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쓴 이(By): sbison (M.BISON) 날 짜 (Date): 1993년06월17일(목) 14시20분57초 KST 제 목(Title): 위대한 음악가들 - 헨델 4 * 편집끝. .......................................................................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짜하우의 교수법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제적이었다. 그는 헨델에게 정규적인 연습과 더불어 매주 모텟이나 칸타타를 하나씩 완성하도록 했다. 그작품들은 처음에는 조야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 젊은 음악가에게 심혈을 기울여 꾸준히 작곡하는 습관을 붙여주었다. 헨델은 근대 음악사에서 가장 부지런한 작곡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가장 속도 빠른 작곡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일을 맡아도 신속하고 만족스럽게 끝냈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적에 짜하우에게 촌각이라도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난 그가 그렇게 재빠르고 출중나게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칠 줄 모르고 샘솟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샘은 놀랍도록 어린 나이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열 한 살에 두 개의 오보와 하나의 바순을 위한 소나타를 여섯개나 작곡해 냈다. 그 악기들은 그가 어릴 적에 가장 좋아했던 악기였다. 후날 이들 소년기의 소나타들이 발견되어 그에게 보여 졌을 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예, 그때는 정말 악마처럼 작곡에 몰두했었읍니다." 그러난 작곡은 그의 시간의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 시간에 헨델은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 그리고 오보와 오르간의 연주를 익혔다. (바이송 입이 벌어진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를 "존경받는" 시민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정규 학교에 보내서 단조로운 세상의 "좀더 분별있는" 과목들을 배우게 했다. 그가 자기 천재성의 시적 꿈과 아버지가 갈망하는 무미 건조한 현실과의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아버지가 사망했다(1697. 2. 11) 헨델은 이제 자신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잠시 선친의 손이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루터란 김나지움에서 5년간 수학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열 일곱 살에 할레 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불과 일 년을 다니다 말았다. 그의 핏속에는 음악의 소명이 너무도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학기 중에 짬을 내어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인 크리스토프 레포린의 결근을 종종 "메꾸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포린이 직무 태만으로 해고당했을 때 헨델은 그 자리를 맡지 않겠냐는 제의를 수락했다. 레포린의 이전까지 그자리의 급료는 잠자리를 제공하고 일 년에 15달러였다. 헨델의 전기작가 중의 한 사람인 크리산더가 지적했듯이, 레포린의 선임자들은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헨델이 취임했을 때 급료는 37 달러 50 센트로 상당히 인상되었지만 배고픔을 면하기에는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헨델은 자신의 천재성 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처지는 아니었다. 선친이 그에게 살아가기에 충분한 재산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열 여덟 살의 이 젊은 음악가는 할레에서 손꼽히는 오르간 주자가 되고, 수백의 칸타타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나 헨델은 지역적인 명성이나 소년기의 작품들에 마족하지 않았다. 천재성의 날개를 할레에서 성공적으로 펼친 그는 좀 더 넓은 세계로 비상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1703년 여름), 고향을 떠나 함부르크로 향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