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limelite (가 맞음...) 날 짜 (Date): 1999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05시 20분 52초 제 목(Title): Re: limelite님께... 접는 글. 포로리님에 대한 제 평가에 대해서 억울하다 비슷한 하소연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적을까 하다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관두고, 저도 포로리님의 답글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는 것을 아시면 어떨까요? ^^ 혼란을 막기 위한 확인 수준에서 하는 질문이니 앞에서 설명했다면 간략하게 예/아니오 정도로 대답하면서 앞의 이러이러한 부분을 참조하라고 알려주시면 될 거라고 생각한 내용까지 다시 일일히 적으면서, 거기서 더 나아간 이야기까지... 거기다 제가, 그쪽 이야기가 빨리 정리되고 빨리 이쪽으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제가 왜 앞글처럼 생각했는지 판단에 도움이 되실라나요? > >어떤 경우에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던가요? 이 시점에서 궁금하지 > >않을 수 없군요. > > 끝내는 마당이니, 말씀 드리죠. 호기심이 무척 많으시네요 ^^ 하여튼 그 결과로 아래처럼, 기독보드이 처음 포로리님의 글부터 제가 의문을 품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약간 발전된 형태로 들을 수 있게 되었군요. > "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 나는 왜 눈물을 > 흘리는가? 나는 그의 자청한 죽음으로 인해서 내가 부수적으로 > 얻게 될지 모르는 '유익함' 에 대한 기대 때문에 즐거움의 >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합리적으로 전혀 설명하고 > 싶지 않은 그의 지극한 인간적인 '선'의 행위에 감동했을 뿐이다." > > "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이 강간 또는 폭행을 당했을 때 > 어떤 감정을 가질 것인가? 나는 그 가해자에 대해 사회적 > 바람직성 공유에 관한 경험 축적이 미숙했던 비정상적 > 사회인의 행위 - 정도라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 용서할 수 있겠나? 나는 평생 그렇게 못할 것 같다. > 그것은 절대 있지 말아야 했던 '악'이었을 뿐이다 " 그래서, 전체적인 포로리님의 의견을 정리한 문장이 아래가 될 것 같은데요. > 진리에 관한 인식 또는 확신은 합리적인 설명 이상의 무엇이 >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책에서 > 얻는 논리적 합리적 주장,과학적 설명을 무시 하는게 전혀 아니란 걸 > limelite님, 잘 아시죠 ? ^^; 글쎄요. 개인적으로 구태여 믿겠다는데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만, 무시는 않지만 상반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시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차이가 많다고 볼 수도 적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적다는 쪽으로 보입니다. > 저의 인식 주관 밖에 존재하는 객관세계를 limelite님은 >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혹시 맑스나 레닌의 책들을 보면서 > 확신을 강화 시키십니까? > > 저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같은 책들 따위보다는 > 가끔 힘들 때마다 찾게 되는 새벽녂 청량리 시장에서 분주하게 >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더 확신을 > 갖게 되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정말 관념론 같은 것은 > 누구 말마따나 '개풀 뜯어먹는 소리' 밖에 안되는거죠. 유물론이나 새벽녂 청량리 사람들이나 그게 그겁니다. 유물론에 대해서 혹 어떤 편견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많은 유물론자들은 그런 삶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지하며 그 의식의 건강성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관념론이 이런 사람들의 건강한 삶과 세계관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또 경계합니다. 전에 순진과 순수의 차이를 오염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을 봤는데, 비슷하게 이들의 (비교적) 맑고 건강하지만 순진한 세계관은 그만큼 바람직하지 못한 관념론에 쉽게 물들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관념론이니 뭐니에 의식이 없는 저런 사람들이 쉽게 무지한 관념론적 세계관에 현혹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또,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판단의 가치와 한계에 대해서는, 특히 저의 경우 그 동안 적은 제 글들을 혹 보시면 그런 일상적인 판단의 근거들을 찾으면서 무시하기 보다는 정당성과 한계를 가르는 쪽을 더 바람직하게 여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최근에 실제로 이런 생각을 보인 곳이, 기독보드에서 화이트헤드와 어거 스틴 어떻고 했던 한신대 교수님의 글에 대해, 제가 일상적인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너무 부정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적은 글입니다. 객관세계의 확신에 대해서는... 객관세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세계관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서 제가 충분히 알고 있음을 더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경험의 요구에 충실하다면 객관세계에 대한 확신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청량리 시장 사람들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객관세계 속의 삶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경험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상적인 생각에 회의를 가지면서 길을 잘못들면 쓸모없는 관념론에 빠지게 된다고 말씀드리면, 저 역시 일상적인 경험에 대한 무분별한 부정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보일 수 있겠군요. 관념론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이 이 경험의 요구와 대치된다는 점을 공격 포인트로 잡고 있지요. 저도 처음에는 객관세계의 확신이 이런 공격을 계속하면 관념론을 (논리적 등으로)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얻어 객관세계를 입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질 정도 였습니다만, 이 보드에 처음 제가 어슬렁거리는 무렵 버클리 류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난(비판 정도가 아님)하다가 경험의 요구를 통한 입증이 설득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완벽한 입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이게 그 때는 뉴튼 역학 시대에 미시적 세계로 내려가면 갈수록 확실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믿다가 양자 세계에 이르러 불확실성을 보고 놀랐던 20세기 초 과학계의 충격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음...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면서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군요. 그래서, 객관세계를 입증하는 것은 포기하고, 객관세계를 경험의 요구와 그것을 받아들을 때 발생하는 설득력과 같은 유용성을 인정 하자는 식으로 발전했지요. 그렇게 봤더니 유용성의 관점에서 버클리 류의 주관적 관념론은 경험의 요구에 대해 정말 쓸모 없는 생각이더라 고요. 그래서, 새로운 해석에 만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보시면 경험의 요구 인정과 유용성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 보드 처음 "포로리님에게... 2"라는 글에서 선악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벌서 비슷하게 이야기했는데요. 포로리님은 당시 저의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 제가 앞으로 이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면 그런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라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시면 좋겠 네요. 그래서 정리하면, 저는 객관세계에 대한 확신을 경험의 요구에 충실할 때 객관세계를 이용한 경험의 설명은 대단히 높은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직관주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특히 직관의 발생 근거의 이해에 대해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점과 대안을 지적해 본 것인데요. 열심히 적고보니, 포로리님은 이런 내용은 언제라도 수긍할 준비가 되었으니 토론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 같군요. 그냥 적은 글이니 참고로 읽어보세요. 또 논리적 맥락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물론 언제든지 지적 환영합니다. 지적한 글의 길이 등을 가지고 성의도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 ********** 위(전태일 평전 감동. 폭행에 대한 혐오를 적은 부분)와 같은 류의 직관주의에 대해서는 일단 그 '직관'의 특히 발생 근거에 대한 모호한 인식이 한계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른 직관을 가지는 경우도 많이 때문에 상대주의적 선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단지 직관에 의존하는 선악관이 역사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듯이(신분제 등등과 관련해서 특히 봉건적 인식의 오류로 많이 지적 되었는데, 자신의 직관을 반하는 것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해서 문제를 만듦. 예를 들어 흑인이나 노예나 천민이나 문둥이나 혼자 떨어져서 사는 마녀같은 여자는 나쁘다는 식) 합리적이지 못한 선악 구분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직관의 발생 근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볼 만한 뉴스가 최근에 있었는데요. 들으신 적이 있으시겠지만, 미국에서 어린 시절부터 헤어져 살던 두 쌍동이가 몇 십년만에 만나면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우연히 그 선물이 같았던 것입니다. 이것도 어느 날 신문에 "It's a fake!"하고 한 지면을 장식할 사건인지도 모릅니다만, 최근에 유전자가 사람의 성격의 세세한 부분까지 결정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갔던 것입니다. 두 쌍동이에게 같은 선물을 고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시 직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쌍동이라는 점이 그 직관에 대한 유전자 영향력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한편, 미국의 어떤 교육학자는 부모의 영향력보다 유전자와 친구 관계를 아이의 성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삼기까지 할 정도기도 하고요.(이에 찬성하느냐 마느냐는 일단 논외로) 이런 유전자 영향설은, 부모와 자식간의 외모와 성격이 종종 후천적 환경과 학습에 의해서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닮았다"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잘 설명해 주면서, 유전자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충분한 것입니다. 왜 선악에 대한 직관에 대해서 유전자 영향설을 끄집어 내느냐, 그것은 그런 직관의 일부가 선천적 본능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보드에도 방금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학습 및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적고보니까 그 글이 그렇게 아귀가 딱딱 맞는 글이 아니었습니다만,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일종의 직관이라고 보면, 그 직관이 선천적 본능+후천적 학습과 선택에 의해 얻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살인 어찌고 그 글 근처에 zeo님에 대한 답글이 있는데, 거기서 저는 생물에게 때로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였고, 살인 어찌고 글에서 인간이 본능 외의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으로 전태일 열사의 행동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입니다. 포로리님이 관심있어 하시는 전태일 열사에 대한 감동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감동과 비슷하게, 막연히 아름다움과 선에 감동하는 마음이 존재한다기 보다 주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음악에 대한 감이 형성되지 않는 어린이들에게는, 어른에게 직관적 으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게 하고 가슴이 저미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거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요. 비슷하게 저는 만약 포로리님이 다섯살 때 전태일 평전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섯살 때의 우리도 분명히 동생이나 친구가 다쳐서 우는 것에 같이 울기도 하고, 아끼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부서졌을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과연 전태일 열사의 선에 대해서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저는 다섯살 때의 눈물은 아무래도 본능적 요구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다 큰 어른의 전태일 열사에 대한 감동은 그런 본능적 요구를 기본 바탕으로 후천적 학습을 통해 확대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때문에 그런 감정과 직관들이 합리적인 설명 너머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누군가 말솜씨가 좋아서 어린이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삶을 자신의 삶과 동격화시켜 빨려들게 만들고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아이들 자신 혹은 아끼던 그 무엇의 죽음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눈물이 포로리님이 말씀 하시고자 했던 선에 대한 직관과 연결짓기는 힘들다는 것은 잘 아시 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이 선악 구분에 대한 씨앗(영어로는 seed라고 할까요?) 같은 것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왔으며, 이 씨앗이 후천적으로 성장해서 선악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에서 특히 선천적 씨앗 부분은 제가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시사하는 근거들을 많이 보일 수는 있습니다. 많은 동물들이 가족 특히 새끼에게 이타심을 발휘하는 본능적 행동을 합니다. 이런 동물들의 가족에 대한 본능적 이타심의 발생 근거는 뭘까요? 가족에 대한 당연한 이타심은 인간의 도덕관 및 선악관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 많은 동물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며, 그런 동물 집단에서 우리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강제되는 도덕이나 규율 법 같은 것의 원초적 형태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또 많은 선악 구분 및 도덕률이 만듭니다. 그럼, 인간만해도 사회 생활에 적합한 성격이다 아니다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성격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또 그럼, 사회 생활하는 동물들이 사회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단지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일까요? 가족 생활은 하지만, 사회 생활은 거부하는 동물은 또 왜 그럴까요? 동성애적 성향도 유전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데, 사회 생활을 지향하는 성향도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 아닐까요? 이런 등등이 선천적 씨앗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만, 제가 한편으로 후천적 학습에 의해 이들 동물의 사회생활 성향 같은 것을 상당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제 지식 으로는 유전적으로 결정된 동성애적 성향을 후천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식의 근거를 접하기 전까지는, 단지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데만 그치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선악 구분에 대한 선천적 씨앗이 있다는 것이 선악 관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의 반론이 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는데요. 이런 반론은, 선천적 요구의 내용이 비슷할 수는 있어도 개개 인간에게 있어 다르게 나타나며(마치 인간 얼굴이 비슷하면서도 각각 특징이 다른 것처럼), 인간이 후천적으로 선천적 요구에 위배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하고,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이나 지적 생물에게까지 범위를 확대시켜 생각해 보면, 쉽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범위 확대의 예를 들면, 1만년전의 호랑이에게는 아무 인간이나 되는대로 잡아 먹는 것이 어떤 악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잡혀 먹은 인간의 가족에게는 엄청난 악이었 겠지만요.(지금의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악이 될 수도 있음. 잡아먹었다가는 이미 월등히 발전해 버린 인간 들에게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되니까) 비슷하게 영화에서나 보던 alien이 지구에 와서 인간을 동물 실험도구로 마구 사용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악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찔리는 일을 너무 많이 했지요. 그리고, 직관이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떠오른다"고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여러 철학자들 등에게 신비감을 주었는데요. 예를 들면 아래처럼요. > 칼 포퍼의 '나는 철학을 어떻게 보는가'란 글에 보면, > > " 만일 내가 울고 있는 어린애를 달래려고 할 경우에 나는 > 짜증나는 (나의 또는 당신의) 지각들을 멈추기를 바라는 것이 >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애의 행동을 변화 시키기를 >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의 뺨에 흐르는 물방울을 정지시키고 >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 내가 어린애를 달래려고 했던 동기는 그와는 전혀 다른, > ^^^^^^^^^^^^^^^^^^^^^^^^^^^^^^^^^^^^^^^^^^^^^^^^^^^ > 즉 증명할 수도 없고 추론할 수도 없는 인간적인(!) 것이다 " > ^^^^^^^^^^^^^^^^^^^^^^^^^^^^^^^^^^^^^^^^^^^^^^^^^^^ 직관에 대한 신비감은, 아시겠지만, 인간 신경계의 뉴럴 네트워크적 특성(표현이 적합한가? 하긴 다른 곳도 표현이 이상한 곳이 많을테니 넘어갑니다)이 알려지면서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뉴럴 네트워크의 대표적인 특성과 효율의 근거는 논리적(산술적) 계산 없이 학습결과에 따라 그대로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신경망 세포들이 유전자에 의해 본능적으로 결정되는 요소와 후천적 학습의 요소에 의해 여러 판단 결과들을 직접 도출하도록 만들어져서 인간의 직관을 형성하리라는 점을 의심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하여튼, 이런 설명에 동의하건 않건, 포로리님의 이런 직관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물론 비교적 치밀하게 꼭 그걸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방어 장치를 곳곳에 했음에도, 논리적 맥락의 헛점을 지적하기 위해 반론을 제기하는 과정의 상당히 여러 곳에서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곳이 포로리님의 기독보드 첫번째(이번 토론과 관계해서) 글이지요. 이런 직관주의에 대한 기대를 확인하면서 그 근거를 들어보고, 저의 선악관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자는 것이 제가 끝까지 질문을 한 이유입니다. 아리님하고 이야기가 이쪽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렸기 때문에 처음으로 돌린 것이기도 하고, 거기서 얼른 끝내고 이리로 왔으면 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놀라기도 한 것이고요. ^^ ********** 여기까지... 원래 글 중간에 있던 글을 뒤로 떼어냈기 때문에 끝맺음이 약간 이상하군요. 먼 길 돌아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