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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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pan ] in KIDS
글 쓴 이(By): dicom (누구맘대로)
날 짜 (Date): 1999년 2월  2일 화요일 오전 09시 11분 02초
제 목(Title): 부락차별, 몸서리쳐진다 


     일본/ 부락해방동맹 요시오카 마사토시 

(사진/ 그가 당하는 차별의 강도는 재일조선인들이 당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따돌림당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티격태격할 때면 늘 
상대방의 입에선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더러운 동네에 
사는 주제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출생지는 그를 
괴롭히며
                                 따라다녔다. 대학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선뜻 접근할 수 없었다. 
사랑을 고백하려
                                 해도 자꾸만 그 소리가 환청처럼 윙윙거렸다. 
“그 더러운
                                 동네에 사는 주제에….” 

     부락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진/ 부락차별철폐를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bll.gr.jp) 

     요시오카 마사토시(吉岡雅敏)는 마흔두살 먹은 독신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났기에 멸시를 받은 것일까. 이바라키현의 35가구밖에
     되지 않는 어느 작은 마을이 그의 출생지다. 이곳엔 주로 소작농 또는
     그나마도 찾기 힘들어 일거리가 있을 때만 불려다니는 빈농들이 모여
     산다. ‘부락’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옛날부터 천민들이 모여 살아왔던 
곳이다. 요시오카의
     굴레는 바로 이 ‘부락’출신이라는 것이다. 

     그가 결정적으로 절망한 것은 취직에 대한 불이익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의 소개로 한 출판사에 원서를 냈다. 필기시험도 보았다. 
그리고 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형식적인 면접시험이었다. 그러나 
면접을 기다리던
     그에게 한통의 불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죄송합니다만 당사의 면접시험 
결과
     불합격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면접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것도
     면접시험을 본 것처럼 꾸며서 말이다. 제출서류에 자기가 어느 곳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 면접시험을 볼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통 부락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신상서류의
     제일 상단에 ‘※’표시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현실이었죠.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부락출신임이 
호적등본에
     나타났고 취직시험 때 이를 반드시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부락출신자 차별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이러한 관행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그러나 부락출신자에 대한 
차별감정을 가진
     기업주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다. 흥신소를 통해 철두철미한 뒷조사를 한다는 
것이다. 

     청첩장 이름까지 바꿔야 했던 설움 

     몇번의 취직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요시오카는 고향에 돌아가 잠시 농사를 
짓다가 92년
     도쿄로 다시 올라왔다. ‘부락차별철폐운동’을 함께 하자는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부락해방동맹’이라는 단체의 중앙운동본부에서 
사무국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락차별철폐를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 작성 등 여론화 작업을 
펼치는 이
     단체의 역사는 1922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차별을 받던 부락사람들이 
모여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를 만들었고, 여기서 채택된 내용이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불리는 ‘수평사선언’이다. 이 정신이 오늘의 부락해방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락차별을 받는 이들의 가장 절실한 설움은 ‘결혼문제’라고 한다. “얼마 
전 같은 동네에
     살던 한 아가씨가 결혼을 하게 됐어요. 결혼 승낙까지는 어떻게든 됐지만 
문제는 아가씨의
     성(姓)이 문제가 됐습니다. 부락출신이라는 것이 바로 드러나는 
성이었거든요. 부락출신이
     아니었던 신랑 집안엔 정계 인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쪽에서 선거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며 신부쪽 성을 바꿔 청첩장을 보냈다고 해요.” 이건 그래도 잘된 편에 
속한다. 대부분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곳으로 도망가 사는 극단적인 
경우도 생긴다. 

     부락차별은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민중지배정책의 하나로 생긴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배자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농민은 무사에 다음 가는 신분으로 정해놓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낮은
     신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농민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는 농민보다
     더 낮은 천민층 부락민을 만든 것이다. 현재 일본엔 약 300만명의 
부락출신자들이 여러가지
     차별의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는 대단히 조심스러워했다. 자신의 고향 이름은 내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혹시 자신으로 인해 고향사람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일부 부락민들은
     ‘부락차별’을 비판하는 신문기사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기사 자체가
     ‘부락민’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란다. “보통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여성을 차별합니다. ‘내가 여성을 차별해야지’하는 큰 생각을 품고 하진 
않잖아요.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부락민을 
멸시하고
     차별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락해방동맹’은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 
외국인 차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반대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본래
     일본인이면서도 그와 똑같이 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21세기엔 부락출신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느냐고 물어보았다. “글쎄요. 천황제가 있는 한 계급차별이 
쉽게
     없어질까요?” 그러나 차별이 없어지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언젠가는…. 

     도쿄=정용수 통신원 

     y-jeong@hoffman.cc.sophia.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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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1999년 02월 04일 제2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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