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 날 짜 (Date): 1996년08월15일(목) 00시25분01초 KDT 제 목(Title): 원숭이 '이모'이야기.. 라이얼 왓슨의 '생명조류'를 읽어보면 태평양에 있는 열도의 한 섬에 있는 어느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원숭이군에 대한 오랜 관찰과 연구중에 원숭이 사회에서는 너무 혁신적이고 창조적이다 할 만한 대단한 원숭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모'라고 명명된 이 원숭이는 기존에 그들 원숭이 사회가 가지 고 있던 도구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발견/발명을 해내는 것입니다. 한 예로 흙이 묻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다던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다른 원승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고.. 그의 발견 이후 이러한 행동이 주위의 원숭이 사이에 퍼져가는 내용들이 자세히 관측되었읍니다. 사람들 한테는 당연하고 보잘것 없는 행동 들이엇는지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우리가 그 옛날 수레나 증기기관을 발견한 것처럼 전에 없던 새로운 문화양식들을 창안해 나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모'를 사람으로치면 아인쉬타인이나 에디슨쯤 되는 대단한 천재였죠. 어느날 이 '이모'가 새로운 발견/발명을 해냈는데, 바로 흙속에 떨어져 뒤셖인 날알갱이 같은 음식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낱알갱이가 있는 흙덩어리를 그대로 한웅큼 들고는 물속에 넣어 손가 락 사이로 흙이 흘러가버리게 하는 것이죠. 이것도 그전까지의 어느 원숭이에게서 보이지 않던 행동으로 그의 주위에는 벌써 그의 동료들이 이를 배우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읍니다. 그때 연구원들은 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말로는 바로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한 원숭이가 100마리째가 됐을때, ('100'이라는 숫자가 실제적인 수치인지, 상징적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그곳에서 직접 그 행동을 보고 배우지 않은 섬 다른 한편의 원숭이들도 그와 같은 행위를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섬 외에 주위의 다른 섬의 원숭이들에게까지 그와같은 행동변화가 발견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어 직접적인 보고서를 만들어 알리지 못하고, 작가도 개인적인 방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이모'라는 원숭이와 이 일본열도섬에서의 원숭이 관찰 보고서는 생각보다 유명한 것인것 같습니다. 제가 이 책 외에도 이 보고서를 인용한 책들을 심심찮게 다른 곳에서 더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100마리째 원숭이란 얘긴 홧슨의 책에서만 볼 수 있었읍 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라는 책에서도 이 '이모'가 언급되고 있지만 위의 얘기는 빠져 있읍니다. 다만 '이모'의 새로운 발견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응되어 갈때 젊은 개체가 늙은 놈들 보다 이런 것을 좀더 빨리 받아들인 다는 꽤 통상적인 내용 뿐이었읍니다. 윌슨은.. '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이라는 책에서도 소개된적이 있을 만큼 그의 독특한 주장들로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동물의 모든 행동양식은 그들의 유전자의 증식을 위한 것으로 귀착할 수 있고, 나아가 나중에 인간의 사회양식까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의 제창자입니다. 그 예로 일벌들이 자신이 가지는 자식보다 여왕벌의 새로운 알들, 그들한텐 조카뻘, 에게 그토록 열심일 수 있는지 그들이 공유하게 될 유전자의 양으로 설명하고 있죠. 간단히 말해서 생물들의 모든 행동이란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좀더 많이 남기기 위한 것으로 귀착되고.. 이들의 무리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행동 까지 이 법칙에 근거한다는 상당한 '환원'주의 입니다. 서구에서도 넘 과격하다고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는 모양이더군요. 암튼, 그가 위의 이야기를 듣지를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언급하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왓슨과 월슨의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과학의 틀 안에서 가장 극단적인 두 경향을 보는 기분이었읍니다. 그리고 이만한 내용을 결국 보고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없는 상황을 보면 결국 우리가 사실을 지금의 테두리(패러다임)에 맞춰 배타적/선택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과학철학시간의 얘기가 실감되더군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 비슷한 말이 나올겁니다. 이야기 중에 잠깐잠깐씩 소개되는 무슨무슨 백과사전인가에 보면 '문화의 전파는 단지 처음 발생한 한쪽 끝에서 한쪽끝으로 천천히 전파되어 가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올라치면 여기 저기에서도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뭐 그야 소설속에 넣은 이야기 니까 어느정도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도 결론만 그렇게 쉽게 써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가 베르나르에 대해 놀란 사실은 이 외에도 백과사전에 잠깐잠깐씩 소개된 내용들.. 제가 여기저기서 흩어진 책들에서 보거나 얻은 직관들이 그대로 나와 있더군요.) 그래도 저로서는 '뭔가 한번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왠지 재현되기가 쉬운거 같다'는 말은 여러 다른 분야의 책들에 걸쳐서 어휘반복적으로 볼 수 있던 거 같습니다. 위의 예처럼 극명하지 않더라도 자연에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신의 활동분야에서 조금씩 느끼는거 같더 군요. 하지만 우리의 '과학적 선입관'으론 이야기 조차 하기에 꽤 꺼려지는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방법론은 대상을 잘게잘게 쪼개서 그 원소되는 놈의 성질을 낮낮히 밝혀내면.. 그 다음은 꽤나 풀기어려운 수학문제가 될테지만 세상의 현상이 밝혀지지라는 것입니다. 윗슨에게 그 원소되는 놈이 Gene과 그 증식욕구이겠죠. 그에 비해 최근의 새롭게 촛점이 맞춰지고 있는 부분은 '커뮤니케이션' 이란 겁니다. 이들의 문장중에 자주 언급되는 예가 대상을 델레비젼에 비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보이는 티비화면의 다양한 모습들을 텔레비젼 을 아무리 열심히 분해해 본다고 한들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연의 커뮤니케이션의 범위는 지금까지 밝혀진것만 해도 우리의 상식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최소한 우리 자신안에서도 자기 이성으로 느끼거나 그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엄청난 정보를 받아들이고 공유 하고 있음을 이미 확인되고 있읍니다. 그것이 우연이든 어떤 내적 의미의 발현이든 무엇이든 한번 만들어 지기만 한다면 - 그것이 간단한 화학물질에서 부터 유전자, 의식까지 - 이 기회를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의 진확전략 또는 그 근본적 경향에 필요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프로이트에 비해 융에 더 관심이 있는 이유는.. 그의 이론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조금 달리 해석한것 뿐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프로이트에게는 어려서의 잊혀진 경험이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융처럼 멀리 떨어진 사람의 신상의 문제를 느끼는 꿈을 꾼다거나 단지 49개 막대기를 가르는 주역(周易)점이 어떻게 실제 세계랑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융은 이것은 '동시성 원리'라고 표현했읍니다.(이게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동.. 원리랑 이름이 햇갈리던데..) 우리가 커뮤리케이션이라 하면 어떤 개체와 개체, 일종의 블랙박스들끼리 정해진 protocol에 따른 정보교환만을 생각합니다. 종 내부에서, 종과 종 사이.. 식물을 포함한 전혀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커뮤니케이션들에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는 어떤 루트가 있을지 모른다고 어느정도 기존의 틀에서 설명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융의 동시성 원리를 인용하면 그 내용은 '실제적으론 의미가 없는 대상들이 의미론적으로 관계가 있을때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이라 합니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을 동시적인 이벤트와 같이 이해해 주십시요. 물리적인 힘이 장,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입자 자신의 변환으로 그 개념이 확대되듯이 말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여자들의 집단 방료로 비가 오기를 지내는 남도의 풍습도 아주 무의미 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융의 설명으로는 이런 현상들을 이름 붙이고 표현해 냈다는 것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을 만한 내용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만한 모델은 힘이 듭니다. 그것을 차라리 우리의 방법 체제 밖에 있는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 대한 수학적 모델의 한계라고 봅니다.(데카르트가 아마 제일 처음 으로 좌표를 그리고 거기에 점을 찍어 대상을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논리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델의 논리적 완결성이 사물의 실제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보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에대해서는 달리 글을 적기로 하죠.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