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쓴 이(By): sbison (노성수) 날 짜 (Date): 1993년06월08일(화) 14시46분38초 KST 제 목(Title): 위대한 음악가들 - 요한 세바스챤 바하 마� * 편집 끝 * ................................................................ 요한 세바스챤 바하(흐) - 그 마지막. ................................................................ 예순 다섯 해의 무게에 짓눌려 그의 몸은 노쇠해지고, 눈은 희미해졌으며, 허리는 굽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또 다른 합창곡과 협주곡과 푸가가 완성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시력을 거의 잃었다. 그의 음악은 누군가가 받아 적어야만 했다. "심연을 빠져나와 당신의 품으로 갑니다." 마지막 외침, 그리고는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는 만족했다. 그는 훌륭한 일을 했었다. 서른� 여덟에 그의 창작력은 절정에 달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묘사한 악극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을 작곡했다. 에스킬루스 이전에도 민속 가무단에 의한 희랍 비극이 존재했듯이, 바하이전에도 수난곡은 단순한 성가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하는, 에스킬루스처럼, 이런 이질절이고 민속적인 전통을 동질적이고 개인적인 예술 형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인 폴란드의 왕에게 봉헌한 장엄한 'B단조 미사곡' 에서 볼수 있듯이, 그는 분명히 음악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겼다. 그는 오르간곡, 전주곡, 푸가 그리고 관현악과 성악을 위한 칸타타 및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200 여 곡이나 작곡하였다. 그의 음악은 그의 성품처럼 강인하고 겸허하고 경건하였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향해, 기울어지는 해를 향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처럼 순수 하였다. (음 목소리 좀 깔고... 흠흠... 바이손이 주로 느낀것은 후자임.) 그리고 이제는, 평온한 낮은 지나고, 평온한 밤이었다. 그는 중풍 발작으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성 요한 교회의 경내에 묻혔고, 죽은 후에도 백년 이상은 잊혀질 운명이었다. '라이프찌히'신문은 다음과 같이 짤막한 사망 기사를 실었다. '7월 28일 오후 8시, 폴란드 왕 폐하의 작곡가이고, 고덴 궁과 바이센펠스궁의 악장이며, 성 토머스 학교의 지휘자 겸 선창자인 요한 세바스챤 바하 선생 별세.' 그것이 전부였다. 지방 의회에서는 가볍게 이런 유감의 뜻을 표했다. "바하 선생은 분명코 위대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우리는 음악가가 아니라 학교 선생을 원했었다." 많은 가족을 떠맡은 그의 미망인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저축을 다 써버렸다. 그녀는 공공 구휼 제도의 수혜 대상이 되었고, 죽어서는 극빈자 묘지에 묻혔다. 바하의 악보들은 성 요한 교회의 제구실 선반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신학교의 학생들은 소풍용 샌드위치를 쌀 종이가 필요할 때면 선반으로 가서 그것을 찢어가곤 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 그 불후의 5번 교향곡을 작곡하는 동안 바하의 마지막 남은 딸은 가난과 싸우고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분께서는 너무 겸손하시어 당신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하셨다네" 바하를 숭앙하는 제자 한 사람이 스승의 무덤에서 동료에게 말했다. "세상이 이분을 인정하려면 아마 수세기가 걸릴 것일세." ........................................................... 이상으로 위대한 '음악가들 - 요한 세바스챤 바하' 편을� 모두 마칩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음악감상이나 교양 및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아울러, 비발디님, 제토벤님 그리고 루시펴님께도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다음에는 헨델편이 연재됩니다. ............. 바이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