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penDiary ] in KIDS 글 쓴 이(By): birdeee (별사랑이) 날 짜 (Date): 2006년 11월 21일 화요일 오후 03시 28분 46초 제 목(Title): 최고의 엔지니어 그 분은 나의 첫 직장과 그 다음 직장의 동료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학교 석사과정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말수가 적고, 나보다 세 살이 많지만 늘 존댓말을 쓰시고 언제나 상냥하셨습니다. 나는 첫 직장에 입사하고 나서 3개월 만에 파견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같이 파견을 갔고, 그제서야 처음으로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함께 파견간 신입 사원이 코덱 프로그램을 디버깅하느라 쩔쩔매고 있다가 옆자리에 있던 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는 코딩에는 거의 생초보였지만 내가 보기에도 에러가 있을 곳이 없어 보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렇게 30분 가량을 보면서 변수 값을 이것 저것 프린트해보며 버그를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오셨습니다. "뭘 보고 있어요?" "코덱 프로그램인데요, 이런 것도 에러가 날 데가 있나요?" 그 분은 잠시 화면을 보시더니 "잠깐 고쳐봐도 되겠지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시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하셨습니다. 타이핑이라기 보다는 vi 코맨드를 사용하신 것이지만 약 10여초 동안 화면이 번쩍거렸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더니만 "이제 됐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입 사원에게 이것 저것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같은 팀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분은 완벽한 일처리를 하는 회사 최고의 엔지니어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엔지니어. 그 분의 이미지는 나에게 그렇게 각인되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머문 2년여 동안에 그 분과 함께 일할 거리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 일은 잊혀져 갔습니다. 두 번째 직장은 첫 직장의 임원 분이 만드신 회사였고, 워낙 좋은 상사였기 때문에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습니다. 사장님이 되신 그 상사께서는 누구보다도 그 최고의 엔지니어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분은 나와 함께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하고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수료를 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의 권유를 몇 차례 고사하시다가 많은 동료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합류하셨습니다. 두 번째 직장은 그다지 큰 직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 분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게 되었지만 역시 함께 일할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일하는 분야가 달랐고, 또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워낙 깔끔하게 다 해결해서 주시는 분이라서 도와드릴 것도 없고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6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인력이 많이 바뀌었고, 그 분은 개발팀장에서 CTO가 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나와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회사의 비젼과 조직 운영과 동기 부여에 대해 늘 고민하셨습니다. 말투도 조금 편한 반말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아주 상냥하고 배려가 넘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회사가 일이 너무 많아 주말이고 주중이고 구분할 수 없었는데 점차 주말에는 편히 쉬는 분위기로 바뀌었지만 가끔씩 일이 있거나 놓고 온 것이 있어서 회사에 들르면 늘 그 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쁘신가 봐요?" 라고 말씀 드리면 "아니야. 그냥 뭐 좀 볼게 있어서." 라고 답하셨습니다.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그 분은 여전히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나도 남들에게 잘 들러붙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 분은 더 그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워낙 깔끔했습니다.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성격. 말을 아끼는 성격이었습니다. 지난 6월에 그 분께 나만의 일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사장님께는 이미 말씀 드렸다고 했습니다. 퇴직 전까지는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그 분께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은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다음날 나에게 이런 저런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주셨습니다.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 마틴 가드너의 해석학 책, 크누쓰의 이산수학 책 등등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 말에 그 분이 휴직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건강검진에서 초기 위암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놀라서 당장 찾아갔는데 별 거 아니라고, 아주 초기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담배도 안 피시고 술도 안 드시는데 왜 그런 병에 걸리신 건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스트레스 받는다고 다 암에 걸리는 건 아닐 텐데. 평소에 운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8월에 수술하셨고 경과는 좋은데 암세포가 약간 번져 있어서 항암치료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셨습니다. 나는 8월말에 퇴직을 하고 나서 가끔씩 그 분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회사에 들렀을 때 뵌 적도 있는데 항암치료를 3주에 한 번씩 여섯 번 해야 한다고, 너무 오래 회사를 비워서 걱정이라고 하셨습니다. 10월 말쯤에 회사에 들렀는데 마침 그 분도 회사에 들러서 휴게실에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살이 많이 빠졌고, 머리에 두건을 쓰셨는데 요즘 운동도 하고 있고, 항암치료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더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식사도 했는데 많이 드시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지금 쓰고 있는 책을 보내주면 읽어보고 교정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리 많이 쓰시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라고 여쭈었지만 전혀 아프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파일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열흘 남짓. 그 분이 입원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입원하셨다는데 얼마 전에 너무나 밝은 안색을 보았기에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잘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머리에 통증이 심하고 근육통이 너무 심해서 굉장히 아파하시면서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시려고 신음 대신에 "아싸", "으랏차차"라고 외치고 계셨습니다. 암세포가 간, 뇌막, 척추로 번졌다고 합니다. 시각과 청각이 아주 약해져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소리로 나 왔다고 말씀 드리니까 "내가 좋아하는 *** 왔구먼.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마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저 상태인데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까 싶었습니다. 가족들 말을 들어보니 나와 만나신 지 채 일주일이 안되어서 갑작스럽게 통증이 밀려왔고 급히 병실을 찾아 입원했다고 합니다. 8월의 수술은 이미 암이 너무 많이 퍼져서 수술하기 어렵게 되어서 포기하고 화학 치료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의 강한 의지가 그 고통을 숨겼겠지만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생각에 많이 알리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젊고 건강할수록 암세포가 퍼지는 속도가 빠르고, 이 분의 경우는 그야말로 치료의 속도가 암이 퍼지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경우였습니다. 고통을 참는 모습이 너무나 괴로워서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너무 시원해. 고마워." 하시더니 이내 "그만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너무 세게 했나요?"라고 물어보니 "힘들잖아."라고 힘들게 말씀하십니다. 그날 조금 늦게까지 있으면서 가슴 아프고도 놀라웠던 것은 사람이 저런 극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정신을 놓지 않고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누군지 물어서 그 사람에게 적절한 덕담을 하셨고, 간호사가 피검사를 하든, 간병인이 손을 씻어주든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가끔씩 농담까지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절대 남에게 신세 지지 않는 성격답게 회사의 재무이사님에게는 "병원비는 내가 낸다. 꼭이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책 교정해주기로 했는데 지금은 눈이 안보여서 책을 못 봐. 미안해." 하셨습니다. 나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기에 너무 희망적인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혹시나 나를 찾지 않으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분은 누워서 눈을 감고 웃고 계셨고 껌도 씹고 계셨습니다. 조금 나아지셨다면서 반갑게 맞으셨습니다. 고통이 주기적으로 오는 것 같았지만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시면서 나의 일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셨습니다. 마음이 훨씬 놓였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통해 들어보니 의사들은 오늘 조금 좋아 보여도 나을 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암세포가 뼈까지 다 퍼져 있다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가신 동안 간병인과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었는데 간병인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해오신 분이지만 그 분처럼 극한 상황에서 저렇게 상냥하고 품위를 잃지 않으시는 분은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너무 아깝다고.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받고 오신 그 분은 다시 심한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에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 분은 이미 최대치를 넘겨 맞는 마약성 진통제에다가 수면제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너무나 고통스럽고, 맞으면 의식이 없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진통제를 맞아도 몸이 무섭게 적응하기 때문에 효과가 한 시간 정도밖에 없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무슨 꿈을 꾸시는 것 같았습니다. 말씀을 하시는데 그건 일종의 잠꼬대였습니다. 그날 병원에서 밤을 샜는데 그 동안 꿈의 내용이 열 번 정도 바뀌었습니다. "문제가 너무 어려워." "이거라도 마셔야 살아." "출애굽기 (그 분은 종교가 없으십니다.)" "올 아이피" "그래디언트" "..." 꿈속에서 무슨 문제를 푸시는 지 알면 도와드릴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잠자는 동안이라도 쉴 수 있다면 모르지만 끊임없는 고통은 여전해 보였고 꿈도 악몽 가운데 악몽인지 계속해서 소리치면서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번 정도 잠에서 깨셨는데 그 때는 정말 육체적인 고통이 온 몸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갑자기 정신이 돌아오시는지 "누구야?" "접니다. ***이에요." "아... ***.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리고는 다시 고통... 진통제... 잠... 악몽... "너무 끔찍해." 그 것이 그날 제가 들은 마지막으로 의식이 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아프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싶어서 원망스럽고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그 분은 누구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계속해서 "으랏차차"라고 소리쳤습니다. 자주 오늘 무슨 요일이냐, 몇시냐 라고 물으셨는데 그 것은 방사선 치료 시간을 체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말에는 방사선 치료가 없고, 나머지 한 번 남은 방사선 치료를 마치면 고통이 없어질까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이 방사선 치료가 효과가 없을 것을 알고 있고, 꼼짝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받기 싫어하셔서 가족이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고통이 없어진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월요일에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되어 있는데 그런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질 리가 없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새벽에 목과 관자놀이 부분을 계속 마사지했는데 그러다가 15분 정도 거의 신음 없이 주무셨습니다. 그 때 든 생각이 이젠 더 이상 고통스러워 하지 마시고 편안히 돌아가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도 더 이상 사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실 텐데 차마 어머님과, 아직 젊은 아내와, 열 살도 안된 아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실 수는 없었나 봅니다. 죽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속내를 숨기는 사람은 죽기 전에라도 결국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도 다 못하고 죽을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의식이 있을 때라도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셨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단 15분이라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게 도와드렸다는 것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거의 30분 정도를 주무셨고 깨어나시고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젠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고,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끔찍한 고통만 남아 있을 텐데 차라리 편히 쉬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가슴만 너무 아프고. 하지만 사무실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급히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영안실로 모시기 전이었고, 병실에서 누워 계셨습니다. 조용히.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세상 살면서 남들에게 피해 입히지도 않고 혼자 고민을 삭이면서 살아왔고, 밤낮 없이 일하시고, 고민하시고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는 최악의 고통을 받으시고 그리고는 이제는 고통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찾아오신 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 그 착한 사람이. 그 뛰어난 사람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안 것이지만 그 분은 집안일도 거의 모두 맡아서 처리하셨고, 잠시 쉬는 시간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과 보내셨습니다. 아들에게는 최고의 아빠. 직장 동료에게는 최고의 동료였습니다. 부인이 10여 년간 운전을 해 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집안 일을 모두 챙기셨습니다. 그만큼 그 분은 완벽한 가장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누구에게도 욕먹을 일 없고 칭찬 받는 삶의 종말이 불과 마흔 살의 시간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억울해 하셨는지 조차도 모르겠습니다. ------------- 그렇게 그 분이 가시고 나서 또 이주일. 아직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뭔가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그나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분의 뒷모습을 정리해 봅니다. 또 하나의 맑고 외로운 삶이 마감되었고 나는 나의 가장 강력한 응원군 가운데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