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Univ ] in KIDS 글 쓴 이(By): tquark (안스니스.) 날 짜 (Date): 2000년 11월 13일 월요일 오전 05시 25분 55초 제 목(Title): “유럽은 약탈적인 오랑캐였다�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유럽은 약탈적인 오랑캐였다” 비유럽 문명에 용서를 비는 스칸디나비아 지식인들의 반성적 분위기 (사진/17세기 초 농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브라질 국내의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포르투갈인들) 한 사회의 정신적인 현주소를 알려면 일반적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역사에 대해서 느끼는 만족도를 보면 된다. 보통 역사에 대해서 일단 만족해하고 흡족해하고 긍정 일변도의 자세를 취하는 사회나 집단이면, 그 의식이 현재로 많이 발전되어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발전이 있으려면, 그 발전을 촉진하는 불만이 일단 있어야 하고, 그 불만의 구체적인 표출로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적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결국, 새로운 가치 건설은 구가치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가 노르웨이에서 느끼는 것은, 이곳 사회의 지식계는 자기 나라를 포함한 서양 문명의 역사에 대해서 특히 요즘에 들어와서 비판적인 재평가를 적극적으로 내리고 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노르웨이 문화의 창조성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필자로 하여금 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생들과 한국어 수업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한 재미있는 사건 때문이었다. 미·영, 공격성과 야만성의 역사 (사진/스웨덴 탐험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스벤 링드퀴스트의 저서인 <놈들을 모조리 섬멸해버려라>의 영역판(위). 아래는 저자) ‘England’의 한문 표기인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준말인 ‘영국’이라는 단어를 가르칠 때, 이 말을 직역하면 ‘영웅의 나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농담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폭소하면서 “약탈의 오명을 쓴 오랑캐들을 이렇게 좋게 불러준 것은 중국인의 대단한 포용”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예상치 않았던 반응이라 필자로서는 매우 흥미로워졌다. 이곳 학생의 생각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의 ‘아름다운 美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전보다 더 심했다. “가혹 행위로 불명예를 쓴 강도들한테서 아름다운 구석을 어디에서 찾았는가”라고 필자에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이러한 의견들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이 학생들의 눈으로는, 현재 서양권의 맹주이자 세계체제의 패권국인 미·영의 과거는 일단 무엇보다 먼저 ‘공격성’과 ‘야만성’과 ‘가혹성’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과연 학생들의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자못 궁금하였다. 이와 같은 필자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준 것은, 최근 저명한 스웨덴 탐험가· 문화비평가인 스벤 링드퀴스트(Sven Lindqvist)의 저서인 <놈들을 모조리 섬멸해버려라>의 영역판(, 1997)을 읽고 나서였다. ‘비인간’으로 간주되었던 세계의 무수한 ‘원시 종족’들을 무기와 병균으로 죽이는 것을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유럽인들의 ‘숨겨져 있는 야만성’을 폭로·단죄한 이 책과, 이 경향을 따르는 다른 많은 저서에 의해서, 스칸디나비아 지식인 사회에서는 유럽 전통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극도의 비판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위와 같은 학생의 비웃음은 오히려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링드퀴스트 논리 전개의 출발점은, 유럽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고심해왔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문화적 근원’의 수수께끼였다. 과연,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섬멸’은 유럽 문화의 공간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을까? 그리고 그 문화적 뿌리를 단순히 독일 민족의 반유대주의 전통에서만 찾아야 할까? 링드퀴스트의 대답은 “전혀 아니다”였다. 그에 따르면 ‘이민족의 과학적 섬멸’은 아직까지도 많은 유럽인들이 생각하기를 꺼리는, 근·현대 유럽 문화의 하나의 끔찍한 ‘전통’이다. 그리고 이 악습을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영토 팽창과 식민지 약탈을 해왔던 모든 ‘서방 열강’들이 공유한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서양의 일반 여론이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콩고 흑인의 학살을 같은 선상에서 보지 못한 것은, 비유럽 민족에 대한 근본적 인종 차별에서 비롯된 때문이라고 한다. 링드퀴스트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기 싫은 유럽의 ‘진짜 역사’를 복원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15, 16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이슬람 문명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중동의 국제 체제의 후진적이며 가난한 주변부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비해서는, 19세기 초반까지 경제적인 ‘약자’이기도 하였다. 그 불명예스러운 ‘아편전쟁’의 발단은, 사실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된 적자를 메우려고 중국으로의 아편 수출을 시작한 영국의 ‘외화 유출 방지책’이었다. 종교·문화교류 분야에서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의 기독교 인기보다, 영국에서의 인도 철학·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만 봐도, 유럽의 문화적 열등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명적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무사 정신을 숭상했던 유럽인들은 그들의 세계 팽창의 첫 단계부터 ‘힘’ ‘무기’, 그리고 이민족에 대한 멸시와 멸종의 전략을 내세웠다. 15세기 말 유럽의 첫 식민지가 된 대서양 카나리아 군도의 8만명 원주민들이 1세기 만에 학살·노역·전염병 으로 전원 멸종된 것이 시점이 되어, 유럽인이 발을 내디디는 곳마다 원주민의 피가 대량으로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민족에 대한 계획적 섬멸 (사진/18세기 영국이 노예를 운반하는 데 사용한 노예선의 설계도. 최소한의 공간에 당시 가장 좋은 상품인 인간을 어떻게 많이 넣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19세기 유럽인에 의한 원주민 멸종의 한 유명한 사례는, 30년밖에 걸리지 않았던 호주 태즈메이니아섬 주민들에 대한 계획적 섬멸이었다. 양을 칠 공간이 필요하다 하여, ‘동물보다 못한’ 원주민을 ‘없애기로’ 한 영국계 이주민들은, 붙잡힌 원주민들을 ‘재미로’ 생화장하거나 부인에게 남편의 주검을 어깨에 둘러메게 하고 달리기를 시키는 등 우리 상상 이상의 모든 비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짧은 기간 내에 원주민을 섬멸하는 ‘명예로운 과제’를 완성하였다. 이 교과서적인 사례는, 19세기 초반에 유럽의 무기 발달에 힘입어 유럽인의 야만성이 어느 정도까지 악질화됐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현대적 야만성’의 과학적인 표출은, ‘열등 인간’과 ‘열등 인종’의 섬멸·멸종을, ‘자연 도태’의 결과로 합리화하려는 ‘적자생존’ 위주의 사회진화론이었다. 19세기 말 사회진화론자들은, 언젠가는 ‘열등 인종’인 흑인이 완전 멸종되어 아프리카가 문화·인종적으로도 유럽의 일부가 될 것 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흑인의 멸종을 인위적으로 좀 ‘촉진’ 해도 좋다고 봤다. 왜냐하면 “열등 인간들을 섬멸하는 일이 우등 인간의 건강과 생기를 잘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건강과 재미를 위해서” 흑인과 인디언의 피를 흘리게 했던 19세기 말의 유럽인들이 20세기 중반의 파시스트로 발전되어 유대인 학살에 착수한 것은, 시간과 특수한 상황의 문제일 뿐이었다는 것이 링드퀴스트의 논리다. 남의 사악함을 따르고 싶었던 한국 지식인들 링드퀴스트의 저서와 같은 반성적인 책을 읽어 유럽인의 ‘숨겨진 야만성’에 눈을 떠 비유럽 문명들에 대해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은, 스칸디나비아 문화의 상당한 발전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문화의 문제점과 과거의 죄과들을 똑똑히 아는 것은, 의식 발달의 촉매제이며 높은 문화적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하는 필자 로서,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은 유럽과 유럽을 모방한 일본의 희생자였지만, 구한말·일제 초기의 대다수의 개화·자강파 지식인들은 오히려 삼강오륜 대신에 일본·미국을 통해서 수입된 그 사회진화론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일본의 ‘우등성’과 조선의 ‘열등성’을 들어, 일본의 침략과 조선의 멸망을 ‘자연 도태’로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익히 독립협회 지도자로만 알고 있는 초기 재미 유학생 출신 윤치호는, 미국에서 그가 목격한 흑인·인디언·중국인에 대한 폭력·멸시를 열등 인종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정당한 ‘대우’라면서 흔쾌히 합리화하였다. 그와 같은 성격의 ‘선각자’들은, 복잡한 사회진화론을 “Might is right”(힘은 곧 법이다)라는 ‘금과옥조’로 축약시켰다. 그리고 이 무섭디 무서운 원칙은 친미·친일 개화파를 사상적 시발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현대 남한 지식인의 일종의 ‘집단 무의식’이 되어, 지금까지도 남한 지배층이 신자유주의의 살인적 논리를 매우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심성적 바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화’와 ‘진보’를 꼭 동일시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링드퀴스트 말대로 사회진화론이 유럽인 특유의 야만성의 표출이라면, 남의 사악함을 따르고 싶었던 근대 한국 지식인들이 과연 ‘선각자’였을까? 그 많은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착하고 순한 면들을 고무했던 전통 문화를 용도 폐기하고, “힘은 법이다”라고 외쳐대는 것이 ‘진보’였을까? 근·현대사를 통해서 유일무이한 야만성을 발휘한 서양과 그 아류인 일본을 쫓아다니는 것을 지성과 미덕으로 알고 있는, 남한의 현대 집단 심성은 과연 건전한가? 한국 근·현대 지성사를 링드퀴스트의 눈으로 본다면, 고귀했던 문화적 이상에 대한 배신과 그로 인한 정신의 타락밖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번 잃어버린 문화적 자아를 과연 되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면에서 링드퀴스트의 책과 이에 따른 북유럽 지성인의 대대적인 반성 운동은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http://www.hani.co.kr/section-021070000/2000/021070000200011080333035.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