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penDiary ] in KIDS 글 쓴 이(By): Colly () 날 짜 (Date): 1995년09월26일(화) 18시51분02초 KDT 제 목(Title): 누구나 가슴에 소설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가슴에 소설을 가지고 있다] 가을이 온게 확실하다. 그러나 캠퍼스 가득히 넘치는 활기가 우리가 늘 말하는 가을의 고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신청했는데, 옆에서 같이 신청하던 여자 아이가 언제 고등학교를 졸업했냐는 질문에 올해라고 대답했다. 일하던 여자가 나한테도 물어봤는데 이런... 언제 졸업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라니..쿡쿡. 새로지은 건물에 월 수 금 수업이 들어있다. 새로운 건물. 새로운 강의실. 새로지어서 그런지 시설과 디자인이 무척 마던하다. 교수가 버튼을 누르면 강의실 뒷면을 가득메운 유리창위로 검은 장막이 스르르 내려온다. 그 움직임이 스무드 해서 다가오는 21세기의 대학답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던함이 UCSD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와 사랑에 나올 듯한 고풍의 버클리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물론 버클리에는 교수가 선 강단이 회전하며 강의 할 수 있는 강의실이 있지만. 내가 한국에서 대입 학력고사를 볼때였다. 우리때부터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다시 부활되었는데, 내가 시험보던 대학에 그 많은 지원자를 수용할만한 강의실이 없었던지 그때까지도 공사를 마치지 못했던 사회과학관에서 시험을 봤다. 몹시도 매서운 겨울이었다. 우황청심환을 하나 먹고 시험을 봤는데 네모 반듯하고 아무런 특징이 없던 빨간 벽돌의 건물이 마치 무슨 공장같이 느껴졌었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사로 여기저기 널려진 발판들, 비어져나온 파이프들과 그것을 감싸놓은 카시미론 솜들. 내 바로 앞에 앞에서 시험을 본애가 나랑 같은 과에 붙었었는데, 몇달뒤에 그애가 그말을 했을때 나는 그애가 그 강의실(? 공사중이었으므로 강의실이라는 표현이 이상하다)에서 같이 시험 봤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애가 웃으면서 여자들은 정말 빨리 변하는 구나 하고 말했었는데. 시험볼때의 나와 대학에서 보는 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새빌딩에서 학교안을 내려다보면 새로 생긴 산책로가 도서관에서 부터 시원하게 시야에 탁 트여 들어온다. 네개의 동그란 구멍이 있는 넓은 시멘트 비석들이 산책로를 연이어 같이 늘어서 있다. 그 구멍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망사가 쓰여져 있어서 환풍기 같은게 아닐까 추측했었다) 수업에 끝나고 우체국에 가는 길에 바닥에 거의 고개를 대다시피 하고 안을 들여다 보았었다. 비석안의 바닥에는 단지 자갈만이 가득할 뿐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아서 우습기만 했다. 맞은편 길에는 앉아서 책을 볼수 있는 빨간 철재 의자들이 가득히 새로 생겼는데, 비석위에도 아이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햄버거를 먹거나 책을 본다. 그 모습을 웃으면서 보다가 다시 비석안을 들여다 보았다. 저 자갈을 파다가 팔면 돈이라도 나오려나? 비싼가? 안에 숨겨두게? 하하하하....이런.. 자세히 보니 비어있는 천장에 현광 라잇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밤에 산책로를 나서면 아름다운 불빛이 도서관에서 늦게 나오는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편지가 와있었다. 학교 어카운트로.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이미 이별을 예고한. 좋아한다는 말을 해버려서 앞으로 아는 척하지 않는다해도 할말이 없다고.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르지 미리 잘 지내라 인사를 한다고. 그런 아이가 또 있지.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이미 단정지어 놓은 아이. 좋은 친구이기에 그 우정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애와 마주하면 좁은문이란 소설이 생각난다. 내 모습을 많이 알고 있는 듯 하지만, 그건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그러한 모습에 자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그애가 구상한 또 다른 하이아의 캐렉터는 소설의 주인공 같다. 소설을 쓰는 아이라서 그럴까? 난 시작도 안했는데 그아이 역시 이별을 먼저 시작했다. 다가오는 사람에게 미리 선을 그어두긴 하지만, 그 선이라는 것을 그어두기도 전에 나와 이별을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는 말은 항상 같다. "난 너를 좋아하는데 넌 나를 좋아하지 않을거야." 하긴 지금의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지쳐있어서 그말이 맞다고 인정하지만....아마 잠시동안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너무 열심히 타서 그런지도. 나 역시 한편의 소설을 썼다. 그리고 탈고가 끝나갈 무렵 내가 했던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설의 습작이었음을 알았다. 사랑의 습작. 사랑의 소설. 이별의 습작. 이별의 소설. 인어가 도서관에서 컴푸터 숙제를 하고 있다고 전화를 했었는데 지금 밤 2시가 넘었다. 랩이 있는 도서관은 11시 반이면 불이 꺼지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데 그렇다고 이거저거 물으면 참견이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아픈애가....정말. 내일 교수와 면담이 있다. 교수가 은근히 내게 화가 나있는거 같은데. 수업을 잘 안들어가서. 난 그 교수가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를 쓴 사람인지 몰랐었다. 오늘에서야 책을 읽다가 그 교수가 비엔남 전쟁 반대를 하다가 2년간 징역을 살았었던 것을 알았다. 전과 기록이 있는데도 하버드 법대에서 입학을 허가해주었었군. 한국의 대학도 같은 경우에 그런 학생을 받아줄까? 하버드가 명문답게 존경스러운 교수진을 가졌구나 싶다. 내일은 개스가 연결이 되어서 학교에 가기 전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