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7일 일요일 오후 06시 07분 29초 제 목(Title): 신동아/이윤기 내가 부린 말 작가 이윤기의 문화칼럼(21) 내가 부린 말 《말을 부리는 삶에 관한 한 나는 내 실존적 습관에 어긋나는 짓은 결단코 하지 못한다. 나는 한문을 사랑한다. 한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글 우리 말이다.》 읊는 중 좋고 듣는 상주 좋으면 그만인가? 나를 <도반(道伴)>이라고 부르는 내 친구 스님, 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멀리 대구까지 내려가 밤새 상청(喪廳) 지키면서, 내 어머니가 평소에 즐겨 읽던 불경을 읊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예식을 <시달림>이라고 한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새삼스럽게 한번 시비해 보고자 한다. 스님의 정성을 시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언어 환경을 시비해보고자 한다. 스님에게, 우리 언어 환경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언어 살림살이는 지금 한문과 한글의 점이적(漸移的)인 환경에서, 매우 불안정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그것을 한번 시비해보고 싶을 뿐이다. 발인 전야에 나의 장형(長兄)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독경하시는 것 듣고 있자니 어머니 음송하실 때 더러 듣던 구절이 섞여 있군요. 그런데 대체 무슨 경을 외셨소?」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외웠습니다」 스님의 대답에 나의 장형이 또 물었다. 「어떤 뜻이 담겨 있소?」 「전들 다 알겠습니까?」 「하기야, 어머니 역시 뜻 모르는 채 외기만 하셨지요」 「형님, 들으실 만합디까?」 「듣기에 참 좋았소」 「돌아가신 어머니도 좋아하시겠지요?」 「나는 그러리라고 믿어요」 「그러면 됐습니다. 뜻이야 어찌 됐건, 외는 저 좋았고, 들으신 형님 좋으셨고, 흠향하시는 어머니 좋으셨을 터이니, 그것으로 다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도 하오」 읊는 중 좋고, 듣는 상주 좋다면, 굳이 그 뜻을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형님들은 어머니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스님의 이 말 한마디 되뇌면서 내게 스님 안부를 묻고는 했다. 나는 거부한다 지난 11월 중순, 재종형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친형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던 재종형이 쉰여덟에 돌아가신 것이다. 대구로 내려갔다. 발인 전날 밤에 나의 중형(仲兄)이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굵은 글씨로 축문(祝文)을 차례로 찍은 책이었다. 중형은 나에게, 새벽에 발인할 것인즉, 나에게 <견전축(遣奠祝)>이라고도 불리는 발인축을 독축(讀祝)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경우 축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발인 전날 밤 제사 때 읽는 <조전축(祖奠祝)>, 밖으로 들어내려고 관에다 손을 댈 때 읽는 <계빈축(啓殯祝)>, 관을 들어낼 때 읽는 <천구청사축(遷柩廳事祝)>, 운구 도중에 고인의 근무지에 잠깐 들러 제를 지낼 때 읽는 <노제축(路祭祝)>, 장지에 이르러 산신제를 지낼 때 읽는 <산신축(山神祝)>, 당숙부모의 산소 옆에 재종형의 분묘를 쓰면서 올리는 <동강선영축(同岡先塋祝)>, 매장을 끝내고 성분(成墳)하기 직전에 올리는 <제주축(題主祝)> 등, 종류가 아주 많다. 나는 중형으로부터 축문집을 받아들고는 <견전축문>부터 펼쳐 보았다. 영이기가 靈車而旣駕 왕즉유택 往卽幽宅 재진견례 載陳遣禮 영결종천 永訣終天 이것밖에는 없었다. 한자 위에 한글 음역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새기면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이제 상여로 모실 터인즉 곧 무덤으로 가시게 됩니다. 보내어 올리는 예를 베푸오니 이로써 영원한 이별을 삼고 자 합니다. 나는 중형에게, 한문으로 되어 있는 축문의 뜻을 다 아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중형은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상주인 젊은 삼종질에게, 견전축문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상주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형에게, 돌아가신 재종이 그 뜻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느냐고 물어 보았다. 중형은, 모를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재종형은 한문을 깊이 공부한 분도 아니다. 중형은 나에게, 그러면 자네는 뜻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형에게, <견전축문>을 한글로 풀어서 읽겠다고 했다. 읽는 나도 그 뜻을 새기면서 읽을 수 있도록, 상주도 그 뜻을 알아먹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유가족의 마른 눈물을 다시 샘솟게 할 수 있도록 한글로 풀어서 읽겠노라고 했다. 상주는 상청에서 호곡(號哭)해야 제격이다. 나는 살아 있는 말, 살아 있는 자와 세상 떠난 자 사이에 서로 뜻이 통하는 한글로 견전축문을 독축함으로써, 망인의 죽음을 벌써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멀뚱멀뚱 먼산바라기 하는 상주로 하여금 마음껏 호곡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내 중형은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한글로 풀어쓴 견전축문의 독축을 중형이 반대하는 논거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 친구 스님이 한문 불경을 음송한 사례였다. 중형은, 뜻이야 어찌됐든, 망인(亡人)이 좋아할 터임에 분명하고, 상주에게도 좋을 터이고, 듣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터이고, 또 예부터 그래 왔으니까 그냥 한문으로 독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는 뻗대기로 했다. 『예부터 그래 왔으니까 지금 그러자는 의견에 저는 찬동 못합니다. 백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입말로는 우리말, 글말로는 한문을 썼습니다. 백년 전 사람들은, 한문으로 독축을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르지요. 아무도 알아먹지 못하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나는 한글 독립선언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분연히 맞섰다. 중형은 내가 만일에 축문을 한글로 독축하면 장지(葬地)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볼 것이니까, 반드시 한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재종형의 장지가 있는 산마을 사람 중에 그 한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끝내 한문축문의 독축을 사보타주했다. 견전축문은, 나를 대신해서 운구 버스 운전기사가 독축했다. 우리 글의 독립선언 집안 형님들은 나의 사보타주를 섭섭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날 처음으로 형님들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들과 딸이 차례로 태어났을 때 나는 형님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이들 이름을, 한자로는 표기할 수 없도록 한글 이름으로 지었다. 우리 집안의 22대손(孫)인 내 아들의 한글 이름 <가람>은, 우리 족보에 처음으로 등장한 한글이기도 하다. 한글이 창제되고 나서 실로 533년이 흐른, 1979년의 일이다. 장형이 돌림자에 맞춰 지어놓은 내 아들의 한자 이름 <진일(鎭一)>은 엉뚱하게도 <자(字)>라는 별명(別名)으로 족보에 올라 있다. 내 아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드물게도 갓 첫돌 지나 <자>를 얻은 아이이기도 하다. 나는 한글로 아들딸 이름 지은 폭거를 한글 이름의, 우리 글 이름의 독립선언이라고 부르는데, 독립을 선언한 지 20년이 지난 1998년에 내가 어떻게 한문으로 된 축문을 뜻도 모르는 채 읽고 있을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말을 부리는 삶에 관한 한 나는 내 실존적 습관에 어긋나는 짓은 결단코 하지 못한다. 신문 하단에 실리는 부고, 쓰는 놈도 그 뜻을 모르고 읽는 놈도 그 뜻을 모르기 십상인 <자이부고(玆以訃告)>는 나를 슬프게 한다.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이러면 왜 안 되는가? <채련>과 <연밥 따기> 사실을 말할 뿐인데도 제 자랑한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나는 조모의 권유로 <천자문>을 떼고, 우리말 독본인 <공민독본>은 물론 한문으로 된 <동몽선습>과 <소학>과 <명심보감>을 달달 외게 된 뒤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조모의 취미 중 하나는 『옥루몽』 같은 고담(古談)을 송창(誦唱) 가락으로 읽는 일이었다. 조모의 책은 어머니가 물려받았다. 어머니 시절에 장서가 많이 늘어났다. 어머니도 조모처럼 『옥루몽』을 비롯,『숙영낭자전』『조웅전』『류충렬전』 『장화홍련전』 『권익중전』 같은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즐겼다.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느라고 천박하게도 그 책을 통째로 외웠다. 『권익중전』을 비롯한 몇 권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던 책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권익중전』을 통해 접하게 된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생생한 묘사는 이미지로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백사장에 떨어지는 오리(平沙落雁), 내포(內浦)로 들어오는 먼 돛배(遠浦歸帆), 동정호 가을달(洞庭秋月), 소상강 밤비 소리(瀟湘夜雨)…. 그런데 <어장촌 개짖는 소리>가 여기에 껴든다. 확인해 보아도 <어장촌 개짖는 소리>는 소상팔경에 들어 있지 않다. 기억 오류일 터이다. 어머니는 논일 밭일하는 틈틈이 송창 가락에 맞추어 『옥루몽』의 한 구절을 노래하고는 했다. 여기에 어머니가 즐겨 읊던, 내가 눈물없이는 입에 올리지 못하는 송창 한 가락이 있다. 동정호 밝은 달에 채련(採蓮)하는 아해들아, 십리 창강 배를 띄워 물결이 급다 마소. 그 바람에 잠든 용 깨면 풍파 일까 하노라. 뒷날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로 시작되는 민요를 듣고는, <채련>을 <연밥 따는>이라고도 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참 쉽게 했다. 내 또래 아이들은 <한류>와 <난류>의 특성을, 전자는 차가운 바닷물의 흐름, 후자는 따뜻한 바닷물의 흐름, 이런 식으로 따로 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게 <한류(寒流)>는 <찰 한(寒)>과 <흐를 유(流)>일 뿐이었다. 한자의 뜻을 풀면 되는 만큼 낱말을 따로 욀 필요가 없었다. 국어 공부는, 어린아이 팔 비틀기였다. 1950년대라는 시대가 문자 환경의 점이적인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큼 <한자>의 덕을 입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문을 사랑한다. 한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글 우리 말이다. 한글과 한자에 대하여 매우 쑥스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문학청년이던 70년대에 나는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다녔다.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다니는 사람보다 길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어쩐지 더 문화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당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잡지사를 출입하던 문화계 인사들은 모두 장발이었다. 나는 장발을 고집함으로써 그 문화계 인사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부끄러운 것은 감추고, 조금이라도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은 드러내고 싶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50년대 중반부터는 장발 위에다 베레 모를 쓰고 다녔다. 나는 베레 모는 아무나 쓰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예술가인 양 보이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 베레 모를 쓰지 않는다. 등산할 때 아니면 베레 모는 쓰지 않는다. 나는 이제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다. 최근 4,5년간 내 머리카락은 3센티미터 이상 자라본 일이 없다. 이제 나는 예술가인 양 보이고 싶지 않다. 필경은 천박한 3류일 터인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13년 전인 1985년부터 고대 신화의 해석을 시도한 책 3부작 『뮈토스』를 써서 10년 전인 1988년에 출간한 적이 있다. 개정증보판을 내기 위해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얼굴이 뜨거워서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책을 썼을 당시, 나는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도 부끄럽게도 의도적으로 어려운 낱말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도망친다>라고 해도 좋을 것을 <도타(逃�F)한다>고 쓴 것을 반성한다. <자국을 지운다>고 하면 될 것을 부러 <엄적(掩迹)한다>고 쓴 것을, <놀아난다>고 하면 될 것을 <유탕(遊蕩)한다>고 쓴 것을, <지나치다>고 하면 될 것을 <참람(僭濫)하다>고 한 것을 반성한다. 나는 이 책을 교열하면서 수백 개의 한자말을 내 책에서 몰아냈다. 부러 꼬고 비틀어 어렵게 만든 표현을 나는 쉬운 표현으로 바꿨다. 이로써 말살이 글살이에서도 나는 베레 모를 벗는다. 나는 이제까지 부리던 말을 버린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말을 부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한자와 한문에 배타적이지 않다. 이 글 <내가 부린 말>은 <내가 부릴 말>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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