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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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CH ] in KIDS
글 쓴 이(By): sochun (정 지 원)
날 짜 (Date): 1999년 5월 29일 토요일 오후 11시 38분 40초
제 목(Title): "지례에서 지곡으로"



  지금 어나니 보드에는 포항공대 이름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가벼운 농담으로 적는 사람도 많겠지만, 포항공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말한는 것에 대해서는 기분이 나쁘다.

  잠시 김호길 학장님의 추모집을 읽었는데 더우 답답할 뿐이다.

  우리학교(포항공대) 사람들 중에도 김호길 학장님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은 것 

 같아서 조금이나 더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의 일부분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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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례에서 지곡으로 "

  1985년 8월 내가 포항공과대학의 학장요원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아직 대학건립을 위한 부지 정지가 시작되지 않았을 때이고, 대학 부지 매입이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 기숙사와 지곡회관이 있는 곳에 인가가 있어 사람들이 생
 활하고 있었다.
  
  부임 후 처음으로 대학이 건립될 부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지금 대학의 후문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 '지곡교회'라는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지
 곡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몰랐고 대학의 주소가 효자동 산 31번지이기 때문에
 그저 효자동 안에 있는 지곡교회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 뒤 우연히 효자동 옆에
 지곡동이 있으며 지곡을 한자로 **이라 쓰는 것을 발견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내 고향 지례동이 당시 수몰될 예정이었
 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새로운 터전을 안동 밖에서 찾고 있었고, 나의 8대 할아버
 지이며 우리집 분파조의 호가 지곡이고 지곡은 또한 내 고향 지례의 별칭이기 때
 문이다. 고향 지례는 수몰되는데 나는 내 할아버지의 호이면서 내 고향의 별칭인
 동네에 와서 세계적 명문대학 건립의 꿈을 펴게 되었으니 우연의 일치이지만 기
 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동의 지례동은 수몰로 없어졌지만 포항시의 지곡동은
 그 후 대학부지로 바뀌어 지금 기숙사,체육관,방사광가속장치 등이 들어서 있으
 며 지곡이란 이름은 대학의 복지회관인 '지곡회관'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20여 년의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내가 영구 귀국한 것은 1983년 1월이다. 럭키금
 성의 구자경 회장이 선대 회장 구인회 씨의 호 연암을 따서 자기 고향인 진주에
 연암공과대학을 설립하기 위하여 초대 학장요원으로 나를 초빙하였다.

  나와 럭키금성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청와대 정무수석과 공보처 장관을
 지낸 유혁인 형이다. 유혁인 형은 안동중학,서울대학을 비롯한 학창시절뿐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나를 끔직이 생각해 주는 친구이다. 유 형이 1981년 여름에 버
 클리를 들렀을 때 우리집에 묵으면서 서로 지난날의 회고와 앞날을 애기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유혁인 형에게 나는 수년 내로 영구 귀국하고 싶으며 귀국하
 게 된다면 서울 생활은 내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갔으면 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는 내 15대조 청계공께서 자손들이 언제인가 그 속에 살았으면 하여 
 땅도 마련해 두신 강원도 강릉과, 또한 14대조 학봉께서 임진란 때 순국하신 경남
 진주 두 곳이라 했다. 그리고 진주와 강릉은 모두 역사적,문화적 도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 곳에 있는 대학을 발전시켜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지식인이 살 수
 있고 학문을 할 수 있는 전통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다. 또한 퇴계 선생께서 고
 향인 도산에서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사립대학이라 볼 수 있는 서원을
 지방에 많이 세워 관학보다 사학, 서울보다 지방 발전에 힘쓰셨던 일을 애기하면
 서 유혁인 형도 공부를 좀더 하여 안동으로 낙향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기도 하
 였다. 결국 이 우연한 기회에 나눈 대화가 나를 진주와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4월 초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재직시 서울의 한국개발원(KDI) 원장으로 있
 던 내 친구 김기환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전화 내용은 럭키금성그룹에서 경
 남 진주에 연암공과대학을 세우려 하는데 그 책임을 맡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원
 래 진주는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고, 신설대학의 책임자 
 란 중책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석에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학연,
 지연,혈연이 어느 하나도 럭키 금성과 관계가 없는 김기환 박사가 어떻게 알아서 
 내게 그런 중개를 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결정을 내리지 모하고 있는 가운데
 수일 후 다시 국제전화가 이번에는 유혁인 형으로부터 왔었다. 

  전화내용은 역시 진주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다. 알고 보니 유혁인 형과 당시
 럭키금성의 기조실 이현조 사장과는 서울대학 동창이고 친구간이어서 우연한 기회에
 이헌조 사장이 유혁인 형에게 연암공대 건립 계획을 얘기하고 학장 후보자 추천을
 의뢰했고, 유 형은 미국에서 나와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 나를 추천하는 동시에 관
 계에 있었던 자기보다 학계에 있는 친구 김기환 박사나 서울대학교의 조순 박사 같
 은 분이 먼저 전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논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환 형
 과 유혁인 형의 권유로 1962년 6월에 일시 귀국하여 구자경 회장, 구태희 부회장, 
 허준구 부회장 등 럭키금성의 높은 분들은 만나게 되고 드디어 진주행을 결심했었
 다. 

  진주에 럭키금성그룹과 산학협동을 이룩하는 규모는 작지만 질적으로는 국제수준
 인 공과대학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은 진주에 경상대학교라는 종합대학이 있기 문
 에 4년제 대학을 허가할 수 없다는 정부정책으로 좌절되고 대신에 연암공업전문대학
 의 인가를 받았다. 전문대 학장보다 럭키금성의 회장고문이 돼 달라는 구자경 회장
 의 제안을 사양하고 하늘이 내게 우리나라 공업전문대학 정상화의 사명을 준 것으로
 생각하고, 서울보다 진주를 선택했던 내 본래의 뜻에 따라 진주로 갔으며 초창기의
 헌신적인 교수들 그리고 직원들과 전문대학 교육에 정성을 바쳤다. 진주에 간 것은
 1984년 1월이었으며 1년 간 열심히 그리고 보람을 느끼며 일하던 중, 12월경 노스
 캐롤라이나대학 물리학과 주임교수로 있던 최상일 박사로부터 연말카드가 왔는데
 인사 가운데 혼자 진주 가서 잘 살기냐는 비난식의 말이 쓰여 있었다.

  최상일 박사의 "혼자 진주 가서 잘 살기냐"는 카드에 쓰인 그 말이 결국 나를 포
 항으로 오게 된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연말에 진주에서는 흔하지 않다는 백
 설이 캠퍼스를 덮은 가운데 홀로 학장실 창을 통하여 비학산 월출봉 등 먼 산을 바
 라보다 최상일 박사의 말이 생각나고, 동시에 대통령께 한번 옛날의 상소문과 같은
 청원서를 보낼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1월 5일에 등기우편으로 '존경하는 대통
 령 각하'로 시작하는 대학인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청와대로 보냈었다. 그러나 회
 신은 1월 20일경 청와대가 아니고 문교부에서 왔으며, 공문서 규정에 의한 대학교
 육국장 전결사항이란 도장과 함께 장병규 국장으로부터 청와대에 내가 올린 민원에
 대한 회신으로서 정부정책에 의하여 진주에 새로운 4년제 대학을 인가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옛날에는 남산 밑의 선비가 올린 상소문에도 임금이 비답을
 하는 것이 관례인데, 민주국가에서 대통령께 올린 상소문의 회신이 그 동안 수없이 
 만났던 문교부 국장에게세 보내온 데 또한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대학교육국장으로부터 회신이 있은 한 열흘 후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가 세운 학
 교법인 제철학원의 신상은 부이사장이 진주로 나를 찾아왔다. 나를 찾아오게 된 이
 유는 포철에서 포항에 공과대학을 세울 계획이고 청와대에서 벌써 내부인가가 났으
 며,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나를 찾아가 자문을 밥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애기가 있
 어서 참고로 내가 어떤 대학을 만들려 했는지 알고 싶은 게 있다고 얘기했다. 결국
 내가 청와대에 올린 상소문의 효과는 대학교육국장의 불가통보와 함께 나를 포항제
 철에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모양이다.
 
  1985년 3월경에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의 책임을 맡은 포항제철 이대고 상무이사가
 다시 진주를 방문하여 대학건설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5년
 8월 1일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포항공과대학 학장요원으로 포항에 오게 되었다.

  나의 외가가 포항에서 멀지 않은 민속촌으로 보존되고 있는 양동이기 때문에 내가
 다섯 살 대 포항을 지나갔으며, 미국에서 1976년 일시 귀국시 포항제철을 견학한 
 일이 있었지만 내가 포항에 와서 살게 될 것이란 생각을 과거에 해본 일이 없었다.
 나 하나뿐 아니고 우리 대학에 와있는 교수 2백명 중 포항에서 살게 되리라는 생각
 을 해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교수 부인 가운데는 포항에 오기 전 포항이 아산만
 이나 군산근방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사람도 있다.

  안동 지례 산촌에서 태어나 안동, 서울, 영국, 미국, 진주를 거쳐 내 생애의 마지
 막을 이제 포항에서 마치게 될 모양이다. 내 조상의 연고지로 안동을 제외하고는 
 강릉과 진주만을 생각했고, 진주에서 포항에 오기로 결정할 때는 조금 서운한 생각
 이 들었는데 대학부지가 내 고향의 별칭인 지곡동인 데서 일말의 기쁨을 가지게 되
 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많은 석학들이 나와 함께 국제수준의 대학을 만들 가능성을 제공
 한 것은 포항제철이며, 수백 명의 과학자와 미래의 과학자에게 교육과 연구의 보금
 자리를 마련해 준 포항제철의 임직원, 특히 박태준 전 회장에게 우리들은 감사하고 
 있다. 

  1986년 1월 두 번째 교수 초빙을 위하여 미국을 갔을 때의 소감을 표현한 졸작
 한시 칠언절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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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바다 얼음평원 만리길을 가는 것은 
    어진 사람 초빙하는 일이 무겁고 내몸 굽히는 것은 가볍기 때문이라

    강철을 녹일 것 같은 붉은 정성으로
    학교이름 떨칠 것을 서로 약속하나니

  이 시도 벽사 이우성 교수의 추고로 시 모양을 갖추었다. 대학이 설립된 지 이제
 겨우 만 7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고 있지만, 포항에 모인
 교수,직원,학생들과 제단 및 포철의 지원으로 삼한에 대학 이름이 떨치게 될 것은 
 지금 의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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