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oreaUniv ] in KIDS 글 쓴 이(By): taurus (Siegfried) 날 짜 (Date): 1999년 9월 21일 화요일 오전 11시 10분 55초 제 목(Title): [수필26] 레몬이 있는 방 안 레몬이 있는 방안 이영희 레몬 두 알이 숨쉬고 있다. 어스름 때의 번화가에서 사들고 온 이 과일은, 밤이 깊어서야 더욱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 낸다. 꽃향기와는 달리, 어딘지 알찬 부피를 느끼게 하는 매끄러움. 그리 진하지도 않은 대로, 여인의 지성과 같은 것을 일깨워 주는 숨결이다. 단지 레몬 두 알만의 향기로 가득히 채워지는 이 작은 방안의 의미를 헤아리다 품에 스미는 가을을 절감한다. 레몬은 운향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의 열매다. 희고 가슴이 메이도록 향그러운 오판화에 맺히는 이 실과는, 두꺼운 껍질 안에 차라리 향기만을 성숙시킨다. 같은 과의 과일인 귤이나 오렌지에 비겨 보아도, 그 과육은 도무지 빈약할뿐더러 산미가 많아 그대로는 식용하기 어렵다. 살이라곤 말뿐, 떫고 질기기만 한 모과도 향기는 탐스럽다. 그러나 달고 우아한 모과의 암향에다 대면, 레몬의 숨결은 산뜻하며 보다 감각적이다. 레몬은 그 모양과 빛깔에 있어서도 얄미웁도록 세련된 열매다. 싱겁게 둥글기만 한 과일들의 보편성을 깨뜨린, 그저 '레몬형' 이랄 수 밖에 없는 깜찍한 매무시. 어디에 놓아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언제나 그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는 순색의 노랑. 흑갈색 가구에 곁들여 품위 있고, 포도주 비 커트 글라스에 담아 매혹적이요, 새하얀 식탁보 위에서는 더없이 청순하다. 바깥 풍경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루비빛 사과가 산적된 과일 가게에서나, 파슬리, 셀러리 등 향신 채소가 쌓인 야채전에서나 레몬의 황색은 두드러져 눈을 끈다. 노랑은 '애정'의 색이라고도 하고, '예지'를 나타내는 빛깔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애정이란 욕구의 한 표현이요, 예지는 욕구의 한 결과이고 보면, 노랑색은 결국 '욕구를 대변하는 및 ' 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소력을 지닌 이 욕구의 색상. 레몬이 모든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는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기름진 삼치에 빵가루를 씌워 튀겨서 레몬즙을 뿌린다. 스스로의 향기를 주장하면서도, 감치는 생선 맛과 튀김 요리가 지닌 농후한 구미를 돋우어 주는 그 몇 방울. 협동에의 몸가짐, 그러면서도 의연히 지키는 개성의 영역..... 레몬의 생리는 배우고 싶은 양식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레몬을 통째로 얇게 썬다. 예리한 칼 끝에, 섬세한 기하문양이 피어나면 하얀 미닫이가로 물씬 향기가 확산한다. '문양'을 온톤 설탕으로 묻어 버린다. 깊은 가을밤과 함께 마시는 몇 잔의 뜨거운 레몬차를 위하여, 이 으스러지기 쉬운 '향기의 무늬'를 항아리에 고이 사로 잡아 두려는 것이다. 굵은 밀화 단추, 호흡하는 보석. '레몬'의 피부는 차다. --------------------------------------------------------------------------- ㅣ서점에서 좋은 책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ㅣ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