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4일 금요일 오전 02시 33분 45초 제 목(Title): 논쟁/성낙주 영어공용화론 반론 영어공용화론은 민족의 생존을 담보로 한 환상이다 성 낙 주 54년 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 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94년 복직. 현 노원중학교 국어교사 종교소설 [차크라 바르틴]으로 제1회 '상상 문학상' 수상(살림 출판사), 역사소설 [왕은 없다](1 2) 출간(들녘 출판사) 비평 : 97년 '문화전사 유홍준의 미덕과 해악'([인물과 사상]2권), 98년 '석굴암을 위한 변명'([인물과 사상]7권) 불우한 명제의 탄생 세기말의 우울인가. 20세기도 막바지에 이른 98년 여름, 동아시아의 분단된 나라 남쪽에는 한 사람의 선지자가 출현했다. 그보다 2천 년 전, 황량한 유대의 광야에서 홀로 '때'가 왔음을 목놓아 부르짖던 세례 요한처럼 선지자는 그때껏 아무도, 정말 감히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영어공용화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이 땅의 민족어 - 수천 년간 갈고 다듬어져 피와 살이 되어 있는 모국어를 버리고, 한시바삐 '영어 제국'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 선지자의 음성은 차분했으나 절박했으며, 우중(愚衆)들이 통찰력에 가득한 자신의 탁견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진즉 예견하고 우울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닥쳐온 위기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그들 우중은 감사의 꽃다발은커녕 야유와 조소로 일관했다.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 실린 선지자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가는 나라가 파멸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 자명한 데도 말이다. 실제로 선지자의 충직한 제자이기를 자처하는 고종석은 [인물과 사상] 8권의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에서 이렇게까지 호언했다. " 영어가 공용어가 되는 데에 다섯 세대까지 걸릴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된 사람들이,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한국에서 복거일이라는 사람이 영어공용화론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제안이 커다란 비판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몹시 의아스러워할 것이다. 그 제안의 지당함과 그 지당함이 맞닥뜨렸던 저항에 말이다." 사실, 영어공용화는 그 자체로 인류 문명사에 한번도 없었던 혁명적이고도 실험적인 패러다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영리한 사람들'은 '손에 피를 묻히기'가 싫어 이 논쟁을 회피하고, '지적 미숙아들'만 끼어 들고 있다고, 고종석이 이미 우리 지식 시장의 비겁함과 협량을 개탄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이 논란을 외면했다. 그 논거의 증빙 자료들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 외에도 내용이 너무 황당하다는 이유였다. 그러한 판단 하에서 필자는 부득불 또 한 명의 '지적 미숙아'가 되기로 작정했다. 복거일, 그의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난 불우한 명제 - '영어공용화론'에 내재되어 있는 자가당착과 함께, 그 기본 발상의 밑바닥에 어른대는 파시즘의 환영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은 위의 두 사람의 글과 함께 [시대정신] 창간호에 실린 김영환의 <영어공용화는 사회발전의 피할 수 없는 요구이다>를 주 대상으로 삼았다. 민족주의를 제어하자? 영어공용화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복거일이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민족주의' 문제를 비켜가는 것은 그의 충정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실' 민족주의에 대한 몇 가지 논란을 한 번쯤 걸러내야 할 필요성도 있거니와, 다름 아닌 공용화론의 전진기지(前進基地) 구실을 바로 그의 '민족주의 제어론'이 하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과잉'된 민족주의의 제어를 주장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민족주의가 과거에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는 측면보다는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이 훨씬 많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지금의 우리 민족주의가 국민 개개인의 삶과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또 해가 되는지는 단순한 수치로 계량할 수 없거니와, 설령 그것이 '과잉' 현상을 보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역사적 인과(因果)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전체주의와 국수주의의 만남을 복거일 이상으로 비판한다. 예컨대 74년도 광복절에 발생한 문세광 사건 당시, 박정희는 문세광 수사에 일본 쪽의 협조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반일 감정을 촉발시켰는데, 중고생들까지 거리로 유인했고, 일부 애국애족에 불타는 반일 전사(反日戰士)들은 손가락을 잘라 극일(克日)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5공 시절의 '일본 교과서 파동' 역시 전두환 정권이 취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 감정을 동원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즉흥적이고 어설픈 김영삼 정권의 '독도(獨島) 외교'나, 국수주의자들의 '만주(滿洲) 실지 회복 운동' 등을 도마에 올린 복거일의 차분한 논리에는 분명 경청할 부분이 없지 않다. 인접 국가들과의 예민한 외교 현안이 민족 감정의 차원에서 접근해 해결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의 파행적인 정치 구조가 낳은 행태들을 두고, 민족주의 자체를 싸잡아 질타하는 것은 문제 제기의 설득력을 스스로 약화시킨다. 민족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화시킬 대상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힘을 모아 극복해내야 할 전체주의와 국수주의가 그 안에 뒤범벅이 되어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역기능과 순기능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제도, 현상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역기능만 과대 포장하여 배제하기로 든다면 이 세상에 온존할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현대사에 군(軍)이 끼친 해독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30년간의 군부 독재가 남긴 정경 유착과 지역 감정, 획일화된 사고 방식 등 부정적 유산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게 오늘의 우리 실정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군을 해체할 수 없을 뿐더러, 군의 민주화를 추구하고 문민 우위의 확고한 리더쉽 창출을 기하는 등 그 순기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애쓰고 있다. 국가 권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인류는 권력을 없애겠다는 비현실적인 몽상에 잠기기보다는 삼권분립과 언론의 비판적 기능 등을 통해 권력의 긍정적 가치를 제고시키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민족주의와 관련한 우리의 접근 방식도 다를 까닭이 없다. 역기능은 최소화하고 순기능은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방식이 있을까. 복거일은 서양 근대사에 빗대어 민족주의가 19, 20세기에야 비로소 발전한 것처럼 진술하는 한편,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동구권에 불어닥친 종족 분쟁을 통해 민족주의의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의 대상이 된 시점과는 무관하게 민족, 또는 종족 단위의 삶은 인류사의 가장 보편적인 양상이었다. 의식주에서부터 관혼상제, 세시풍속, 언어, 문학, 예술 등의 모든 것이 민족이라는 요람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꽃을 피웠다. 종교 전쟁의 외피를 쓴 예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전쟁도 본질적으로는 민족간의 분쟁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도, 몽고족과의 전쟁이나 임진왜란 등 수많은 전쟁이 이웃 민족과의 충돌로 빚어지지 않았던가. 그만큼 부인할 수도 없고, 부인되지도 않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민족 구성원들간의 끈끈한 유대감이다. 민족 감정이 얼마나 야만적이냐, 또는 비이성적이냐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는 실제에 있어서 별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복거일이 비판한 구 유고 지역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에서도 민족주의의 '징그럽도록' 질긴 생명력을 역으로 유추해낼 수 있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보스니아의 비극 이면에 숨겨져 있는, 소련 제국주의의 탐욕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 지역의 역사나 종교, 민족 구성 등 일체의 조건을 무시한 채 여러 민족을 하나의 체제 아래 억지로 묶어놓은 데서 뒷날 그와 같은 비극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사태의 원죄는 소련 제국주의 파시스트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온당하다. 아프리카의 여러 분쟁에 관해서도 우리는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서구 열강이 자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지도 위에 그어놓은 직선은 지금도 그들 나라들의 국경선이 되어 있고, 더없이 어리석게 보이는 그들 종족간의 참혹한 유혈극이야말로 거기서 연원한다. 과거 서구 열강이 저지른 업보를 오늘날 아프리카인들이 대신 치르고 있는 셈이다. 독도 문제 역시 한일 양국의 역사적 배경과 따로 떼어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일본 극우파의 빈발하는 망언이나 정신대(挺身隊)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그들의 후안무치를, 오직 경제적 실익을 위해, 또는 미래 지향의 선린 관계를 위해 모른 척한다면 그것은 굴종이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는 상대적이며, 적어도 민족주의에 관해서 만큼은 우리보다 일본 쪽에 촉구해야 할 부분이 더 많다. 그래도 복거일은 '열린' 민족주의는 강화하고 '닫힌' 민족주의는 경계하자고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흔히 종교사를 보면, 교조(敎祖)에 비해 그 제자가 훨씬 과격하게 흘러 교조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듯 여기서도 같은 현상이 목격된다. 고종석이 바로 그 '과격한' 제자에 해당하는데, 우아한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그에게는 자기 스승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균형 감각마저도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열린 민족주의'란 '날카롭고 무디다'는 어원 그대로의 옥시모론(모순어법)이고, '닫힌 민족주의'란 말에서 '닫힌'은 잉여적이다. 모든 민족주의는 닫혀 있다. '닫혀 있음'은 민족주의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열린 민족주의'는 이미 민족주의가 아니다. 볼세비즘이 그렇듯, 민족주의는 가장 나쁜 특수주의 가운데 하나다." 고종석의 지론은, 민족주의란 본질상 국수적이고 전체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오직 자유주의만이 가장 이상적인 세계시민국가 - '지구 제국'을 앞당긴다는 데에 있어 보인다. 그는 자기 스승이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민족주의가 오직 청산해야 할 만악(萬惡)의 근원일 뿐이다. 민족주의는 통일의 에너지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무조건 매도해도 되는 건지, 또는 오늘의 우리 상황이 그것을 용도 폐기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한가로운지를 살펴보자. 굳이 재언을 요하지 않지만, 이 땅의 20세기는 외세의 침탈로 그 전반부가 얼룩졌고, 후반부는 민족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 처해 있다. 강대국의 야욕 때문이든 민족 역량의 한계 때문이든 남과 북의 대치라는 불행의 역사가 반세기 이상 우리 민족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으며, 남북 통일은 이 시대 우리에게 부여된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올라 있다. 그런데, 민족주의가 만악의 온상이라면, 그래서 폐기해야 마땅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통일을 지향할 아무런 이유나 명분이 없다. 통일에 관한 한 민족주의를 능가하는 어떤 당위도, 논리도, 이데올로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세계 평화를 애호하는 차원에서 북녘 동포를 보고 통일하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복거일의 지적대로 맹목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의 통일 논의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분단 상황이 남북 양쪽 구성원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악용되어 왔음도 우리는 망각해선 안 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양쪽의 정치 체제는 바로 분단 현실을 이용해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구축하였고, 경직화의 길로 치달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단 극복은 남북 주민의 기본적 인권을 신장시키고, 그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주의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 최우선의 선결 조건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때 통일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민족주의란 우물에서 길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한 까닭에 민족주의의 폐기와 같은 주장은 남북이 통일된 뒤에 제기해도 늦지 않다. 아니, 통일 이후의 우리 국경이 중국과 러시아와 맞닿게 되면 '과잉' 민족주의는 복거일이 우려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 그 때는 자유주의자들의 희생이 가장 심대할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 통일 국가의 정체(政體)가 국수주의나 전체주의 쪽으로 흘러갈 경우, 몸을 던져 막는 것이 이 땅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진정한 몫일 터이다. 또 하나, 일본의 국수주의나 중국의 중화주의, 혹은 유태인의 선민의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도 겉으로는 민족주의를 거두어들인 것 같지만 명백히 국가 이기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인종 차별을 들고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의 인도주의(人道主義)라는 것 역시 국익 아래서 얼마나 철저하게 표변할 수 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민족주의를 포기한다면 우리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그들 강대국들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우리가 벗었으니, 너희들도 벗어라!' 하고 그들을 강제할 수단이 우리에게는 없지 않은가. 이렇듯 제아무리 먼저 벗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민족주의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민족 통합을 위해 스스로 형극의 길을 걸어간 김구 선생 이래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욕보이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니다. 또한 근세 이전 역사의 격랑 속에서 외세로부터 민족의 터전을 지켜온 선조들의 고단한 투쟁과, 민족의 문화와 예술과 규범과 언어를 가꿔 온 그들의 노고에 함부로 회칠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폐증(自閉症)에 걸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군(軍)에 관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민족주의는 무조건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더욱 성숙시켜야 할 대상이다. '과잉' 세계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과잉' 적개심에 필자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영어는 '국제어'일 뿐이다 복거일이 주장하는 영어공용화론의 주요 논거는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현재 날로 강화되는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비중으로 볼 때 머잖아 각 민족마다 불가불 영어와 민족어를 함께 사용하게 될 것이며, 끝내는 민족어들이 쇠퇴하고 말 것이라는 단언이 그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맞이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좀더 능동적인 자세로, 당장은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셀 터이니 단기적으로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가, 궁극적으로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먼저 김영환이 정리해 놓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의 배경부터 알아보는 게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고 국가간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 해질수록 국제어는 더욱 중요해진다. 국제어로서 영어는 이미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는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점점 더 굳히게 될 것이고, 영어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 영어는 20억 가량의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들에서 공용어로 채택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고 또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제 1 외국어로 채택되어 있다. 또 국제 상거래의 대부분이 영어를 이용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국제회의도 대부분 영어로 하고 있으며 기타 대부분의 행사들이 영어로만 혹은 영어와 주최국의 언어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또 중요한 대부분의 국제학술잡지들이 영어로 되어 나오고 있으며 중요한 서적들도 거의 대부분 영어로 쓰여 있거나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인터넷 세계를 영어가 완전히 장악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아이들도 아는 상식으로, 문제는 복거일이 직접 언급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국제어(영어)와 민족어는 무한정 계속 공존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언어사용 습관에 따라 어느 한 언어는 점점 약화되어 인간생활의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인류 생활 환경의 발전 상황을 볼 때 쇠퇴하는 쪽은 반드시 민족어가 될 것이다. 민족어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보존되고 계승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들로 남을 것이다." 불이 한창 타오를 때 보면 그 불이 쉽게 꺼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은 언제인가는 꺼진다. 현재 영어의 힘이 아무리 세차도 불과 반세기밖에 안 된 현상이며, 영어 이전에도 하나의 문명권 안의 지역들을 더욱 오랜 기간 활보한 국제어들의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로마 시대 사람들은 라틴어가 쇠퇴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의 영어가 갖는 국제어로서의 위상과 중세 유럽에서의 라틴어는 그 사정이 다르다고 차별성을 강조하겠지만, 그 차별성의 정도가 모든 민족어의 자리를 영어가 빼앗을 것이라는 입론의 근거로 삼기에는 더없이 미흡하다. 지구 위의 모든 민족어들이 '박물관 언어'가 되리라는 진단도, '당신은 지금 암에 걸렸으니 꼭 죽고 말 것이다'라는 말과 똑같은 논리의 비약을 안고 있다. 개체로서의 생명체뿐 아니라 각 민족 단위의 언어들도 나름대로 진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중에는 통사구조나 어휘 등 모든 측면에서 영어 못지 않은 고등 언어들도 적지 않다. 그런 양상은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아, 현재의 민족어들 중에서 일부는 쇠퇴 또는 소멸의 길을 걷게 되겠지만, 탄탄한 민족어들은 새로운 언어 환경에 부단히 적응해 나갈 것이다. 오히려 영어나 이웃 언어들과의 활발한 교섭 속에서 보다 풍부한 양태를 보이면서 발전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역할은 한층 더 강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다른 언어가 부상해 국제어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 여기서 '국제어'라 함은 그것의 도구적 성격을 뜻하는 것으로, 현재 영어는 정보와 의사 소통에 유용한 수단일 뿐, 그 이상의 기능 - 민족어만이 갖는 끈끈한 정서적 밀착성 - 까지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민족어의 자리는 아무 언어나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점에서 민족어와 국제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복거일의 과장 어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거일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으면 난리가 날 것처럼 위기를 자가 발전(自家發電)했다. "국제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보는 손해는 너무 커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들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영어가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됨에 따라, 영어를 자연스럽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입을 손해는 빠르게 커질 것이다. 그래서 단 몇 십 년 뒤엔 민족어를 모국어로 가진 것은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터이다." 복거일은 '가상 현실'에 빠져 함부로 민족어를 모독한 셈인데, 김영환은 한술 더 떴다. " 변화한 세계의 언어 환경에서는 민족어가 시원찮아 할 수 없이 영어를 받아들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들은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는 반면 우리는 각고의 노력을 거쳐 발전시킨 고등언어(한국어)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3∼40년 후의 우리 나라의 국가 경쟁력이 필리핀보다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순전히 언어 때문이다." 모국어가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표현부터 납득하기 어렵거니와, 단지 영어와의 관계만을 놓고 필리핀과 우리의 장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한 국가나 민족의 흥망이 정체성 확보와 함께 그 내부의 에너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총합시킬 것이며, 대외 관계에 있어 얼마나 탄력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어공용화론이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확보하려면, 예컨대 많은 주(州)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인도의 전 근대적인 빈곤 문제, 전후 일본의 경제 부흥, 70년 대 이후 개방 정책을 취한 중국의 경제 팽창 등과 영어와의 사이에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필자는 아직 그들 나라의 국력이 그리는 싸이클에서 영어와의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어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숭배할 까닭도 없다. 영어가 유력한 국제어임을 인식한 다음, 탐욕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또 효율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주장에도 백 번 동의한다. 그러나 영어를 열심히 배운다는 것과 그것을 공용어로 채택한다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게다가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국가간의 역관계가 바뀌어, 예컨대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고 중국어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중국어의 품에 안겨야 하는가. 영어공용화론의 심리적 풍경 복거일은 CNN 방송까지 들먹이면서 영어를 모르면 '실질적 문맹'이 된다는 자못 위협적인 언사까지 선보였다. 특히, 2세 교육에 관한 복거일의 주문은 거의 협박 수준에 육박했다. "만약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영어로 구체화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향유하지 못하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얻지 못하고 뒤늦게 오역이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도 이용 가능한 정보들의 몇 십만 분의 일이나 몇 백만 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 단지 모국어와 영어의 사용 여부만 가지고 개인의 행복과 그 삶을 비교하는 것부터 무리할 뿐더러, 우리 국민의 '과잉'된 교육열에 편승한 이런 식의 무리한 논리 전개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했다는 면에서도 비난을 면키 어렵다. 위의 가정 어법이 얼마나 치졸한가는 다음의 패러디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만약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서울대와 비서울대 가운데 하나를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이 땅의 패거리 문화에 힘입어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서울대를 못 들어가서 기회가 와도 놓치기 일쑤며 불이익 속에 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요컨대, 복거일의 시각에는 현상을 타파하려는 어떠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현실 추수주의에 빠져 그것을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키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위의 질문에는 '지식 우상화'나 '정보 지상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길 뿐 아니라 침소봉대의 혐의도 지울 수 없는데, 기실, 한 개인이 일생 동안 필요로 하는 정보의 양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너무 과도하게 흘러 넘쳐서 쓰레기 같은 정보들에 둘러싸인 채 자아를 상실하고 지향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게 현대인의 초상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모국어만 갖고도 필요한 정보의 습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 불편하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국제 회의에서는 동시 통역이라는 수단이 더욱 진전될 것이고, 인터넷 안의 정보도 자국어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현재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음성 인식 시스템을 보면 그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과학 기술의 발달사는 언제나 그렇게 쓰여져 온 것 아닌가. 더욱이 포화상태라는 게 있다. 인간 사회의 중층 구조를 볼 때도 한 사회의 고급한 영어의 수요는 한정되어 있다고 보는 게 상식에 맞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간단한 영어 실력만 가지고도 별다른 불편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공용화론의 밑바닥에 깔린 심리적 풍경도 한번쯤 짚어볼 만한 대목이다. 일제 강점기의 많은 '선지자'들은 우리말을 버리고 일본어 학습을 강요했다. 그들 친일파들은 민족의 발전을 말했고, '어리석은' 민족주의자들을 긍휼히 여겼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일본이 세계를 제패할 텐데 어쩌자는 건가. 협량한 민족주의는 빨리 청산할수록 좋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황국신민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자면 창씨개명을 거부할 이유가 없으며, 한글과 한국어도 버려야 한다." 그들 중에는 이광수 같이 시대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민족의 장래가 암울하게만 보였기에 <민족 개조론> 같은 책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복거일도 한국 사회가 보이고 있는 일련의 위기 상황에 절망했을까. 그는 어느 일간지에다 IMF 사태가 우리가 영어를 못 해서 자초했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편 바도 있는데, 영어 문제를 해결 못하면 그 이상의 사태도 가능하다는 불안과 우울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그의 충정만큼은 십분 이해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일제 때의 '선지자'와 그 심리적 풍경이 너무나 흡사하기에 걱정이 앞선다. 실현 불가능한 영어공용화 그러면 영어공용화가 실제로 우리 현실에 적용 가능한 것이긴 한가. 김영환의 말을 들어보자. "일단 영어가 공용화 된다고 한다면 교육과 관련해서는 아주 확실하고 일관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에 대해 별로 좋은 방법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홍콩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영어학교와 한국어학교를 각각 두고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정부는 영어중심의 단일한 교육체계를 마련해서 특수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일종의 과도기적인 조치인 셈인데,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일까. 쉬운 예로, 교사 수급 문제에서부터 김영환의 제안은 벽에 부닥친다. 이 땅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영어로 수업하려면, 최소한 지금의 교사 숫자인, 영어를 한국어보다 잘 하는 40만 명의 교사부터 확보해야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들을 확보할 길이 막막하다. 수십만 명의 미국인 - 그것도 각 교과별로 전문성을 갖추고도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일정한 식견이 있는 고급 인력 - 을 집단으로 수입해서 우리 교단에 세우지 않고서는 '영어 중심의 단일한 교육 체계' 운영은 절대 불가능하다. 지금의 우리 교육자들을 일거에 정리해고 하는 일 따위는 무시하더라도 말이다. 혹,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안을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그 방법 역시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구차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 가지 경우만 보더라도, 공용화론이 얼마나 졸속이고 허구적인 것인지 충분히 입증된다. 필자는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너무나 안이하고 경솔한 사고 방식 자체에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 그들의 주장에서는 그 주장의 무게에 걸맞은 최소한의 진지함과 구체적인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더 나아가, 영어공용화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지불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도 고종석이 호언한 바대로, 단 몇 세대 안에 그 사업이 종료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외국어 학습의 고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만 해도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영어에 빼앗기고 있고, 강박 관념에 짓눌려 살고 있다. 공용화란 바로 그 고통을 일상화하자는 것이고,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하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공용화론자들은 무슨 권리로 이 땅에 태어난, 또 장차 태어날 모든 사람들에게 고문에 가까운 고통을 안기려고 하는 걸까.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쉬워서 탈이었을까. 전 국민에게 가혹한 형벌이 될 것이라는, 그래서 개인의 행복에 엄청난 장애로 기능한다는 측면에서도 영어공용화는 잘못 태어난 불우한 명제이다. 그들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우리의 전 국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적어도 몇 세대에 걸쳐 영어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는 동안에, 다른 나라들은 영어 공부는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 하는 한편, 맘껏 전문 지식을 쌓고 자국어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우리를 여유 있게 앞질러 갈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자유주의자들은 지식인의 가장 못된 습성인 허위의식과 자기만족에 빠져 이러한 실상을 외면하고 있다. 영어공용화론에 숨어 있는 파시즘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공용화론의 가장 큰 함정은 '언어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과연 인간의 언어는, 그것도 민족의 수천 년 내려온 말과 그 문자는 단숨에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복거일과 고종석은, 유대인들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가능한 양 말했지만, 유대인들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처한 조건이 다르다. 한 방울의 빨간 물이 호수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동화된다. 전세계를 뿔뿔이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그런 경우였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넘어뜨리고 중원을 차지했던 청의 만주족(滿洲族)이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거대한 호수 속에 떨어진 빨간 물방울의 신세였고, 그 지역의 민족어에 동화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강제된 공부가 아니었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동화와 적응의 결과였다. 누구든 미국에 이민을 가면 두 세대 안에 영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의 미국은 호수이고 이민자는 빨간 물방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호수이다. 빨간 물방울 몇 점을 떨군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빨간 물로 변할 거라고 기대한다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국어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다. 국가권력이 총동원되어 감시하고 고발하고 처벌하면서, 그것도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추진한다고 해도 될까말까한 일이다. 남북을 합쳐 7천만 명이 사용하는 우리 모국어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상황일지는 일제 때 한국어와 한글 말살 정책의 악몽을 떠올리면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지금 세계의 언어 중에서 영어권, 불어권, 스페인어권 등으로 구분되는 지역은 제국주의 시대의 강압적인 식민 정책의 유산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모국어는 힘의 강제가 없으면 바뀌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화론은 뜻밖에도 파시즘과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김영환은 영어의 공용화를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 되고, 국민투표를 해서 80% 이상의 지지가 있을 때 추진되어야 한다고 했다. 딴은 대단히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처럼 보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유신 때 박정희가 선호하던 '국민투표 만능주의'의 복제형이다. 공용화를 국민투표의 대상으로 삼는 것부터 무리지만 설사 80% 이상의 높은 지지로 통과되었다 할지언정, 나머지 20%의 국민들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아니, 단 1%의 국민 - 남한만 해도 42만 명이다 - 이라도 끝까지 우리 한글과 모국어를 지키겠다고 버틴다면, 그들을 소수 인종으로 몰아 이 땅에다 또 하나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와 같이 영어공용화에는 애초부터 국론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적어도 처음 몇 세대 동안은 국가의 안정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문화적 충격에 따른 극심한 정서장애 속에 국민들은 총체적인 심리적 공황 상태를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영어를 거부하는, 또는 영어학습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과의 일대 전쟁을 각오해야 할는지도 알 수 없다. 얼마 전의 보도만 보더라도 이런 염려가 공연한 엄살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로 얘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교통 범칙금 딱지를 떼이는 '언어 차별' 사례가 빈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같은 '영어 전용(English Only)' 강요의 배경에는 아시아와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에 대한 백인 주류사회의 '감정'이 게재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민의 나라' 미국의 다인종 다문화 전통이 무너지는 한 단면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문화일보 12월2일) 영어가 우리 사회의 주류 언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언어 차별을 통해 한국어를 사용하는 동료를, 혈육을 사회로부터 몰아내는 범죄에 가담해야 할지 모른다. 김영환의 말을 더 들어보자. " 일단 영어공용화가 실현된 다음에는 국민의 권리, 의무의 차원에서 영어공부를 다시 보아야 한다. 이 경우 영어공부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영어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내는 것이 국민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국민된 도리'란 말은 유신 때 많이 들어본 소리려니와, '국민된 도리' 때문에 내 나라의 말과 글을 버리고 남의 말과 글을 억지로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파시즘적인 사고의 전형이다. 기실, 김영환은 거리낌없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자유'로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보다 '개인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책임과 의무'가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특히 판단 능력이 미숙한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보할 수도 있다는 궤변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나치이고, 스탈린주의이고, 일본 군국주의며 유신 체제가 아니었던가. 아우슈비츠를 이 땅에 지어야 할 모양이다. 자유주의 이념에도 배치된다 공용화론자들은 자신들을 일러 자유주의자라고 하고, 자유주의의 미덕을 찬미해 마지않았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유를 큰 가치로 여기고 개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적 강제를 줄이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민족주의는 민족적 특질들에 따라 개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복거일의 말인데, 필경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주의가 관철되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의미일 터이다. 고종석은 언어도 자유 시장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지나친 '언어 순결주의'를 파시즘의 한 징후로 단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국어 순화운동'을 비판하면서, 언어는 그 자체의 속성과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일본어 찌꺼기든 영어든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모국어를 살찌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인데, 외래어를 걸러내려는 시도 자체가 민족주의의 과잉, 즉 파시즘적인 사고에서 나왔다는 관점이다. 필자도 일부 지점에서는 고종석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논의를 확대해 개별 민족어들의 세계에서는 그 자유주의가 과연 어떻게 적용되어야 좋은지 생각해 보자. 복거일의 자유주의에 대한, 또 고종석이 주장하는 '언어의 자유주의'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옳다면, 일단은 개별 민족어들의 개성과 특징이 존중되고 그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를 위해 '사회적 강제'를 줄이듯이 언어의 세계에서도 '사회적 강제'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바르다. 그런데 어느 특정 언어가 팽창을 거듭해 다른 작은 언어들을 고사(枯死)시키는, 그래서 언어 시장이 심각한 교란 상태에 빠지고, 언어의 획일화라는 뜻밖의 사태가 예견된다면, 그 때도 시장 원리를 내세워 방임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입해야 하는가. 필자의 판단으로는 직접 개입해서 방어에 나서는 게 가장 온당하다. 왜냐 하면 언어 시장의 획일화라는 것은 특정 언어의 독점 체제 구축을 뜻하고, 개별 민족어들의 개성과 다양성이 보호되지 못하고 말살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유주의 이념에 입각한다면, 설령 특정 언어가 세상을 뒤덮는 한이 있어도 자유 방임 원칙에 따라 내버려두어야 한다. 언어의 '자유 시장'을 인위적으로 흔드는 건 그 거룩한 자유주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이 땅의 자유주의자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장차 민족어가 쇠퇴할 확률이 높으니, 우리 스스로의 주도적인 결정으로 그 시기를 앞당겨 '인위적'으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것이다.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민족어를 개조하자는, 파시스트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저주의 주문(呪文)을 거리낌없이 내뱉고 있는 것이다. 외세든 파시스트든 그런 해괴망측한 정책을 강요한다면 온몸을 던져 막아야 할 자유주의자들이 말이다. 위에서 복거일은 "민족주의는 민족적 특질들에 따라 개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장애인이나 성, 학력, 지역, 인종, 종교 등 무수한 차별의 그물망이 문제라면서 '언어 차별'은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민족어를 개조하자는 논리보다 더 심각한 언어 차별은 없을 터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면, 그들 자신의 이념적 토대인 자유주의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이러한 자가당착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자유주의자들의 이상 사회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유토피아들이 공상론자들의 머리 속에서 명멸을 거듭했다. 그 복음(福音)에 현혹되어 세상이 몸살을 앓은 일도 종종 있지만, 거개가 한 때의 소동으로 끝나고 그들은 역사의 뒤편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공상론자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현실에 대한 진단도 그 처방도 지극히 주관적인 환상에 갇혀 무책임한 전망을 남발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한 때 이 땅을 풍미한 극좌파의 열변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고, 한민족(韓民族)의 역사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도 우리 땅이었다는 식의 국수주의자들에게서도 보고 있다.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휴거 소동도 그 한 예에 속할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강자, 또는 절대자에 대한 숭배이며, 콤플렉스에 빠져 자신을 실체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학대한다. 그들은 강자(절대자)의 품에 안겨야 안심이 되고, 실현 불가능한 그러한 세계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과장하고 동경한다. 김영환은 자신의 글 말미에서 영어가 인류를 통합하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다. "만약 언어통일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의 거대한 혁명이요, 위대한 창조가 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류는 신이 내린 형벌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멀지 않은 장래에 증명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식의 순진무구한 세계관에 실소와 함께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온 세상 사람이 하나같이 영어를 주절거리는 것이 거대한 혁명인가. 어느 나라 영화를 보던지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영어로 말하는 것이 위대한 창조인가. 어느 나라 가수 공연을 보아도, 어느 대륙을 여행하더라도 영어로 노래하고, 모든 TV에서 영어가 쏟아져 나와야 진보인가.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세상의 모든 아침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해야 이상 사회인가. 재앙이다. 모든 개성의 말살이기에 끔찍한 저주이며, 모든 민족 문화의 고사(枯死)이기에 수만 년 인류 문명의 몰락이다. 그런 상황은 언어를 잃어버린 만주족이 사라져 갔듯이 종족 자체가 멸종된 것이고, 모든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획일화의 늪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소름 끼치는 인종 청소이다. 그러한 세상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언필칭 자유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의 존재 이유와 개성과 그 정서적 바탕까지, 대륙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지구 곳곳에 꽃 핀, 수천 수만 년의 기나긴 도정에서 가꿔온 민족 문화들을 깡그리 짓밟는 이 모순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차원에서, 공용화론자들은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 진정 이 세상에는 강한 것만이 살아 남아야 하는가. 약자는 언제나 강자 앞에 무릎 꿇어야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개성과 역사를 알아서 헌납해야 하는가. 못난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죽어 주어야 하는가. 그게 유토피아인가. 언어의 세계에서도 약한 언어는 무조건 없어져야 하고, 강한 언어 하나만 남아야 하는가. 설령 현실이 그런 추세라 할지라도 그것을 찬미하고 앞당기려고 몸부림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미국인들이 지금의 이런 우리 모습을 본다면 귀엽다면서도 경멸에 찬 미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현재, 세계의 여러 기구들은 소수 종족의 보호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민족 문화를 지키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우리도 멸종되어 가는 동식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전통 문화예술을 되살리려고 애쓰고 있음은 내남없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노력들이 죄다 공연한 짓인가. 가까운 예로, 우리 영화계의 현안이 되어 있는 스크린 쿼터 제도도 무조건 철폐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스크린 쿼터 제도는 우리 영화의 질식사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 아닌가. 개방론자들은 자유 시장 원리를 내세우지만, 그 안에 강자의 논리 - 미국 허리우드 대자본의 탐욕이 숨어 있음은 뻔히 아는 일이다. 미국을 중심부로 한 세계의 불평등한 구조하에서 주변부 국가의 '순진한' 자유주의 찬미는 강대국의 이익에 복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유시장원리 - '시장 근본주의'는 결코 '절대 선'이 아니다. 한계를 모르는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기로 몰아 넣을 것이며, 그 점을 인식한 선진국 일각에서 그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대안을 모색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의 참된 가치는 강자에 대한 선망보다는 약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못나고 불필요하고, 불편하게 보이는 것들까지도 함께 끌어안고 가고자 하는 데에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면 파시스트들은 바로 그런 못나고 불필요하고 불쾌한 것들을 청소하는 일을 자신들의 신성한 책무로 여긴다는 점에서, 양측의 입장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바로 이 지점에 양측이 영영 화해에 이를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복거일은 과잉 민족주의의 제어를 주장했지만, 제어해야 하는 것은 민족주의뿐이 아니다. 방종으로 치닫는 자유주의의 무책임도 당연히 제어해야 한다. 민족주의든 자유주의든 세계주의든, 혹은 우파든 좌파든 그 외연이 극단적으로 확장되면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파괴한다. 영어는 국제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어는 모든 민족어의 자리를 강탈할 수도 없고, 그렇게 흘러가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 영어의 독점 체제 - '영어 제국'은 또 하나의 병영이고,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며, 서양 중세의 암흑이다.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한, 자유주의는 이미 자유주의가 아니다. 언어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문화의 획일화를 초래하는 것이기에 파시즘의 변종이며 파시즘의 전위대다. 영어공용화 뒤에 오는 것 여기서, 한 백 년 뒤쯤 영어가 우리의 공식 언어로 자리잡았을 때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물론 그때의 영어는 현재 영어가 갖는 국제어 수준의 언어가 아니다. 그때는 이미 영어가 우리의 완벽한 모국어가 되어 있고, 지금 우리가 쓰는 진짜 모국어는 그들의 예언대로 '박물관 언어'가 되었거나 아주 망실된 뒤의 상황을 말한다. "우리는 아주 쉽게 우리 선대들이 사용해 오던 문자 언어들을 버렸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문으로 기록된 글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 중에 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선조들의 문화 유산, 그것도 오래된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근래의 문화유산들을 직접 접하지 못한다고 해서 큰 일 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같은 반문화적인 발언의 주인공은 김영환이다. 한문으로 기록된 우리의 민족 유산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녔거니와, 근대에 와서 한문이 배격된 까닭은, 비록 2천 년 가까이 사용해 왔음에도, 그것이 끝내 우리말과의 화학적 결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우리말의 질긴 생명력과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생생한 증거인데, 우리말에 맞지 않던 한문이 그 자리를 뒤늦게 나타난 한글에게 물려주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한 대체(代替)가 아니었다. 우리 역사상 비로소 처음 서로서로 피와 숨이 통하는 말과 문자가 '완전한 만남'을 이룬 것이고, 그 뒤로 우리의 모국어는 단시일 안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빌려쓰던 남의 문자를 버리는 것과, 우리 문자(한글)와 그 문자의 모태로서의 우리말(한국어)을 한꺼번에, 송두리째 버리는 것은 그 무게가 천양지차이다. 한편 한문 폐지는 일정 부분 역사와의 단절을 초래했고, 민족 정체성의 측면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한문 폐지가 애석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유의하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다시 영어공용화가 추진된다면, 근세 이전의 것은 그만 두더라도 최근 일 세기 동안의 우리 한글 유산들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을 몽땅 쓰레기통에 쳐 박아야 하는지, 혹은, 영어로 번역하는 소동을 또 한바탕 치러야 하는지 . 다음의 상상 자체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유치하고 무모한 발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하나의 담론이 얼마나 정교한지 엉성한지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때 더욱 확연해지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후손들의 이름부터 문제다. 후손들은 철수니 영숙이니 하는 이름을 다 버리고 'Madonna'니 'Michel'로 바꾸었을까. 아이들 입에서는 "아빠! 엄마!" 대신 "Mother! Father!"라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백두산(白頭山)은 'White Head Mountain'으로, 한강(漢江)은 'Great River'로 부르고 있을까. 종달새는 'Nightingale'이라 부르더라도 진달래꽃은 어떻게 부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때 가면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들의 성과 이름을 보면서 외계인의 이름이라도 보듯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정말 필자가 좋아하는 노래 '명태'와 정지용의 '향수'는 영어로 번역해서 애창하고 있을지 도무지 감감하다. 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발음이 어려워 버렸는지,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나 황진이의 '동짓달 한 허리를 ',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는 들어보았는지. 임방울이 부른 '쑥대머리'의 그 절절한 노랫말은 그들 가슴에 어떻게 가 닿을지. 아니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나랏말돑이 중국과 달라 "는 혹 주당 한 시간 짜리 조선어 시간에라도 배우기나 하는지 . 기실, 이런 염려 자체가 공용화론자들에게는 대단히 촌스러운 짓으로 비치리라는 사실을 필자는 알고 있다. '우아한' 세계시민주의자 고종석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는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민족과 민족어 '죽이기'임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이런 대목에서 필자는 실망과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고종석은 민족을, 민족어를 혐오하는 것도 부족해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에게는 민족이나 민족어는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할, 저절로 없어지지 않으면 '손'을 봐서라도 없애야 할 대상일 뿐이다. 고종석의 인류애가 어느 정도 심오한지는 알 바 아니지만,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큰 것에 앞서 작은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인류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먼저 민족이 소중하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도 소중하며, 우리 민족이 남긴 못나고 부족한 것들한테 솔직히 더 애정이 간다. 이것도 '닫힌' 민족주의일까. '지적 미숙아'인 필자로서는 모국어와, 모국어로 창조되고 기록된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과의 결별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함에 있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때의 우리 민족은 고종석의 소망대로 탈민족(脫民族)이 실현되어, 우리 나라는 '영어 제국'의 수도인 미국의 변방의 한 작은 성채로 전락해 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말이다. 우리의 모국어는 우리의 살과 뼈이자 우리의 골수(骨髓) 그 자체이다. 아울러 우리의 역사와 정신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물이자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더욱이 한글은 언어학자들의 증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체계 위에 서 있다. 모국어에 관련해 우리에게 부과된 유일한 책무가 있다면, 부족한 점은 다듬어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덜어내면서 더욱 성숙시키는 일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언어 시장에서 그 고유성과 과학성과 철학성을 인정받고, 지금보다 발전시킨 상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족하다. 한문을 숭상하고 한글을 멸시한 조선조의 선비들을 우리는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고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 때의 어떤 선비도 말까지 중국어로 바꾸자고는 하지 않았다. 자주성에 관한 한 그들은 오늘의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어공용화론은 우리의 골수를 뽑아낸 자리에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하자는 망언을 넘어, '아메리카 드림'에 빠진 철없는 한 지식인의 자신의 철없음을 고백하는 낙서(落書)에 불과하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해서 영어공용화론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코앞에 두고, 혼돈과 무기력에 빠져든 한국 지식 시장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상징하는 한 장의 희화(戱畵)일 따름이다. 곤달걀처럼 '지적 미숙'의 상태에서 못 벗어난 무책임한 주장의 나열일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다른 많은 현안들까지 가려버리는 엉뚱한 부작용도 낳고 말았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당면한 IMF 위기 극복뿐 아니라 이 땅의 민주화를 정착시키고, 지역 차별 극복과 사회 각 분야의 합리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확립하는 일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극우 극좌파의 모험주의를 허물고 남북 통일을 지향하는 것도 빼어놓을 수 없는 목록이다. 얼토당토않은 논쟁에 휘말려 시간과 정열을 낭비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지배계층이 자기 자식들한테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그래서 그 2세들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는 동안 그 밑의 계층은 정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해 차별과 불평등을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고종석의 언급이 있었지만, 그것도 단견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상류층의 탐욕이 줄어들 리 만무할 뿐더러, 영어를 몰라 자식이 고생할 것을 걱정하기 이전에 환경 문제나 전쟁 억지 문제, 사회의 불평등 문제 등부터 먼저 개선시키는 것이 그 자식을 온전히 보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교육 현장의 비인간적인 환경을 바꾸어 아이들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일부터 하는 게 훨씬 더 실제적이다. 솔직히, 영어를 해봐야 우리가 얼마나 잘 하겠는가. 영어를 잘 한다고 주류 영어권에 끼일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공용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만큼의 정보가 우리 손에 쥐여지리라는 약속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정보가 강대국들한테 더욱 빠르게 들어가는 한편, 그들의 눈으로 해석된, 그래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만 우리에게 직수입되어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노예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영어 공부를 작파하자는 게 아니라, 강대국의 탐욕스러운 정보 독점 체제의 실상만큼은 제대로 인식하고 살자는 말이다. 영어가 전세계의 정보망을 장악한 사회를 미화한 '지구 제국'이란 말도 실은 '미국 일국 지배 체제'와 동의어일 뿐이다. 복거일은 영어를 공용화 했을 때의 편익은 한껏 과장하면서도, 앞서 살펴보았듯이 장기간에 걸쳐 우리가 치를 혼란과 무질서, 엄청난 비용 지출, 민족 구성원간의 대립과 충돌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기발한 착상이라도 민족의 만년 대계를 담보로 한 논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마땅하다. 충심에서 나온 제안일지라도, 실상을 과대 포장하거나 자기 논리에 취해 외곬으로 나가다간 객관성을 상실할 우려가 높다. 자기 환상의 제물이 되기 십상인 게 바로 지식인이다. 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숲을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때의 사랑이란 위선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기대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로 보인다. 내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것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자기 문화와 역사와 언어를 혐오하는 사람은 세계의 다양한 풍속과 인종과 풍토와 전통을 이해하고 사랑할 자격이 없다. 선조들과의 대화보다 다른 지역의 동시대인들과의 대화가 더 소중하다고, 그래서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김영환은 말했지만, 자기 조상의 역사와 문화를 팽개친 정체성의 '미아'들이 무엇으로 다른 동시대인들과의 교류에 나서겠는가. 비록 미국의 힘과 문화가 시장원리를 매개로 전세계를 향해 무한 질주 중이지만, 그래서 온 세상이 미국 문화의 식민지로 변해 가는 게 오늘의 현실이지만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그것이 인류 전체의 재앙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벌써 많은 나라와 부문에서 반성과 모색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의 인류는 그 문제에 관해 더욱 지혜를 짜낼 것이고, 우리도 작은 힘이나마 거기에 보태야 한다. 앞으로의 세기는 차이를 통한 공존과 다양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이다. 각 민족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세계 문화 시장에서 경쟁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시 자기 민족의 문화를 살찌우는 시대인 것이다. 더없이 세련되고 우아하게 들리는 '세계시민'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자신의 영혼을, 민족의 장래까지를 저당 잡히지 말자. 민족이란 말이 세계시민이란 막연하기 짝이 없는 추상어보다 한층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지 않은가. 불가(佛家)의 말 중에 '희론(戱論)'이란 말이 있다. 부질없이 희롱하는, 아무 뜻도 이익도 없는 담론을 의미하는데, 영어공용화론이야말로 이 땅의 한 지식인이 세기말의 우울에 사로잡혀 만들어 낸 20세기의 대표적인 희론으로 기록될 것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