 감성이 객관적 지식 의 발견에 작용할 수 있는 메카니즘에 관한 연구라고 해야할지, 암튼 그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와 '시인'의 정신 세계에 관한 정교한 분석과 평론 역시 아주 탁월합니다. 그러니 꼭 그의 기본 전제로 부터 일관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관점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문학적인 관심만을 가질만한 가치도 충분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 괜히 긴 글을 써버렸습니다만, Xorn님이 바슐라르를 인용하시길래 오해도 풀겸해서 좀 덧붙여봤습니다. 그냥 신비주의자로 취급해버리긴 아까운 사람이라서요. :) 제가 바슐라르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게 많았거든요. 그의 <부정의 철학>엔가 보면 과학의 변증법적 활동을 정의하면서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진리는 토론의 딸이지, 호감의 딸이 아니다." ^^^^^^^^^^^^^^^^^^^^^^^^^^^^^^^^^^^^^^^^^^ - 제가 평생에 걸쳐서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노력하는 말입니다. 잘 안되긴 하지만요... *** *** * 잡담 limelite님 글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일주일동안 부산 출장을 갔다와 보니 읽을 글들이 꽤 쌓였네요. 특히 개신교 보드는 좀 시끄러워졌네요. :) 회사 보안때문에 창문도 없고, 답답한 자체 네트웍망만 있는 곳에서 밤샘 작업을 했는데, 키즈 생각이 가끔 나더군요. 예전엔 몇달씩 안들어와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제 저도 서서히 정이 들긴 하나봅니다. 중독안되게 조심해야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