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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T ] in KIDS
글 쓴 이(By): Charles ()
날 짜 (Date): 1998년01월10일(토) 07시33분42초 ROK
제 목(Title):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 홍성욱씨


[MX]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 홍성욱씨

  -‘실력’으로 뛰어넘은 부족한 ‘서울대 학벌’- 

                 자리는 하나. 경쟁자는 수백명. 거르고 가려 마지막 3명이 남았다.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 미국 하버드 출신, 그리고 서울대 출신의
                 홍성욱씨(36). 

                 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수임용. 막판 경쟁은 치열했다. 선출에 나선
                 학장들도 머뭇거리는 듯했다. 「학벌」로 보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나 하버드에 비하면 서울대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들어보는 학교다. 학생신분이 의심스러우니 재학증명서를
                 보내달라」던 것이 그곳에서의 서울대 위상. 나무랄 데 없다고
                 믿었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동대학원 과학사 박사과정」은
                 허상이었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든 싸움. 그러나 학장들은 홍씨를 선택했다. 출신학교 때문에
  총장이 거부권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음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총장도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았다. 실리적인 그들은 「부족한 학벌」보다 「뛰어난
  실력」을 중시했다. 

  92년도 미국 과학사학회 「Ida and Henry Schuman Prize」 수상. 전세계 젊은 
과학사
  학도들의 것 중 최우수 논문 한 편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 1류학자가 되기 위한
  등용문과 같다. 

  19세기 말엽 영국 전기기술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다룬 것이었다. 과학과
  관련된 내용분석과 함께 논쟁이 이뤄진 사회적 배경까지 다룬 새로운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양인 최초의 수상자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요. 교수님마저 응모를
  말리셨을 정도니까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은 그의 그러한 「학문적 깊이와 사고」를 높이 사 과학사 
교수로
  임용했다. 그리고 지난해는 미국 기술사학회에서 수여하는 「IEEE Life Member's
  Prize」를 수상했다. 1년에 단 한 명의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세계적인 상. 이 
역시
  동양인으로는 첫 수상. 

  세계가 주목하는 유망한 과학사학자. 하지만 세계의 벽을 뛰어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91년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도교수를
  찾아 「방문학생」 자격으로 2년 예정의 길을 떠났다. 

  당시 서울대 김영식교수는 『국내에서는 과학사 연구분야를 지도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떠나라』고 권했다. 그만큼 과학사는 생경한 학문이었다. 서울대에 적을 
두고
  잠시 다니러 갔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후 마음이 달라졌다. 화가 치밀고 
오기가
  발동했다. 

  『국제 무대에서 우리의 학문이 그 정도로 낮게 평가되는지 몰랐습니다. 서울대
  졸업장은 부도난 어음보다 더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국제 학술무대에서 한국의 위치는 빈약하기만 했다. 
특히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흔적조차 없었다. 

  『내 스스로를 경쟁력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장벽은 언어. 마치 「지진아」처럼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질 못했다.
  81학번인 그가 대학을 다닐 당시는 한창 반미감정이 고조된 때.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수치」였던 시절이었기에 영어는 바닥이었다. 

  여유와 배짱을 가지고 처음부터 시작했다.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살며 선진화된 
그들의
  학문법을 쫓았다. 남의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작업은 「고통」 그
  자체였다. 2주에 한 번씩 지도교수를 만나 연구 주제별로 토론을 했다. 

  그런 과정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 토론도 낯설기만 했다. 꾸준히 1년간을 
공부했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상상력과 논리적 사고력과 창조성이 개발됐다. 

  현재 그는 미국 MIT 디브노과학사연구소에서 1년간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는 미국 Sloan재단의 30만달러 프로젝트 「유전자 역사」를 맡아 
했다. 

  세계의 저명한 연구소들이 그에게 연구를 맡기려고 앞다투고 있다. 캐나다 
정부에서
  우수한 교수에게 주는 연구비도 받고 있고 유학시절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최근 잠시 서울에 왔다. 한림대에서 주최한 「생명윤리 및 인간복제에 대한
  강연」을 위해서였다. 그는 매년 국내에 한글로 쓴 논문을 발표한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관계-이론으로서의 기술과 실천으로서의
  과학」(94년), 「잡종, 그 창조적 존재학」(97년), 한국과학사 학회지의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최근 과학전쟁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97년) 
등을
  펴냈다. 이제 막 움튼 국내 과학사 학도들을 위한 것이다. 

  지난 7일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갔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IMF.
  경제나 학문이나 모래로 쌓은 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대학이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취업과 실용학문에만 매달려 순수학문을 외면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 길을 간다. 세계 무대를 향해
  뒤쫓아올 후배들을 위해 앞장서 걷는다. 

  /김희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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