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4일 금요일 오전 02시 36분 56초 제 목(Title): 논쟁/김영환 영어공용화론 주장 민족주의와 우리 언어의 미래 -성낙주씨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 김영환 본지 편집위원 성낙주씨가 현직 교사로서 매우 바쁜데도 불구하고 시대정신 1-2월 호에 필자의 글 <영어공용화는 사회발전의 피할 수 없는 요구이다>와 복거일씨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와 고종석씨가 [인물과 사상] 8호에 실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등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실어주신 데 대해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또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린다. 아래의 글에서 간혹 논리의 전개상 부득불 결례가 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하고 너그러이 이해하시기 바란다. 1. 민족주의의 실상과 허상 1) 민족주의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한가 성낙주씨는 민족주의를 군대나 국가권력에 비유하면서 군대나 국가권력에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없앨 수는 없으므로 그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은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듯이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로 그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군대나 국가권력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사상경향 혹은 사상정서이고 군대나 국가권력은 실체를 가진 집단 혹은 힘이다. 민족주의는 군대 내의 군국주의나 평화주의 등과 비교될 수는 있어도 군대 그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군대 내의 군국주의는 그것이 옳으면 채택하고 옳지 않으면 버리면 되는 것이지만 군대는 그것의 옳고 그르고에 무관하게 그 필요성이 존재하는 한 존속될 수밖에 없는 실체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치즘은 그것이 30년대 독일의 급속한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사람들이 이에 대해 역기능과 순기능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대나 국가권력과는 달리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상경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30년대에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지 않았다면 그처럼 빠른 발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꽤 낮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제발전이 민족주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독일민족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민족주의가 약했더라면, 그리고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대중의 잠재적 힘을 최대한 동원하는 정치지도자가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가 이처럼 빠른 발전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적인 나라라고 다 경제성장이 빠른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민족주의 성향의 나라들이 있지만 빠른 발전을 이룬 것은 우리 나라, 일본, 대만 등 극소수의 나라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주된 힘은 근면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대중과 유능한 지도자가 결합된 데서 나오는 것이지 민족주의가 주된 힘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나라에 민족주의가 아주 약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빨리 발전하진 않아도 상당히 빠른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다. 민족주의가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이점이 많았지만 해가 더 많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런 주장의 취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공감하지만 그 말 자체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침략에 나서기 전의 민족주의와 대외침략에 나선 이후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일본이 대외침략에 나선 후의 민족주의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이 대외침략에 나서기 전부터 정계 실력자였고 메이지(明治)천황으로 유명한 무쓰히토(睦仁)천황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한일합방 때까지(1912년 사망) 줄곧 일본의 천황으로서 일본의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주성(自主性)을 갖고 있으며 자주(自主)를 지향한다. 민족의 차별이나 성(性)적 차별이나 계급적 차별에 대해 이를 비판하거나 이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여 자주성을 지키려고 한다. 19세기 중엽에 중국이나 일본의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온갖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아시아의 방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 구미열강에 대한 분노와 자주의식을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별이나 불평등, 식민화에 반대하는 것과 민족주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민족주의를 가장 열렬히 반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제대로 된 양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민족적 차별이나 불평등, 식민화에 반대할 것이다. 예를 들어 레닌은 민족주의를 가장 열렬히 반대했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온 유럽에 민족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러시아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에 반쯤 미쳐 열광하고 심지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지도적 인사들조차 민족주의에 굴복해 민족주의의 변종인 '조국방어주의' 등을 내세우고 있을 때 레닌과 레닌이 지도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돌을 맞으면서까지 민족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고립무원의 투쟁을 일관되게 전개하였다.(이 하나만으로도 레닌은 단순히 천재적 혁명가일 뿐 아니라 탁월한 혁명적 인격을 가진 위대한 혁명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당시 민족적 차별이나 불평등, 식민화에 레닌처럼 투철하게 반대한 정치지도자가 있었나? 레닌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적 차별과 불평등, 식민화에 저항하는 것과 민족주의에 빠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다시 19세기의 일본으로 돌아와 보자. 당시 일본에서 서양침략세력에 맞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자주성을 지키려하고 서방인의 아시아식민지화와 민족적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당시 일본의 민족주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서방침략세력에 맞서 일본의 존엄과 위세를 사방에 펼쳐라"는 천황의 조서는 "일본의 존엄과 위세를 펼치기 위해 조선을 정복하라"는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단 말인가? 특정 시기나 특정 조건의 민족주의는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 처했을 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일본이 약소국이었을 때의 민족주의는 일본이 강대국이 되고 나서의 민족주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며 약소국이었을 때의 민족주의만 장려하고 강대국이 되고 나서의 민족주의는 그 때 가서 억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오자. 이승만 시절이나 박정희 시절의 우리 나라는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고 우리를 아는 사람도 겨우 '한국전쟁이 일어난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박정희 시절에 우리가 고속성장을 계속 했다하나 우리 나라의 경제 규모는 아직 어디에 명함을 내밀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경제면으로 보나 군사면으로 보나 이미 준강대국 혹은 강대국이다. 19세기 말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비한 일본의 국력보다 지금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비한 우리의 국력은 훨씬 능가하고 있다. 현재 이 정도의 경제 규모와 군사력 규모를 가진 나라 중에서 민족주의를 무제한으로 방치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박정희 시절에는 제 3세계권 전체가 민족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있을 때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꽤 완강한 민족주의자이긴 했지만 그 땐 그 정도 수준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 무대에서는 박정희 수준의 민족주의조차 위험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주의와 관련된 시대감각에서 70년대 수준에서 동결된 채 거의 발전하지 않고 있다. 2) 민족 단위의 삶이 보편적인 것인가 성낙주씨는 "민족, 또는 종족 단위의 삶은 인류사의 가장 보편적인 양상으로, 의식주로부터 관혼상제, 세시풍속, 언어, 예술 등 모든 것이 민족이라는 요람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꽃을 피웠다." 라고 하고 있다. 먼저 민족, 또는 종족 단위의 삶이 인류사의 가장 보편적인 양상인가를 한 번 보자. 현대국가들이 몇 개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지난 100∼200년 동안 전 세계에 민족주의의 광풍이 몰아쳤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어떤 것이 더 보편적인 것인지 자명自明하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고 고대나 중세에도 민족이나 종족 단위로 삶이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현대국가들을 먼저 살펴보자. 현재 지구상에서 1민족 1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1민족 1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나라도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 다민족국가이거나 한 민족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다. 남북아메리카나 유럽, 아프리카 등의 민족구성이 아주 복잡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이고, 비교적 민족구성이 단순하다고 하는 동아시아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 나라 주변 나라들을 보면 거의 다민족국가이다. 당장 중국만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이는 정부의 공식입장이고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많다) 구성되어 있으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몽고 등도 모두 다민족국가이다. 그 중에는 인도네시아처럼 뚜렷한 다수 민족이 없는 경우도 있고, 말레이시아(59%), 라오스(60%)처럼 다수민족의 비율이 3분의 2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다수민족의 비율이 90% 혹은 95%를 좀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화교가 적지 않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데도 화교의 비율이 0.1% 밖에 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 100배인 10%의 소수민족이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나라들 중에서 인종청소나 국가분할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는 없고 카렌족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민족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족도 없다. 이러한 극소수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해서 한국 기자들이나 가서 취재하고 우호적인 기사를 써내지, 그 밖의 나라에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카렌족 등은 동정 할만한데도 동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은 '민족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족독립'이란 정신나간 짓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작아서 불만인 동아시아 나라들인데 수백 개의 나라로 쪼개져서 어떻게 하잔 말인가? 뿐만 아니라 민족들끼리 뒤섞여 사는 지역이 워낙 많아 쪼개는 것도 힘들다. 굳이 1민족 1국가로 가자고 한다면 인종청소가 불가피하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주는 어리석은 일이다. 전세계적으로 1민족 1국가는 다수민족 비율이 99.8%를 넘는 한국과 99%를 넘는 일본 등 극소수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남북분단을 문제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외 조선족이 중국 300만, 구 소련국가들 200만, 북미 100만, 일본 70만 등 국내 거주인구의 10%를 넘기 때문에 완전한 1민족 1국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우리 나라를 1민족 1국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특수한 현상으로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중요한 기본원칙인양 이야기될 수 없다. 그 다음에 고대나 중세를 살펴보자. 고대나 중세에 삶은 대부분 가족이나 촌락 단위 혹은 부족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단위의 정치도 거의 여러 민족을 포괄하며 이루어지거나 한 민족이 여러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징기스칸 시절 민족 내부의 강한 단결력을 과시했다던 몽고족의 경우도 지난 수 천년 동안 민족 단위로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징기스칸이 몽고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이후부터 대외정복에 나설 때까지의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부족 단위로 정치가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대제국의 상층구성민족의 하나였다. 현대 몽고족의 경우도 그 3분의 2는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그 3분의 1은 몽고(몽골)라는 국가의 다수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 단위 혹은 촌락이나 도시 단위 혹은 중국에 살고 있는 몽고족은 중국이라는 국가 단위로, 몽고국(蒙古國)에 살고 있는 몽고족은 몽고라는 국가 단위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민족 단위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몽고족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민족의 역사가 그러하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동아시아 100여 민족 중에 그렇지 않은 민족은 우리 한(韓)민족과 일본족 등 극소수 몇 개 민족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수 천년 동안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왔다'며 수없이 들어온 말도 실은 사실이 아니다. 명백한 다민족국가였던 고구려와 발해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민족이 대체로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온 것은 발해가 망한 926년 이후 천 년 남짓 되는 기간이다. 그리고 고려의 영토 안에 만주족(여진족)이 살았다든지 고려의 영토 밖에 고려족(조선족)이 살았다든지 하는 증거들은 무수히 많이 있다. 조선조에서도 이런 증거는 많다. 심지어 근대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국경의 밤'은 조선 영토 안에 사는 만주족(여진족) 처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섞여 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렇게 섞여 사는 것을 민족국가를 만든다며 민족별 거주지역을 갈라 인종청소를 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이렇게 어울려 살면서 의사소통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언어가 통일되고 그래서 다시 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민족을 그 무슨 절대적인 것인 양 말해서는 안 된다. 고려나 조선의 영토 안에 살던 만주족의 후손은 조선족으로 되고 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족의 후손은 모두 만주족 혹은 다른 민족으로 되었다.(현재의 만주 조선족은 99% 이상이 1860년대 이후에 넘어간 사람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외치며 철천지 원수지간으로 피 흘리며 싸워 온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실제로는 같은 조상의 후손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중국의 그 광활한 지역에, 아랍의 그 광활한 지역에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재 아랍연맹에는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 아랍에메레이트, 레바논, 바레인, 요르단, 예멘, 모로코, 모리타니, 지부티, 수단, 소말리아, 팔레스타인 등 많은 나라들이 같은 아랍민족이라며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서경 20도에서 동경 60도까지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 있는 이 민족이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든 아랍족의 이슬람 선지자들의 침입 이전에는 최소한 수십 개의 다른 민족이었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서나 성경에 나오는 이 지역의 민족들만 해도 대단히 많다. 그런데 이들은 그 이후 이슬람교와 아랍어의 영향 아래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처럼 민족이라는 것은 유동적이며 민족 단위로 삶을 살아왔다기보다는 하나의 단위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의 민족으로 된 측면이 훨씬 강하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이라는 것은 절대 없어져서는 안 되고 민족이 없어지면 민족정기가 없어지고 민족정신이 사라져 결국 아무런 자주성도 자존심도 없는 머저리 같은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랍민족의 90% 혹은 95%에 대해 "너희는 조상의 민족이 없어졌기 때문에 민족정기도 사라지고 민족정신도 없어진 놈들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 있을까? 아랍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으면서 왜 우리 백성들에게는 민족이 없어지면 그 정기라는 것이 없어진다고 위협할까? 그 다음에 "의식주나 관혼상제, 세시풍속, 언어, 예술 등이 민족이라는 요람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꽃 피웠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주에서 이웃과의 차이만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기 힘드나 먼 곳을 보면 이것을 명확히 알 수 잇다. 고대나 중세에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던 유럽의 여러 민족들은 그들 각 민족의 의식주 차이가 아주 큰 것처럼 열성적으로 설명하지만 우리들에겐 사실 그 차이라는 게 우습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차이는 아주 적은 반면 그들 세계 내부의 보편성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던 아랍족, 페르시아족, 터키족, 쿠르드족, 파쉬툰족, 타지크족, 투르크멘족, 아제르바이잔족, 아르메니아족 등도 역시 의식주에서 그들 세계에서의 세계보편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으며 객관적으로 볼 때 차이라는 것은 대단치 않다. 관혼상제나 세시풍속이야말로 세계보편성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에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던 동아시아 100여 개 민족 중에 그 80% 이상이 관혼상제에 있어 거의 흡사하고 나머지 민족들도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 그 관혼상제의 제도나 습관이 상당히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한(韓)민족도 당연히 거의 흡사한 다수에 들어간다. 세시풍속도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대부분의 민족이 설이나 추석, 청명절, 단오절 등 전통명절을 공유하고 세배나 성묘 등 주요 풍속을 공유하고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유럽도 그렇고 동아시아도 그렇고 세계보편성이 민족성보다는 훨씬 앞선다. '동양화'나 '서양화'와 같이 그것이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 예술인가가 어떤 민족의 예술인가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언어가 민족이라는 요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꽃피었는지를 살펴보자. 언어가 민족의 핵심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것처럼 생각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랍족의 예를 다시 들어 원래부터 아랍어를 쓰던 민족을 놓고 보면 언어가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랍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나머지는 아랍어를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일 뿐 그들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어들도 라틴어를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지 자기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영어가 그들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가? 영어도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이라는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냐고 할 지 모르겠다. 이것은 억지이고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실은 그것조차 금방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다. 영어는 앵글로색슨족이라는 민족의 요람에서 태어났다기 보다는 세계보편어인 라틴어를 앵글로색슨족이 받아들여 여기에 민족어도 결합되고 해서 독자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외부에서 받아들인 언어, 특히 라틴어, 아랍어, 한어(漢語) 등 세계어 혹은 국제어를 받아들여 그대로 쓰거나 이를 변형시켜 쓰거나 이를 변형시켜 놓은 것을 또 제 3의 민족이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볼 때 민족이라는 요람 안에서 의식주, 관혼상제, 세시풍속, 언어 등이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것은 선입견에 불과하며 민족이라는 요람보다는 '세계'라는 범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측면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3) 현재의 민족분쟁에서 제국주의에 주(主)책임이 있는가 성낙주씨는 현재 대부분의 민족주의는 강대국, 혹은 제국주의에 책임이 있다면서 아프리카와 구 유고연방의 예를 들고 있다. 이것을 하나하나 보도록 하자. ① 아프리카의 예 성낙주씨는 아프리카에 대해 "서구 열강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도 위에 그어놓은 직선은 지금도 그들 나라들의 국경선이 되어 있고, 그것이야말로 더없이 어리석게 보이는 그들 종족간의 유혈극을 불러들인 원천이다. 아프리카인들도 과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저지른 업보를 오늘날 대신 치르고 있는 셈이다." 라고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그들을 개화시키려는 목적보다는 우선 탐욕이었고, 현재의 국경선이 된 식민지국경선도 그들의 편의나 이해관계나 전쟁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는 것도 명확하다. 그러나 현재의 아프리카 유혈참극의 주(主)원인을 그것으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참극에 정치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학살을 일선에서 지휘한 사람들의 반인류적, 반인륜적 대역죄를 덮어두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심을 다져온 필자로서는 도저히 참기가 힘들다. 아프리카 참극의 대표적인 예인 르완다(700만의 인구 중 100만 명 가까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됨)의 예를 보더라도 르완다의 민족구성은, 후투족이 84%, 투치족이 14% 정도로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것이 유혈참극의 원인이라면 세계의 90% 이상의 나라에서 그러한 참극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증오하고 서로 학살한다면 현대 세계에서 도대체 어떻게 삶을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르완다에서 민족주의 혹은 민족감정을 부추긴 정치인들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학살을 직접 지휘한 사람들을 어떤 명목으로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단 말인가? 그 뿐 아니라 르완다사태를 서구열강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설득력이 없다. 르완다와 브룬디(후투족 85%, 투치족 14%)는 모두 후투족과 투치족 거주지역이 서로 뒤섞여 있어 이들 민족을 다른 나라로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다른 나라로 분리되지 않은 것은 서구열강, 특히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벨기에에 책임이 없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분쟁요인은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으로서 근현대사에 등장한 서구열강에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억지로 보인다. 이 지역에는 원래 후투족이 살고 있었는데 600여 년 전에 투치족이 침입해 들어오면서 그 이후 줄곧 투치족이 후투족을 지배해왔다. 다수 민족(혹은 종족)인 후투족과 줄곧 지배적인 지위를 점해 온 투치족 사이에 갈등요인이 크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잠재적 갈등요인을 슬기롭게 풀지 못한 르완다인민이나 이러한 갈등요인을 오히려 부추긴 민족주의적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있는 것이지 서구열강에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벨기에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자치능력을 가질 때까지, 그리고 민족갈등의 요인이 약해질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노력하면서 점진적으로 독립시키지 않고 갑자기 독립시킨 데 있다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민족주의 성향의 논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며 또 벨기에의 능력의 범위에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② 구 유고 지역의 예 성낙주씨는 구 유고 지역의 분쟁을 설명하면서 "보스니아의 비극 이면에 감춰져 있는, 소련 제국주의의 탐욕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라든지 "보스니아 사태의 원죄는 소련 제국주의 파시스트들에게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난센스에 불과하다. 구 유고는 나토 밖의 국가 중에 대표적인 반소련국가이다. 구 유고는 비동맹운동에서 초기부터 지도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의 비동맹운동 지도 4개국 중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비교적 중립적(소련에 좀 더 우호적이었음)인 위치에서, 이집트는 반서방적인 성향을 기초로 했다면 구 유고는 반소련적인 성향을 기초로 하여 출발하였다. 구 유고연방은 그 해방에 있어서도 소련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고 주로 티토가 주도하는 빨치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건국 직후부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갔다. 현재의 구 유고 지역 사태에 대해 티토에게 책임을 묻거나(나는 티토에게도 주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더 이전으로 올라가 오스만투르크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짜르 시대의 재정러시아에게 책임을 묻거나 아니면 더 이전으로 올라가 십자군전쟁으로 대표되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에 책임을 묻는다면 모르지만(이 역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터키의 민족주의세력과 이와 경쟁을 벌이는 중도세력은 틈만 나면 보스니아사태에 대한 터키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며 보스니아 회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인 지원을 벌이고 보스니아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유엔평화군의 허울좋은 명목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의용군까지 보냈다. 러시아도 제정러시아 시절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며 세르비아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며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나는 제발 그들이 이 역사적 책임이라는 것을 좀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엉뚱하게 아무 관련도 없는 소련을 끄집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구 유고와 관련된 이러한 현대사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이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나무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이 정도로 덮어두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는 사실이든 모르는 사실이든 모든 책임을 무조건 강대국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습관에 대해서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필자도 역시 80년대 중반에 쓴 몇 개의 글을 통해 이러한 습관이 확산되도록 하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 구 유고 지역은 그 민족구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던 지역이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이 독립해 나간 이후의 신 유고연방(세르비아공화국과 몬테니그로공화국과 코소보 등 2개의 자치주가 있지만 신유고연방은 실질적으로 세르비아공화국이라고 보아도 좋다)만 하더라도 민족구성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991년의 신 유고연방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의 62% 정도인 650만 명 가량이 세르비안인이고 170명 가량이 알바니아인, 몬테니그로인이 60만 명, 보스니아 회교도가 30만 명, 헝가리인이 30만 명 정도이며 그밖에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등이 있다. 민족구성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분쟁이 적다는 마케도니아를 보더라도 다수민족인 마케도니아인이 65%, 알바니아인 21%, 터키인 5%, 루마니아인 3%, 세르비아인 2%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는 4분의 1 정도가 회교를 믿고 나머지는 대체로 그리스정교를 믿고 있다. 이렇게 민족구성이 복잡한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민족분쟁이 가열되면 민족들끼리 서로 갈라서는 수밖에 없고, 현재 서로 섞여 살고 있는 상태에서 갈라서기 위해서는 강제추방에 의한 인종청소든 합의추방(이것이 가능할까?)에 의한 인종청소든 학살에 의한 인종청소든 인종청소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인종청소를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지역의 민족주의를 증오하고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정치인들을 증오해야 한다.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어떤 논리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구 유고지역의 사태는 소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티토나 공산당에 책임을 돌리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티토와 공산당은 오히려 전통적 분쟁지역인 이 지역에 반세기에 걸친 평화를 가져왔다. 티토 시절의 정책과 제도에 대해 사람들은 걸핏하면 '미봉책'이니 본질적인 문제해결을 덮어두었다느니 하는데 설사 이것이 미봉책이라 하더라도 나는 지금가지 구 유고 사태와 관련해서 민족적 감정을 서로 삭이고 민족주의를 억제하고 절제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바로 이 미봉책보다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민족문제는 자꾸 들쑤시지 말고 그냥 덮어두고 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반서방주의의 기수로 자처하는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조차도 자기 나라의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그냥 덮어두고 지내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을 자꾸 들추어내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4) 이웃나라 민족주의의 추한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 모습을 보아야 한다 성낙주씨는 "일본 극우파의 계속되는 망언이나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그들의 후안무치를..." 등등을 지적하며 민족적 울분을 토했는데 실제로 일본 극우파들의 행태를 본다면 민족주의의 모습이 밖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얼마나 추해 보이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본에서 극우파라고 불리는 강한 민족주의자(이들도 우리 나라에 오면 민족주의 정도가 평균수준 밖에는 안 되지만)들의 생각의 기본 바탕을 살펴보면, - 자기 민족의 지난 역사를 무조건 미화한다 - 자기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 - 다른 민족의 자존심을 존중해줄 필요가 없다 - 자기 국가 내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을 존중해 줄 필요가 없다 등이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의 민족주의자나 거의 비슷하게 보이는 현상으로 우리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 나라에 소수민족이라고 할 만한(화교는 0.1%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소수민족이라고 하기는 좀 어색하다) 사람들이 살았을 때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끔찍했을 지는 외국인 노동자나 혼혈인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보면 명확히 잘 알 수 있다. 만약 일본 사람이 한국인 몇 사람의 일본에 대한 편견에 찬 글을 읽거나 말을 듣고 반박하면서, 한국이라는 국가나 한국인 전체를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는 옳지 않으며 기분이 좋지 않다. 실제로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나라나 우리 한국인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입장을 제외하고는 발언을 한 그 개인을 비판해야지 국가나 일본인 전체를 싸잡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를 비판할 때도 일본정부를 비판해야지 일본인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거나 '일본인의 민족성이 어쩌고저쩌고...' 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젊은이들을 여럿 만나봤지만 일본 극우파와 사상성향이 비슷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 자신의 선조들이 한 잘못에 대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다 대고 싸잡아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그런 망언을 한 자기 나라 사람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이야기를 계속하면 결국에는 감정이 상하게 되고 그들이 돌아서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입장을 대변해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것들은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서 경제적 실리보다 우선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독일에서 들은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독일에서는 대학생들이 모두 학비를 면제받고 있다. 국가에서 돈을 내서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것이다. 독일의 교수봉급 수준이나 기타 물가를 감안하면 아마 1년에 한국 돈으로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학생에게 지원되는 셈이다. 그 수많은 외국인 유학생들도 모두 이 혜택을 받고 있다. 한 때 어떤 사람이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외국인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주장은 그 돈이 막대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일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일본에서도 한국을 좋아하는 극소수의 사람이 한국에 유학을 오는데, 이들은 일본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놓는 일차적인 표적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이해하며 지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실망을 가득 안은 채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도 역시 일본 극우파의 추한 모습 못지 않은 추한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빈곤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외국인 유학생이 극히 적은 나라이다. 5) 탄압 받는 민족의 민족주의 역시 슬기롭지 못하다 이라크나 터키의 예를 들어보자. 아랍족 계열이 다수민족인 이라크 사람들과 터키족(투르크족) 계열이 다수민족인 터키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 버금가게 민족주의가 강하다. 이라크 사람들과 터키 사람들은 걸핏하면 민족을 내세우며 아랍민족이 최고니 터키민족이 최고니 하고 말한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아랍족은 79%이며 16%의 쿠르드족과 다른 민족이 있다. 터키에서 터키족은 80%이며 12%의 쿠르드족과 다른 민족이 있다. 현재 터키는 세계에서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라크나 터키에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일은 실리적으로 봐서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아주 나쁘다고 생각한다. 아랍족이 최고이고 터키족이 최고라면 자기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나 다른 민족은 무엇인가? 그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차별 받고 지배받아야 하는가? 이라크나 터키에서 민족주의가 거세지면 거세질 수록 쿠르드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은 더 심하게 차별 받고 탄압 받을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바처럼 현재 이라크와 터키에서의 쿠르드족의 비참한 상태는 이를 강하게 대변해준다. 그나마 우리 나라는 민족주의가 강하기는 하지만 소수민족이 거의 없어 아주 소수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죄책감만 느끼면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 나라에 이라크와 터키 정도 수준의 소수 민족이 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심한 차별을 받았을 테고 나는 외국인들 앞에 얼굴을 제대로 들도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쿠르드족의 민족주의는 옳은가?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 민족주의가 그들에게 조금도 이롭지 않다. 쿠르드족 내에 민족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순수하게 민족주의를 외치는 정치지도자도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순수하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의 민족주의는 그 대립관계에 있는 상대민족, 혹은 한 국가 안에 있는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를 항상 자극하게 되어 있다. 그들이 민족주의를 더 강하게 외칠수록 쿠르드 인민은 더 심하게 차별 받고 탄압 받게 되어 있다. 혹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이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현재 터키,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시리아 등에 나뉘어 살고 있는 그들이 모든 거주지역에 걸친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 일부 지역에서라도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할지는 극히 불투명하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장래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설사 그들이 독립을 원하더라도 아랍인이나 터키인의 민족주의를 약화시켜 영토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상대방의 민족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자기도 민족주의의 깃발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장 자기 인민의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서도 유리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유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선은 아랍족이든 터키족이든 쿠르드족이든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같이 어울려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다. 민족주의만 아니면 이를 가로막고 있는 특별한 장애요인은 없다. 6) 민족주의를 버리면 우리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 성낙주씨는 "… 우리가 민족주의를 포기한다면 우리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그들 강대국들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우리가 벗었으니, 너희들도 벗어라!' 하고 그들을 강제할 수단이 우리에게는 전연 없지 않은가. 이렇듯 제아무리 먼저 벗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민족주의다." 라고 하고 있다. 민족주의를 벗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를 벗게 되면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겠지만 그보다도 우선 우리 스스로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 그리고 민족주의에 깊이 빠지게 되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불행을 가져다주지만 우리 스스로에게는 더 큰 불행을 가져다주게 된다. 30∼40년대의 독일민족주의와 일본민족주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주었지만 우선 그들 스스로에게 더욱 큰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벗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가 민족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민족주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색채가 약했지만 그들이 국익을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대외관계에서 피동적인 입장에 처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국익을 추구한다든지 다른 나라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을 많이 한다고 비판해오지 않았나. 다른 나라가 민족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민족주의를 버린다고 무슨 손해가 있나? 그리고 사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습다. 우리는 세계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아랍민족주의가 매우 강한 것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 나라 사람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아랍민족주의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몇 번 패배해서(이긴 적도 있지만 중요한 전쟁은 거의 졌다) 기가 한 풀 꺾이고, 아랍지도자들 사이의 알력과 분열과 사리사욕 추구에 환멸을 느끼면서 또 한 풀 꺾이고, 아랍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몇 차례의 노력이 실패하면서 또 한 풀 꺾이고, 아랍부유국과 아랍빈곤국 사이의 위화감과 질시로 또 약해져왔으며, 아랍 나라들끼리 서로 적대하며 전쟁을 벌인 걸프전쟁으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일본민족주의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유대민족주의는 이스라엘 내부의 매우 강력한 비판세력(이스라엘에서는 민족주의가 그들이 극히 증오하는 나찌즘의 변종이라는 주장이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에 의해 크게 꺾였으며, 중국의 중화민족주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민족국가를 원만히 운영해야 되는 그들의 현실상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민족주의는 지난 55년 동안 거의 아무런 장애도 없이, 거의 아무런 제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심지어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민족주의성향이 매우 강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있는 경우에는 정부에 의해 조장되고 지원되고 보호받으면서 줄곧 강해져오기만 했다. 대부분이 다민족국가인 다른 나라들의 경우 우선 민족주의가 불온시 되지만 민족주의가 불온시 되지 않는 나라라 하더라도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조장되고 보호받는 경우는 아랍 등 일부 민족을 제외한다면 극히 드물다. 서구 사람들에 의해 잠재적 민족주의가 여전히 강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일본도 우리 나라와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강한 우리가 다른 나라를 핑계로 과잉된 민족주의를 고수한다는 것이 누구에게 설득력이 있겠는가? 7) 민족주의가 통일에 도움을 줄지는 불확실하다 성낙주씨는 "… 통일에 관한 한 민족주의를 능가하는 어떤 당위도, 논리도, 이데올로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민족주의가 통일에 도움이 될지는 불확실하다. 우리 나라와 독일과 중국 중 민족주의가 가장 약했던 독일이 가장 먼저 통일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만약 독일이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통일이 민족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들의 통일을 방해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들이 민족통일을 추구해서 먼저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고 그 다음에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 통일되고 그 다음에 다른 지역에 사는 동족과의 통일을 추진한다면, 아니 그들이 민족통일을 추구한다는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든다면 누가 독일의 통일을 지지하겠는가? 독일의 통일은 민족주의를 결벽증적으로 느낄 정도로 철저하게 억제해온 그들의 슬기로운 정책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독일에 민족주의가 유행했더라면 바로 그 민족주의가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홍콩의 경우도 60년대나 70년대 초처럼 홍콩과 대륙의 젊은이들이 '영국제국주의 타도하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분위기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더라면 홍콩의 중국으로의 재통합은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영국과 중국의 홍콩반환협상은 그러한 분위기가 가라앉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홍콩에서도 민족주의가 중국으로의 재통합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불확실하다. 대만처럼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민족주의가 통일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통일로 가자는 대(大)민족주의만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만독립으로 가자는 소(小)민족주의도 역시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그 자체가 통일에 도움이 되는지는 역시 또 불확실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만약 통일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민족주의가 중국의 조선족에게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는 중국이나 우리의 고조된 민족주의가 통일 후 일본을 겨냥할 것을 우려하는 일본이나 우리의 고조된 민족주의가 '반미'로 변할 것을 우려하는 미국 등이 우리의 통일을 곱게 바라볼까? 그리고 우리 나라는 대만과 달라 통일지향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異論)이 없는 상태인데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통일지향성이 좀 더 강하다고 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성낙주씨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통합을 위해 스스로 형극의 길을 걸어간 김구선생 이래의 수많은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했다. 조국통일을 위해 형극의 길을 걸어간 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은 통일을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 일인지를 냉철하게 연구하고 투철하게 실천하는 것이지 통일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가 불확실한 민족주의를 무턱대고 고조하는 것이 아니다. 김구와 같은 분이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반제민족해방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서의 투철한 정신이지 민족주의는 아니다. 세종대왕이 봉건주의자라해서 봉건주의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세종대왕의 봉건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분의 정신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로 무장된 사람이 항상 민족해방운동이나 통일운동 등 민족과 관련된 문제의 해결에 가장 적극적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웠던 모택동조차도 민족주의자에 대해 자주 '민족해방운동에 투철하지 못하고 늘 동요하며 기회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반제민족해방운동과 조국통일에 투철했지만 모택동과 등소평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만약 중국의 항일민족해방전쟁에서 가장 투철하고 열렬히 싸운 사람 1만 명을 뽑는다고 한다면 그 70∼80%를 공산주의자가 차지할 것이고 민족주의자는 10% 미만일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제국주의 타도'를 소리 높여 외치던 일본의 그 많던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나라가 그렇게 원수처럼 생각하던 미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도, 따라서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적 항거를 할 일이 더 많아졌는데도 모두 숨어버리고 그래도 가끔 미국이나 미군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는 것은 민족주의와 가장 먼 거리에 있었던 공산당이나 사회당, 혹은 맑스주의 계열의 학생운동이었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태평양전쟁처럼 어떤 일을 폭발시키는 데는 유리하지만 우리 나라의 통일처럼 주위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얽혀 있고 그들과의 협조관계가 필수적이며 또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고도의 인내력과 침착성이 요구되는 일에는 긍정적인 역할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2. 언어생활 발전의 미래 1) 2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다 나는 오래 전부터 도구적 목적을 제외하고 2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1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사람의 주요한 사고들이 언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언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며, 언어를 배우고 활용하면서 지적 능력과 인격적 소양을 높여나갈 수 있기 때문에 사활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어떤 장점이 있을까? 2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지적능력이나 인성함양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더 바람직한가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가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다수의 전문가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간단한 소개를 하는 가벼운 교육을 제외하고 본격적인 외국어교육은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을 하였다. 머리를 싸매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외국어공부를 할 바에야 그 시간을 이용해서 영어나 수학, 물리 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그 시간을 활용해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그 시간에 괜찮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외국의 젊은이들과 인터넷 채팅을 하는 것이, 아니면 산이나 들로 자연학습을 하러 다니는 것이 학생에게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외국어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중에서도 단지 10∼20%만 필요할 뿐이고 대학에 진학해 필요하면 그 때가서 필요한 외국어를 선택해서 공부해도 늦지 않다고 한다. 나도 이러한 견해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성낙주씨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낙주씨는 "… 우리의 전 국민이, 남녀노소 없이 적어도 몇 세대에 걸쳐 영어를 공부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는 동안에, 다른 나라들은 영어 공부는 적당히 하는 한편, 맘껏 전문지식을 쌓고 자국어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우리를 여유 있게 앞질러 갈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영어는 외국어 혹은 제 1외국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영어공부를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여기서 영어를 외국어라는 말로만 바꿔놓는다면 내 생각과 완전히 같다. 나도 외국어공부는 적당히 해도, 아니 뚜렷한 필요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어가 단순히 외국어에 머무는 것인가? 과거 동아시아인에게 한문이 외국어가 아니었고 유럽인에게 라틴어가 외국어가 아니었듯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있어 영어는 이미 외국어의 지위를 넘어서서 국제어로 되어 있다. 설사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어를 단순히 외국어의 하나로만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우리 학생들 중에 영어를 적당히, 예를 들어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 2외국어 공부하듯 적당히 공부할 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 성낙주씨의 개인적인 바램이 어떻든 간에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이 영어를 공부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러한 경향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 왔으며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 확실하다. 이는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거의 같은 대답을 할 정도로 아주 분명한 일이다. 성낙주씨는 영어가 공용화되면 몇 세대에 걸쳐 영어를 공부하느라 힘들 것이라고 말하는데 영어가 공용화 되든 되지 않든 영어를 공부하느라 힘들긴 마찬가지이고 영어가 공용화 되지 않으면 이러한 고통은 단 몇 세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5세대고 10세대고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미래학 전문가들이 미국이나 필리핀,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들의 미래 국가경쟁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영어를 무기로 정보소통비용이 적게 들고 정보의 유통이 빠르고 원활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누구나 한결같이 중요하게 드는 것은 성낙주씨가 지적했듯이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적어 외국어를 공부할 시간에 지적 능력 계발이나 창조적인 다른 부분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초중고등학생은 그만두고라도 한국, 중국, 일본의 대학생들이 영어공부에 쏟아 붙는 그 엄청난 시간을 생각하면 우선 울화부터 치밀어 오른다.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한국유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대학생들조차 공부 시간의 거의 절반을 영어 공부하는데 쏟아 붇고 있다고 한다. 전문지식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할 황금 같은 시기에 영어 공부하는 데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어찌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있나. 성낙주씨가 "… 다른 나라들은 영어 공부는 적당히 하는 한편, 맘껏 전문지식을 쌓고 …" 라고 했는데 그 다른 나라들이란 어떤 나라인가? 개방이 무척 늦었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가장 강한 중국에서 이 정도인데 그 영어공부를 적당히 하는 다른 나라들이란 공상 속의 나라일 뿐이다. 영어를 적당히 공부해서는 견딜 수도 없지만 아무리 적당히 공부하라고 떠들어도 학생들, 젊은이들은 절대 영어공부를 적당히 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를 잘 못하면 가장 중요한 현실문제인 취직부터 잘 안 되는데(중국에 어학 연수하러 가서까지 취직걱정 때문에 영어공부를 하고 앉아 있는 일본 학생들도 꽤 있다고 한다) 누가 적당히 하고 넘어가겠는가.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혹은 적당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였을 때도 역시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제 2언어로서 영어를 공부하는 수고를 많이 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외국어로서 영어를 공부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고를 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 수고도 들일 필요가 없어진다. 성낙주씨가 '여유 있게 앞질러 갈 것이다' 라고 표현했듯이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장점이다. 제발 후손들에게 학생시절의 황금 같은 시간을 외국어 공부에 허비해버리는 짐을 물려주지 말자. 그리고 '여유 있게 앞질러 갈' 수 있는 조건을 물려주자. 2) 민족의 모국어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가 성낙주씨는 "한 민족의 모국어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다. 국가권력이 총동원되어 감시하고 고발하고 처벌하면서, 그것도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추진한다고 해도 될까말까한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권력이 총동원되어 감시하고 고발하고 처벌한다고 해서 한 민족의 언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주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맞게,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모국어를 바꾸기도 한다. 민족어를 고수하고 버리고는 고정된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신의 자주적인 요구에 따라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 민족들은 민족에 따라 최소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이르기까지 한족(漢族)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소수민족보호정책 같은 것은 없었고 소수민족이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차별의 대상이었으며 소수민족의 언어 역시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 민족의 언어를 지켜왔다. 그런데 지금 자기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한족(漢族)에 비해 특별지원까지 받고 있는 지금 오히려 자기 민족의 언어를 버리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학생이 언젠가 티벳 출신의 중국대학생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자기는 티벳어를 못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럼 부모님은 보통화(普通話, 중국표준어)를 잘 하시느냐고 물어보니 거의 못한다고 하여 그 유학생이 깜짝 놀라 그러면 가족 사이에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간단한 티벳어를 대충 알아듣고 부모님은 간단한 보통화를 대충 알아듣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가족들이 모두 민족어만을 사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조차 민족어를 거의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이 학생의 경우 단 1세대만에 민족어를 버린 것이다. 한족(漢族)이 사용하는 한어(漢語)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 내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 사용되는 국제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 아니 20세기초만 하더라도 지식인을 제외한 소수 민족의 일반인이 이 국제어를 배우고 사용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민족들끼리 만날 기회도 거의 없는데 국제어를 배워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특히, 최근 20여 년 사이에 산업과 교통과 통신과 대중매체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사람의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양한 방송프로그램이 공급되고 정확하고 신속한 의사교환의 중요성이 급증하면서 국제어인 한어(漢語)는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가고 민족어들은 도태되고 있다. 이것은 한 국가 안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탄압과 감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산업, 교통, 통신, 대중매체의 발전에 따른 대중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자기 스스로 언어생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에는 탄압과 멸시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어를 고수했다면 지금은 자신의 자주적인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에서 민족어를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한 국가 내(內)의 경우와 국제적인 경우는 부분적인 차이들은 많아도 본질적으로는 같다. 중국의 경우 단지 한 국가 내라는 것이 민족어 도태의 주요 이유라면 지난 수 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민족어가 유지되어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시기에도 한 국가 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는 단지 산업, 교통, 통신, 대중매체의 발전에 따른 언어통일의 요구가 증대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이다. 싱가포르, 필리핀과 홍콩을 비교해보자. 싱가포르는 40년 전인 195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필리핀은 53년 전인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홍콩은 156년(1842∼1997)의 영국지배를 거쳐 1년 반 전에 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그런데 현재 홍콩에서 영어는 제 2언어이긴 하지만 제 1언어인 중국어(광동어)와의 사용빈도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크다. 광동어는 누구나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영어를 생활용어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20% 미만, 그것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5% 미만이다. 그런데 식민지였던 기간도 짧고 훨씬 일찍 독립한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는 지금 영어가 명실공히 제 1언어로 되었다.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영어가 제 1언어일 뿐 아니라 멀지 않은 장래에 이 나라들에서 영어의 통일천하가 실현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을 정도로 그 사용영역은 매우 넓고 확장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영어가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일반인들의 실질적인 통용어로 된 것은 모두 독립 이후의 일이다. 홍콩에서 영어의 보급이 극히 느린 것은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중국어가 민족적 자존심과 자주의식의 표상이자 기치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중국어의 민족적 자존심과 자주의식의 표상이자 기치로서의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고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인해 영어의 필요성이 증대했기 때문에 홍콩정부의 강력한 중국어 장려정책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위상은 높아질 것으로 예견된다. 싱가포르와 필리핀에서는 모국어를 인위적으로 바꿨다. 그들 국민의 독립 당시의 평균 영어실력은 현재의 우리 나라 국민의 영어 평균보다 떨어진다. 그 동안 국가권력이나 외부세력의 특별한 감시나 탄압도 없었다. 그런데도 모국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람은 자주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극심한 감시나 탄압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현실적 필요에 따른 자주적 요구가 증대하면 아주 어려워 보이는 일도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에서 모국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일도 감시와 탄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중 자신의 자주적 요구에 부합된다는 인식만 들면 우리 같은 사람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영어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3) 쓰레기 같은 정보가 많을수록 언어능력이 중요하다 성낙주씨는 "한 개인이 일생동안 필요로 하는 정보의 양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이 흘러 넘치는 쓰레기 같은 정보들에 둘러싸여 자아를 상실한 채 지향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게 우리 현대인의 초상 아닌가"라고 하면서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모국어만 갖고도 필요한 정보의 습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쓰레기 같은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한다. 그러나 쓰레기 같은 정보들이 너무 많다고 정보 자체와 단절하는 것이 자아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문에 쓰레기 같은 정보가 너무 많다고 신문을 보지 않는 것이 자아를 상실하지 않는 방법인가? 나의 경우 신문 중 열 면 정도는 한 면 당 2∼5초 안에 넘어간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기사를 쓰는 분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성낙주씨가 표현한 "쓰레기 같은 정보" 라는 심한 말은 쓸 수 없지만 어쨌든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데 신문 한 면 당 2∼5초 정도면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한국어능력이다. 매일 신문을 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러한 한국어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영어 등의 외국어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의 경우 영어나 중국어로 된 신문을 볼 경우 신문 열 면에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조차 1∼3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한국어신문의 5초가 영어나 중국어신문 3분보다 실제로 더 정확한 결과를 내는 경우도 많다. 많은 정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신문사나 잡지사의 구미에 맞는 것들만 선별해서, 그리고 그들의 구미에 맞게 요리하여 내놓고 있다. 우리 대중이 영어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언론의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와 단절한 채 산에 들어가 신선처럼 살 것이 아니라면 정보를 빨리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쓰레기 같은 정보들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며, 정보판단능력의 핵심은 언어능력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한국어나 영어로 되어 있으므로 한국어와 영어능력을 키워야 쓰레기 같은 정보들을 빠른 속도로 옆으로 치워버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 그 다음에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모국어만 갖고도 필요한 정보의 습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 나라에서 수적으로도 엄청난 다수이고 가장 '일반적인' 일반인의 범주에 속하는 주부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주부들도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에서는 그것은 접어두고 전업주부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아를 가꿔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전업주부들 중에 다른 직업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에는 대체로 싫증을 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생활을 갖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선인장 분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주부가 취미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선인장 분재를 하는 것 이외에도 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싶어하고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나 교류는 인터넷을 통하지 않고는 매우 어려우며 인터넷을 하더라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또 소용이 없다. '선인장 분재'를 처음 하기 시작할 때는 한국어로 된 책이나 잡지가 꽤 도움이 된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정보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컴퓨터통신에 선인장분재와 관련된 동호회가 있으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동호회가 없을 가능성도 많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의 부족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인터넷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거의 영어가 사용된다. 특히 선인장분재와 관련된 홈페이지나 뉴스그룹이라면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자기에게 필요한 웬만한 정보는 다 찾아볼 수 있고 자기가 매우 좋아하지만 희귀해서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선인장을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고 수만 리 떨어져 있는 그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영어를 못하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영어로 된 상품설명서나 영어로 된 책이나 잡지, 영어방송, 영어로 되어있는 컴퓨터게임 등은 이미 우리 주변에 많이 있으며 날로 많아지고 있다. 몇 년 전에 <문명 2> 라는 아주 격조 높고 유익하며 인기도 있는 컴퓨터게임이 나왔는데 이 게임의 내장된 각종 영어설명이 보통 분량의 책 한 권이 넘을 정도였다. 그래서 통신상에 아마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이 게임의 한글화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히 호소했던 적이 있다. 얼마나 불편을 느꼈으면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호소를 올렸겠는가? 이는 영어로 된 정보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생활 곳곳에서, 심지어 놀이에 이르기까지 매우 필요로 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4) 영어와 사회발전의 함수관계 성낙주씨는 인도의 전근대적인 빈곤과 영어가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 밝혀야 한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도의 전근대적인 빈곤과 영어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는 바꾸어 말해 그 동안 인도의 경제성장에 영어가 거의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첫째, 세계의 과거 경제구조에서 언어가 중요한 도구가 되는 지식산업과 지식노동의 비중이 크지 않았고 둘째, 인도와 같은 극히 저발전 단계에 있는 나라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보다 경쟁력이 있는데 인도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노동력의 동원이나 조직에서 상대적으로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셋째, 인도는 필리핀이나 싱가포르와 달리 일반인들 사이에서 영어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에 필리핀처럼 영어를 무기로 노동력을 수출하여 엄청난 돈(최소 100억 달러 이상, 이는 우리 나라처럼 산업이 발전한 나라에서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총이윤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을 벌어들인다든지 영어를 중심으로 언어를 통일하여 국민통합과 조직의 무기로 삼는다든지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등등의 원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도의 소프트웨어산업 등 21세기를 이끌어갈 주요 지식산업들의 경쟁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인도 소프트웨어산업의 종합적인 잠재적 경쟁력이 세계 5위 안에 드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미국 다음의 세계 2위로 꼽는 사람도 있다. 인도는 이미 소프트웨어 수출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우리 나라는 소프트웨어에서 인도에 크게 뒤지고 있다. 인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영어로 만들어짐은 물론이고 소프트웨어산업을 비롯하여 언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산업에서 인도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의 고급 노동력이 미국 등의 기업에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스카웃 되어 가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며 날로 급증하고 있다. 이 역시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 인도의 1인당 소득은 우리 나라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 이러한 비율이 20∼30년 후에도 그대로 이어질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세계는 지금 급변하고 잇다. 경제구조 역시 급변하고 있다. 불과 15∼20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가장 전망 없는 나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미국은 소프트웨어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통신산업을 급속하게 발전시켜 미국을 가장 전망 있는 나라로 평가받도록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발전구조도 뿌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산업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것은 그렇지 않아도 유력한 지위를 갖고 있던 영어를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영어의 확고한 지위는 다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의 국가경쟁력을 크게 높여놓는 선순환(善循環)이 계속되고 있다. 언어가 중요한 도구가 되는 지식산업이 전체 산업의 50∼7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20∼30년 후에는 이 격차는 말할 수 없이 커져 영어를 공용어로 하지 않는 나라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것이다. 이제 영어의 지위는 뒤바뀌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이 영어의 지위를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실제로 영어는 미국의 손을 떠났다. 미국이 쇠퇴하든 망하든 상관없이 영어는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날로 굳혀갈 것이다. 영어는 이제 단순히 강대국의 언어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확고부동한 국제어로 되었기 때문이다. 5) 훌륭한 언어이기 때문에 국제어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성낙주씨는 "자기 언어를 혐오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의 다양한 풍속과 인종과 풍토와 전통을 사랑하겠는가" 라고 말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어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모국어이기 때문에 익숙하고 친근하며 나 역시 민족적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어는 매우 훌륭한 언어라고 생각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중에 이상적인 언어는 없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중에 국제공용어로 하나를 선택하라고 나에게 완전한 자유를 준다면 나는 한국-일본어(한국어와 일본어는 북경어와 광동어 정도의 차이 밖에 없기 때문에 크게 보아 하나의 언어라고 보고 한국-일본어로 부르겠다)를 선택하겠다. 한국-일본어는 기본 문법이 매우 복잡하고 수많은 한자도 익혀야 하기 때문에 배우기는 무척 어렵지만 일단 배우고 나서 사용하는 데는 우월한 장점들을 갖고 있다. 내가 언젠가 한 번 재미삼아 한국-일본어와 영어, 중국어의 점수를 매겨본 적이 있는데 독해에서는 한국-일본어(한자를 많이 섞어 쓸 경우)가 90점, 중국어가 70점, 영어가 60점 정도였고, 구어(口語)에서는 영어 75점, 한국-일본어 70점, 중국어가 60점 정도였다. 종합적인 점수는 한국-일본어가 1위였다. 비전문가인 내가 재미삼아 한 것이기 때문에 점수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보지만 그 분야별 순위나 종합순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신감을 갖고 있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먼저 중국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해에서 영어에 비해 우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첫째,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둘째, 문장 내에서 각 단어의 역할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셋째, 어미(語尾)변화 등의 분법적인 보조가 아주 약하며 넷째, 영어처럼 하나의 문자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2∼3개의 문자를 사용해 시각적인 속도증가효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 한국-일본어에 비해 독해에서 크게 뒤진다. 중국어의 단점이 모두 고스란히 한국-일본어의 장점으로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일본어는 띄어쓰기는 하지 않지만 한자를 충분히 사용하면 한자 그 자체가 띄어쓰기의 효과를 가져와 거의 불편함을 느낄 수 없다. 구어(口語)에서는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많은 한자어를 사용하는 중국어와 한국-일본어가 영어에 비해 불리하다. 그러나 문법적인 보조가 약하고 한자어만을 사용하는 중국어가 한국-일본어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 한국-일본어는 주어 뒤에는 주격조사를, 목적어 뒤에는 목적격조사를 붙여 그것이 주어와 목적어임을 분명히 하고 용언(用言)은 어미변화를 시켜 그것이 용언임을 분명히 하고, 그 용언의 역할도 분명히 하는 등 문법적인 보조가 풍부하다는 것이 구어(口語)에서는 그 장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신조어(新造語)나 새로 접하는 단어를 기억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한자나 한자어를 사용하는 한국-일본어나 중국어가 영어에 비해 최소 3배 이상 우월하다. 한국-일본어는 원래 하나의 언어에서 갈라져 나갔을 것이 분명한 한국어, 일본어 본래의 장점과 중국어의 장점을 결합하고 서구의 외래어도 한껏 빨아들여 풍부해진 아주 우수한 언어이다. 한국-일본어가 무척 어려운 언어임에는 분명하지만 현대 교육체계에서 이 정도 공부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우수한 언어가 세계공용어로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국제어나 세계공용어는 가장 우수하다고 채택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세계공용어로 쓰이기 힘들 정도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언어라면 안 되겠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등언어, 예를 들어 영어, 한국-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고등언어들은 이러한 특별한 결함이 없어 모두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지난 몇 천 년 동안 국제어 혹은 세계어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는 국가나 민족의 힘의 크기나 문명의 발전 정도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최근에 들어와서는 언어시장도 다른 모든 시장처럼 누가 빨리 표준의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표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임도 이미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고비로 해서 이미 끝났다. 만약 지난 몇 십 년 동안 지식산업이 그렇게 빨리 발전하지 않았다면 표준의 자리가 결정되는 시기가 훨씬 뒤로 늦추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결과는 지식산업이 빨리 발전했고, 그것도 이미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어가 사용되는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게임은 싱겁게 일찍 끝나버리고 말았다. 일단 표준으로 채택된 언어는 표준으로 채택되기 이전보다 몇 배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나갈 것이다.(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음) 성낙주씨는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고 중국어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중국어의 품에 안겨야 하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간단하게 대답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은 국력이 국제어의 표준을 좌지우지하는 단계를 이미 지났기 때문에 국력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국력으로 강압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미 민주주의라는 거인이 어느 개별 국가도 감히 대적하기 힘든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특정 언어를 강요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초강대국이 된다 하더라도 영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 세계 최강의 초강대국이 된다고 한다면 중국은 그 국제적 위상 때문에 그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미 그 때가 되면 영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질 테니까. 최근 몇 십 년 동안 언어들의 위상이 크게 변하였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미테랑과 콜이 만나 영어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제 1외국어로 채택하자는 이야기들이 오갔으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조차 들어볼 수가 없다. 교사나 학생들에게 그런 권유를 했다가 무안만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표준의 자리를 차지한 영어는 날이 갈수록 표준의 자리를 더욱 굳히게 될 것이며 아무리 우수한 언어라도, 아니 훨씬 더 우수한 새로운 언어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표준의 자리를 공격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6) 영어공용화 반대론에 숨어 있는 파시즘 성낙주씨는 "… 영어공용화론은 뜻밖에도 파시즘과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 설사 80%의 높은 지지로 통과되었다 할지라도, 나머지 20%의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단 1%의 국민이라도 끝까지 우리 한글과 모국어를 지키겠다고 버틴다면, 그들을 소수 인종으로 몰아 이 땅에다 또 하나의 '인디언보호구역'을 만들어야 하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 내용이 자기 모순에 빠져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민족어를 지키겠다는 사람은 1%가 되어도 보호해야 한다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겠다는 사람들은 80%나 되어도 이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파시즘을 비판하면서 이런 내용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어공용화론은 한국어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50%든, 10%든, 5%든, 1%든 이를 보호해야 한다(다른 논자들은 그것이 1% 선까지 내려오면 그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래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민족어이기 때문에 1%라도 공용어로 계속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는 것이다. 나는 성낙주씨가 공용어라는 말뜻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왜 이런 억지주장을 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겠다는 사람이 20%만 되어도 이는 보호되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사회의 '소수보호'의 원칙에 맞는다. 10%만 되어도 보호되어야 하지만 국가의 언어를 결정하는 것이 워낙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10% 정도까지는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지만 20% 정도가 되면 충분히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영어만 사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공용어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니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어서 소수로서 보호받는 데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아직 '소수보호'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민족주의가 대단히 강하며 여러 가지 다른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서 이를 무려 80% 선까지 올린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80%까지도 무시해버려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황당해서 입이 딱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도 않는다. 근현대에 여러 종류의 파시즘이 있었지만 국민의 동의나 지지를 받아가면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낙주씨는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80%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과연 80%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다. 군대를 동원해서 완전히 까뭉개 버려도, 몇 십 년 전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현대민주주의사회에서는 80%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없다. 성낙주씨는 이 글에서 영어공용화 주장이 다수건 소수건 무조건 무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들인 '다수의 존중'에도, '소수보호'에도 어긋난다. 우리가 이러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다 버린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원칙들을 갖고 국가의 장래를 토론해야 하며, 어떤 원칙들을 갖고 사회의 발전방향을 결정할 것인가? 이러한 기본 원칙들이 무시된 위에 설 수 있는 것은 파시즘 밖에 없다는 것은 성낙주씨가 더 잘 알 것이다. 파시즘은 거의 예외 없이 민족주의와 결합해 왔으며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대중에 최면을 걸어 이런 민주적 기본원칙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묵인들을 이끌어 내온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오싹해진다. 3. 맺는 말 나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세종대왕을 생각해보았다. 세종대왕이 지금 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글창제와 관련된 세종대왕의 핵심적인 정신은, 하나는 백성의 편의를 중심으로 언어정책을 생각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의 기존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언어생활을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종대왕으로부터 배워야 할 정신이고 세종대왕이 지금 이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 언어생활의 발전을 위해 영어공용화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을 생각해보았다. 그들이 만약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혀 한족(漢族)에게 만주어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관리들에게라도 만주어의 사용을 의무화했다면 중국의 언어생활은 얼마나 혼란스러워졌겠으며 인민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청나라의 만주족이 만주어와 실질적으로 거의 결별한 것은 흔히 삼현제(三賢帝)라고 불리는 강희(康熙), 옹정(擁正), 건륭(乾隆) 시대의 일이다. 나는 중국의 한족(漢族)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상당히 강한 중국인이건만 이 이민족의 황제들을 대부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만약 이들이 만주어를 고집했다면 한족(漢族)의 언어생활이 혼란해지는 것은 물론 만주족 후손들의 언어생활에도 많은 부담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자기 민족어나 한어(漢語)를 배워야 하고 여기다 또 영어까지 배워야 한다. 이런 부담을 견디기 어려운 새세대들은 하나 둘씩 민족어를 버리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민족어를 버리더라도 민족어를 많이 쓰는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기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재 만주족의 후손들은 민족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이는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만주족은, 고립된 지역에 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없어졌다. 만주족을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질이 만주어였는데 만주어가 거의 없어졌으니 만주족이 없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민족이 없어지면 민족정기가 없어지고 민족정신이 없어져 머저리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고 한다. 만주족은 없어졌지만 만주족이 없어졌다고 그들의 후손에게 그 무슨 정기가 없어지고 그 무슨 정신이 없어진 증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주족이 가장 많이 살았던 북경에 가봐도 그 무슨 정기가 없어지고 그 무슨 정신이 없어져 머저리처럼 된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조상이 만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 중에 라오셔(老舍)와 같은 탁월한 작가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무슨 정기가 없어지고 그 무슨 정신이 없어진 사람이 이렇게 뛰어난 작품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정기와 정신이 없어진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혁명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하니 이 또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중국의 만주족의 후손은 대부분 한족(漢族)이 되어 가장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민족이 없어지면 노예가 되어 …" 운운하는데 그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는 조그마한 증거도 없다. 그들은 절대 노예가 되지 않았으며 다만 문익환목사가 말한 것처럼 '더 큰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보론> 한자사용에 대하여 최근 한자병용과 관련된 논쟁이 일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 간단하게 몇 마디를 하고 싶다. 현재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국한혼용(國漢混用)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모두 서로 '망국적 폐해' 라든지, '소수의 전횡' 라든지, '엘리트주의의 폭력' 라든지 하는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는 말들을 사용해가면서 비난하고 있고 차분한 토론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자병용과 국한혼용은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다를 수 있는데 어쨌든 여기서는 한글전용과 국한혼용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논리 전개상 양시론(兩是論)을 사용했는데 이는 필자가 평소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해 마지않는 양비론(兩非論)과 근본적으로 비슷하지만 각각의 장점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1. 국한혼용론을 위한 변론 1) 국한혼용은 독해능력을 크게 증대시킨다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은 아주 살벌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사회주의적 냄새가 나거나 역사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서적은 출판되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이나 한국 근현대사나 서구 좌파철학, 러시아와 중국 등의 근현대사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영어나 일본어로 된 책들을 보아야 했고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영어 책과 일본어 책을 읽는 것이 필수였다. 우리가 당시 읽었던 일본어 책은 경제학서적, 역사서적, 철학서적 등이었기 때문에 한자로 쓸 수 있는 단어는 모조리 한자로 쓰여 있었는데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 극소수였던 우리로서는 이것이 훨씬 편했다. 내가 3학년이던 84년부터 대학자율화 조치로 사회주의적 성향의 서적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되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84년과 85년에는 학생운동권에서 한국어 서적과 일본어 서적, 영어 서적이 공존하였다. 내가 3학년이던 84년 말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나의 한국어 책(대부분 한글전용의 서적)과 일본어 책의 정독(精讀) 독해속도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나는 책을 정독할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정독 속도는 다른 사람보다 느린 편인데 이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나의 일본어 독해 실력은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데는 큰 무리는 없었지만 소설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특별히 좋은 편이 아니었고 아마 운동권 평균수준이거나 운동권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내가 아주 능숙한 한국어로 되어 있는 책과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본어로 되어 있는 책의 독해속도가 비슷하다는 것은 깜짝 놀랄 일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 원인을 나의 책읽는 습관과 관련시켜 주로 이해하려 했으나 이것이 원인의 하나는 될지언정 결정적 원인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자로 생각이 미쳤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나의 한국어 실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한자가 독해속도를 높여주어 결과적으로 독해속도가 비슷하게 된 것이었다. 한자를 많이 사용한 일부 대학교재를 보고 나서는 이런 결론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한국어에는 한자어가 70%나 되고 또 이들 중에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적지 않다. 이 중 95% 이상은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전후맥락을 보는 데 우리가 무의식중에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 시간은 한 단어로만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글 한 편이나 책 한 권을 놓고 보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그 뿐 아니라 책을 읽다가 멈칫하여 우리가 의식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하게 하는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도 있다. 동음이의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한자를 쓰지 않으면 뜻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어나 한자가 없으면 아예 추리가 되지 않는 단어도 간혹 있다. 이런 것들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뿐 아니라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한글전용이 독해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게 되면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의 장점과 문법적 구조가 풍부한 한국어의 장점이 결합되어 독해에서 탁월한 우수성을 보인다.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의 경우는 한자의 장점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 장점의 활용도가 우리말보다는 많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주어나 목적어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주어나 목적어에 아무런 표시도 해두지 않는 중국어보다는 주어에는 주격조사를, 목적어에는 목적격조사를 반드시 붙이는 한국어가 월등히 빠르고 정확하다. 이 조사들은 한자와 결합될 경우에는 한자와 구별되어 더욱 선명히 부각되어서 자신의 역할을 훨씬 잘 수행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어나 한글의 장점과 우수성은 한자와 결합될 경우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다. 2) 우리말을 위해서도 한자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말 단어의 70%는 한자어이다. 이러한 우리말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한자를 잘 알아야 한다.(이와 관련해서는 워낙 많은 분들이 언급하고 있고 또 독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 구체적 설명은 생략하겠다. 특히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등 각종 학문분야에서는 한자가 사활적으로 중요한 데 이와 관련된 다른 분들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체계적으로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사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어버리게 된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운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한자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다.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를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들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5년 정도 지나면 거의 잊어버리게 된다. 한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학생들 중에 한자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많지 않거니와 설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사회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한자를 익히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 학생만 한자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국민이라면 우리 국어인 한국어를 잘 알아야 하고 한국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자를 잘 알아야 하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잊어버린다면 말이 되는가?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사회에서 한자를 혼용해주어야 한다. 한자를 혼용하지 않으면 한자를 배우는 동기부여조차 잘 되지 않는다. 쓸 데 없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3) 지금은 더 이상 한자의 대중교육이 어려운 시절이 아니다 한글전용론이 처음 제기되던 시절에 우리 나라의 대중교육은 형편없었다. 거의 대중교육이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맹률도 아주 높았다. 그리고 한글전용론이 점차 힘을 얻어가던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한글전용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60년대 후반, 70년대 전반에도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런 시절에는 배우는 데 한글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는 한자를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10대가 중등교육을 받고 있으며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사람도 3분의 2를 넘는다. 이는 세계 1∼2위 수준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이런 엄청난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과거와 똑같은 논리에서 한글전용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교육체계에서 대부분의 국민이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에서는 사용했지만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진 사람들이 많아 문제였다면 지금은 대부분이 학교에서 배우지만 사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는 많이 잡아야 2천∼3천 정도이기 때문에 교육과 학습에 그렇게 아주 많은 시간이 투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사회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한자교육에도 더 많은 시간이 투자될 수밖에 없다. 사용하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려 또 외워야 하고 다시 일정 기간이 흐르면 또 외워야 하는 등 교육도 매우 비효율적이다. 4) 타자기 시대의 논리와 컴퓨터 시대의 논리 한글전용론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던 시기는 타자기의 보급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반면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과 그 개인용 컴퓨터가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상상이 거의 불가능했다. 국한혼용론을 주장하는 어떤 분은 우리의 기술감각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것은 컴퓨터의 발전역사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개인용 컴퓨터가 출현할 것이라든가 이것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거나 거의 없었다. 타자기로 한자를 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타자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을 경우 타자기로 친 한글전용문서와 한자를 많이 사용한 일반출판물 등을 혼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자를 많이 사용하는 글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한자가 없는 글을 읽으면 독해속도가 심하게 떨어지고 짜증이 나며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내가 만나본 일본 대학생, 직장인들 중 대부분이 순 일본문자로만 된 글을 접하면 이런 현상이 생긴다고 말했다) 한글전용문장만 늘 읽는 경우에는 한자를 사용한 글보다 독해속도는 약간 떨어지지만 짜증이 나거나 집중이 안 되는 현상은 거의 없다. 타자기의 세상이 될 것을 예상하면 이런 문자사용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한글전용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률이 대단히 높고 글이나 사무의 대부분이 컴퓨터로 이루어지고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한자의 이용은 무제한 자유스럽다. 한국의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들은 아직은 한자입력이 좀 원활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의 문제일 뿐이고 내가 아는 한 중국인은 한자를 분 당 200자(200타가 아니라 200자!)를 치며 대부분의 컴퓨터 사용자가 큰 어려움 없이 컴퓨터로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한국사람 중에도 한글을 분당 200자 이상 치는 사람을 지금까지 3∼4명 정도 밖에 본 적이 없다. 한자로 글을 쓰는 것이 이 정도라면 한글이나 알파벳에 조금도 뒤질 것이 없다. 20∼30년 전에는 한자의 사용이 사무현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현대화되면 될수록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컴퓨터로 번역을 시켜보면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많은 순한글문보다는 국한혼용문이 더 정확한 결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5) 한자병용이 관광객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98년에 한국을 찾은 관광객 중에 일본인이 46%, 중국인이 13%여서 합계 59%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남아에서 해외관광을 다닐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 화교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자문화권 관광객의 비율은 이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이들의 편의를 위해 문화관광부에서 도로 표지판의 한자병기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것이 크게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된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첫째, 각 나라별로 한자의 발음이 다르고 둘째, 중국에서는 간체자(簡體字)를 쓰기 때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렇지 않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고 가정할 때 기차역을 표기하는 데 북경역, 천진역을 Beijingzhan, Tianjinzhan이라고 발음만 표기해 놓으면 여기가 무슨 역인지 아는 데 시간이 걸린다. 중국어 발음에 익숙하지 않거나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역에서 제 때 내리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이를 北京站, 天津站 이라고 한자로 적어놓으면 누구나 쉽게, 그리고 금방 무슨 역인지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에 오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특히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 지명도 자기 식 한자발음대로 발음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베이징, 상하이라고 하기보다는 북경, 상해라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경주(慶州)를 '징쩌우'라고 발음하고 알파벳으로는 Qingzhou 라고 표기한다. 따라서 경주를 한자로는 표기하지 않고 알파벳으로 Gyungju(혹은 Kyungju, Gyeongju 등)라고만 표기하면 한국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어디가 어딘지 잘 알 수가 없다. 그 뿐 아니라 중국인이나 동남아 화교 중 40대 이상은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대단히 많다. 중국에서는 58년 이후 자신들의 한자 발음을 '한어병음(漢語拐音) 이라는 알파벳 표기로 하도록 했으나 그 이전이나 제정 직후에 초등학교(소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그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고, 그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영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람들도 역시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다. 이들 세대가 관광객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알파벳으로만 표기한 것이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으며 여러 번 보더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국에서는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중국에서 간체자가 보급되기 이전, 혹은 간체자와 번체자(繁體字, 한국에서의 正體字)가 혼용되던 시절에 초등교육을 받은 40대 중반 이전의 세대들은 대체로 번체자를 어려움 없이 사용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중등교육에서 번체자를 교육하기 때문에 중등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상용 번체자의 80∼90%는 어려움 없이 읽어낸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해서 중등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지 못한 사람이 주종인데 이들은 대부분 해외관광의 대열에 끼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관광 오는 중국인의 대다수는 차(車)라든지 문(門)과 같은 기본적인 번체자는 물론 비행기의 기(機)나 회전의 전(轉)과 같은 중급 정도 난이도의 번체자도 대부분 읽을 줄 안다. 그리고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체자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소수의 번체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무슨 글자인지 추측하기가 쉽다. 중국에서 간체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자표기가 필요 없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6) 한자사용이 엘리트주의의 폭력인가 필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약간 오그라들게 된다. 영어는 내가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창피하기는 하지만, 이런 비판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한자는, 내가 우리 세대에서는 비교적 많이 아는 편이기 때문에 혹시 내가 평소에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엘리트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비판들은 지나치며 적절하지 않다. 한자를 공부하는 것이 영어 공부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한자를 아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엘리트주의' 씩이나 된다니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초등학교만 나와도 상당히 많은 한자를 알 정도였는데 그 무슨 거창한 '엘리트주의'인가? 국한혼용을 '엘리트주의의 폭력' 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말이지만 책을 읽다가 가끔 이런 느낌을 들도록 하는 글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인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써놓고는 옆에 음도 뜻도 달아 놓지 않는 것이다. 이야말로 독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마치 독자들에게 "이런 한자도 모르니? 무식한 놈들아!" 하고 욕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한자를 옆에 써놓지 않으면 도저히 그 뜻이 추리가 되지 않는 단어를 한글로만 써놓고는 옆에 한자나 한글설명을 붙여 놓지 않은 경우도 역시 독자에 대한 폭력이긴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도 추리를 못 해내니? 이 머리 나쁜 놈들아!" 하고 욕하는 듯 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엘리트주의의 폭력' 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한자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놓고 엘리트주의의 폭력이라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내가 아는 30대(한글 세대라는 뜻) 중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한자를 꽤 많이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대학을 나와도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도 무수히 많다. 한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고 대학에서 한자를 특별히 가르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자 그 자체가 엘리트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한글전용론을 위한 변론 1) 현 시대를 기준으로 이전의 한글전용론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한글전용론은 해방 직후의 시대적 조건이나 20∼30년 전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충분히 나올 만한 주장이다. 해방 직후의 우리 나라에서는 문맹률이 대단히 높았고 이 문맹을 빠른 시간 안에 퇴치해야만 광범한 대중이 각 종 문자생활의 혜택을 입을 수 있고 이를 기초로 빠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육에 비교적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한자가 섞여있는 한국어 문자교육보다는 한자가 섞여있지 않은 한국어 문자교육이, 종합적인 언어교육이 아닌 문자교육 그 자체로만 본다면 그 시간과 노력을 많게 보면 100분의 1 이하로, 적어도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맹퇴치가 사활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던 당시로서는 한글전용이 매우 매력적인 방법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20∼30년 전은 전화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급속하게 보급되고 구어(口語)의 중요성이 특히 부각되던 시기이다. 현재처럼 컴퓨터와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글읽기와 글쓰기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라디오의 위상은 크게 후퇴하고 텔레비전과 전화(말로 하는 전화)의 위상은 정체되거나 후퇴(디지털 TV, 케이블 TV, 휴대폰 등 기술의 발전은 놀랍지만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이 텔레비전의 지위를 잠식해 들어가고 E-mail이나 컴퓨터통신채팅이 전화의 지위를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에 사용량의 증대나 기술발전과 상관없이 종합적인 지위는 약간 후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할 것을 예상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기이다. 따라서 구어(口語)의 발전과 효율화를 사회발전의 사활적인 기초로 보고 구어(口語)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고 있는, 구어(口語)에 적합하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구어(反口語)적인 어휘들을 몰아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글전용이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타자기를 통한 사무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한글전용이 필요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이 시대에 어떻게 컴퓨터시대를 예측하길 바란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 판단이긴 했지만 이를,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볼 때 적절하지 않은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비롯한 한글전용의 정책입안자들이나 한글전용운동을 벌이던 분들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시대적 변화를 환하게 다 알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그 분들의 생각과 활동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이러한 엄청난 변화들을 그 시대에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이 우리 나라 국민의 0.001%라도 됐을까? 아니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필자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도 한국 사회발전, 경제발전, 문화발전, 정치발전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프라로 구어(口語)를 잘 다듬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을 내세우며 이를 위해 한글전용운동을 추진했을 가능성도 많다. 2) 한글전용은 상당 수준의 생활력(生活力)이 있다 국한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대중의 현실 문자생활을 존중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이상도 현실을 무시할 때는 공허한 이야기로 끝나버린다. 우리는 실제로 한글전용에 가깝게 되어 버린 현실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한글전용이 상당 정도의 생활력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 한자를 퇴출시키는 운동이 실패한 것은 정치권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이고 주된 이유는 생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한자 없는 한문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고대 한문에서 한자가 없으면 거의 해독이 불가능하며 한자 없는 현대한문(현대중국어의 글)은 어느 정도 해독은 가능하지만 극히 어렵고 느리다. 필자도 한자를 가리고 알파벳(漢語拐音, 중국어의 표준발음표기)과 성조표시만 된 것으로 현대한문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상용단어만 나오는 경우에는 독해는 되지만 속도가 빨라야 5배 이상 걸리고 극히 짜증스럽다. 이는 중국어의 한자음의 수가 한국어의 한자음의 수보다 적어서가 아니다. 중국어의 한자음의 수는 한국어의 한자음의 수보다 많다. 그러나 중국어는 한자의 높은 의미전달능력에 의존하다보니 다른 부분, 특히 문법적인 보조가 약해졌다. 좋게 말하면 문법이 간단해서 문법을 배우기가 쉽고 나쁘게 말하면 글이나 말의 문법적인 보조가 너무 약해서 한자에 의존하지 않으면 구어(口語)용 상용단어를 제외한 많은 단어의 사용이나 표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의 경우에는 다르다.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분들 중에 한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한자를 많이 사용해서 글을 보던 사람은 불편하겠지만 우리 국민의 99% 이상은 한자 없는 글에 익숙해져 있다. 소설, 수필, 신문이나 잡지 기사 등 우리가 평소에 많이 대하는 대부분의 글들이 한자가 없어서 독해가 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순간적으로 독해가 되지 않아 1∼3초 멈칫 하는 경우도 한 페이지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다.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이 정도의 어휘능력과 언어추리능력을 갖고 있다. 전문서적으로 들어가면 한자가 없으면 매우 불편하지만 그 중에서 전문어를 한자 대신 서방 출신 외래어나 영어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관행이 정착되어 있는 분야에서 다시 새롭게 한자와 한자어를 강요하는 것은 이 역시 독재적 자세라 하겠다. 3) 한자사용이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의 괴리를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한글전용을 반대하시는 분들 중에 한국어 발음이 같은 글자나 단어가 많다는 것을 중요한 이유로 드는데 이것이 한글전용의 반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동시에 한글전용의 이유로도 될 수 있다. 한국어 발음이 같은 글자나 단어가 많은 것은 글에서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를 사용하여 어휘가 풍부해지는 것은 좋지만 이럴 경우 우리말에서 조금씩 퇴출되고 있던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중 많은 단어들을 부활시켜 우리의 구어(口語)생활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전부>라는 말을 필자가 갖고 있는 조그마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8개가 있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한자단어사전에 있는 단어는 모두 全部, 田父, 田夫, 田婦, 佃夫, 前夫, 前部, 前婦, 田賦, 典簿, 銓部, 戰斧, 顚捒, 轉付의 14개였다. 이 중에서 현재 상용하고 있는 단어는 全部 하나밖에 없다. 이 중에서 어쩌다가 쓰이는 것을 본 어렴풋한 기억이 나는 것은 前夫와 典簿 정도이며 나머지는 사용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이처럼 우리의 구어(口語)생활을 혼란스럽게 만들 우려가 있는 단어들은 잘 사용되지 않거나 과거에는 문어(文語)에서만 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이미 퇴출되었거나 조금씩 퇴출되고 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한국어의 단어 중에는 반구어(反口語)적인 단어가 너무나 많다. 그 중 압도적 다수가 그 동안의 자연스러운 퇴출과정을 거쳐 지금 고사(枯死)되었거나 고사 직전에 있으며, 필자는 이를 한국어 구어(口語)발전과 한글전용이 합작해서 만들어놓은 한국어 발전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며, 한국어는 이 과정을 통해 어휘 수는 줄어들었지만 실질적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앞의 전부(田夫), 전부(田婦)에서도 나온 夫와 婦는 대표적이고 아주 악질적인 반구어(反口語)적인 글자이다. 夫와 婦는 대칭되는 말로서 서로 헷갈릴 우려가 많은데도 발음이 같다. 그 결과 부부(夫婦)처럼 구별할 필요가 없는 단어나 고부(姑婦), 마부(馬夫)처럼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국어에서 퇴출되었거나 고사 직전에 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농부(農夫)와 농부(農婦)가 헷갈려 농부(農婦)가 퇴출되고 전부(前夫)와 전부(前婦)가 헷갈려 모두 퇴출되고 전처(前妻)와 전남편(前男便)이 사용되는 등 夫와 婦가 들어간 대부분의 단어들이 한국어에서 퇴출되었거나 퇴출과정에 있다. 이것이 정당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농부(農婦)와 같은 일부 단어들은 무척 아쉽다. 농부(農婦)는 농촌여성, 농가여성, 농촌부녀, 농부의 아내 등 여러 가지 표현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농부(農婦)와 이미지가 완전히 같지 않고 또 간결하지도 못하다. 문학을 하는 분들에게는 특히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農婦)를 시 등, 아주 특수한 영역을 제외하고 구어(口語)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소설, 신문기사 등에 한자를 사용해서 부활시키는 것은 강력히 반대한다. 구어(口語)가 언어생활 전체를 대표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구어(口語)는 매우 중요하며 구어(口語)를 잘 보호하고 다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3. 한자사용과 관련된 나의 의견 한자사용과 관련된 나의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이것은 매우 절충적으로 보이지만 언어생활에서는 순결주의보다는 절충적인 것이 많은 경우 더 바람직하다. - 초중고생에 대한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대학의 문과와 이과의 한국어로 된 대부분의 교재를 비롯한 전문서적들에 한자사용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 신문이나 시사잡지 등 전문용어가 부분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으면서 동시에 대중성도 띠어야 되는 매체에서는 지금보다 한자를 조금 확대하기는 하되 불필요한 경우까지 많이 확대하지는 말며 오락성 잡지의 경우 아주 특별히 한자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 - 한자사용의 확대로 인한 구어(口語)의 혼란을 막고 보호하고 더 다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구어(反口語)적인 한자어를 퇴출시키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 어려우면서 꼭 필요하지 않은 한자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 외국인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은 관광객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며 한자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로서 계속 추진해야 한다. - 한자를 부활시키는 운동이 보수주의나 복고주의와 결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한자사용운동이 서방어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해롭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