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쓴 이(By): sbison (M.BISON) 날 짜 (Date): 1993년06월11일(금) 15시04분33초 KST 제 목(Title): 위대한 음악가들 - 헨델 2 편집 끝...... - 바이송. .....................................................................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유명한 색슨인"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은 신분을 숨기고 여행하며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를 좋아했다. 베니스를 방문했을 때 (1707) 가 겨우 스물 두살이었지만, 그는 이미 비범한 천재성을 지닌 음악가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바하와는 달리 그는 매우 비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게오르그 헤델은 색스니 지방의 아우구스투스 공에게 고용된 이발사였다. 그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1665년에는 할레에 호사스런 집을 살 수 있었다. ( 지명이름이 좀 야함.) 그는 결혼을 두번 했는데 첫번째 부인은 어느 이발사의 마망인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목사의 딸이었다. 첫째 부인은 열 살 연상이었는데 여섯 아이를 낳았고, 삼십년 아래인 둘째 부인은 네 아이를 낳았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는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둘째 아이였다. 그가 1685년 2월 23일 월요일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예순 세 살 이었고 어머니는 겨우 서른 셋이었다. (바이손 충격 받음.) 게오르그 프리드리히는 어렸을 때부터 젊은 마음에 어른스런 지혜를 갖우었다고 칭찬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음악을 향한 그의 인생 행로에는 장애물이 없지 않았다. 중산적 직업에서 크게 성공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장사나 전문직을 갖게 하려고 열심이었다. 그는 어린 게오르그를 이발사나 변호사로, 음악가만 아니라면 무었으로라도 키우려 했다. 당시의 음악가들이란 하인들보다도 낮은 지위의 방랑자 계급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지적대로, 독일의 모든 하인들이 고용의 안정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방랑 음악가들은 독일의 빈민굴 에서 굼주리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실제로 독일의 직업음악가의 수효는 적었다. 당시의 몇몇 지도적 대가들, 쿠우나우, 로젠 뮐러, 쉿츠 같은 사람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법률을 다루었고 작곡은 단순한 취미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클래비코드의 건반이나 두들기며 허송 세월을 하느니 면도칼 다루는 법이나 소송 서류 작성법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그 잊혀진 조상에서 비롯되어 그의 미지의 혈관속으로 흐르던 음악의 씨앗이 헨델의 가슴에 와 닿았고, 거기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여섯살 난 어린 소년이 작은 클래비코드를 아버지의 넓은 다락방에 멀래 숨겨 놓았다. 그리고는 밤이면 식구들이 잠든 동안 그 악기를 연습하기 위해 다락방으러ㅗ 숨어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이 "별 볼일 없는 장사"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어린 그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 버리겠다고 협박햐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헨델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욕망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그의 예민한 귓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끊임없는 음악의 물결에 의해 이 욕망은 부풀어 올랐다. 매일 저녁 성모 마리아 성당의 탑에서는 합창대가 노래를 불렀다. 일요일 예배 때는 칸타타의 공연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할레의 거리에서는 교회 성가대와 마을 음악가들의 신곡 발표회가 일 주일 마다 개최되었다. ..................................................................... 불굴의 헨델...... 불굴의 바이손....... 키즈가 마시 감에도 불구하고 열나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