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워싱턴사과) 날 짜 (Date): 1999년 1월 13일 수요일 오전 01시 38분 09초 제 목(Title): 고종석/국어의 풍경들 -궁중어의 어휘 [고종석에세이] 국어의 풍경들-18/'궁중어'의 어휘 ▶프린트 하시려면 한 자연언어가 계급, 직업, 성(性) 따위의 차이에 따라 분화했을 때, 그 분화한 말들을 흔히 사회 방언이라고 부른다. 귀족 특유의 언어라든가, 기자나 의사나 경찰관이나 범죄 집단 특유의 언어라든가, 여성 특유의 언어라든가 하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이 사회 방언이다. 봉건적 계급 질서 안에서 사회 방언 가운데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궁중어일 것이다. 봉건 국가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군주다. 그리고 이 군주를 중심으로 한 조정의 존엄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 궁중어다. 봉건시대의 통치자들 생각으로는 임금이 먹는 음식, 임금이 입는 옷, 임금의 신체, 임금의 행동거지 등 임금과 관련된 말들이 일반 신민과 관련된 말들과 같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임금이 먹는 밥은 `수라'였고, 임금이 입는 정복(正服)은 `곤룡포(袞龍袍)'였고, 임금의 손은 `어수(御手)'였고, 임금이 활을 쏘는 것은 `어사(御射)'였다. 수라를 만드는 방은 `수라간'이었고, 수라를 올려놓은 상은 `수라상'이었다. 임금조차 그들 말로는 `주상(主上)'이었다. 왕정이 폐지된 뒤 이 궁중어는 그 사용자를 잃어버려 점차 사라지고, 이제 역사 소설이나 텔레비전의 사극에서나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조선조의 궁중어가 민중어와는 다른 독자적 문법 체계를 갖추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어휘 부문만 달랐을 뿐이다. 궁중어의 어휘는 고유어로 된 것도 있고, `수라'처럼 몽골어에서 차용한 말도 있지만, 대개는 한자어다. 그 생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가운데 꽤 많은 수는 이미 고려조 때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궁중어의 어휘 가운데 임금과 관련된 말들은 흔히 `어(御)'라는 형태소를 포함하고 있다. 임금의 옷은 어복(御服)이고, 임금의 갓은 어립(御笠)이며, 임금의 신은 어혜(御鞋)이고, 임금의 갑옷과 투구는 어갑주(御甲胄)이며, 임금의 목소리는 어성(御聲)이고, 임금의 병은 어환(御患)이다. 또 임금의 편지는 어찰(御札)이고, 임금이 앉는 자리는 어좌(御座)이며, 임금이 있는 곳은 어소(御所)이고, 임금이 타는 말은 어마(御馬)이며, 임금이 타는 마차는 어승차(御乘車)이고, 임금에게 올리는 우물물은 어수(御水)이며, 임금이 내리는 음식은 어식(御食)이고, 임금에게 물건을 바치는 것은 어공(御供)이다. 형태소 옥(玉)도 비슷한 구실을 한다. 그래서 어좌(御座)는 옥좌(玉座)라고도 하고, 어수(御手)는 옥수(玉手)라고도 한다. `용(龍)'이나 `천(天)'이나 `성(聖)'도 비슷한 구실을 해, 임금의 얼굴은 옥안(玉顔)이자, 용안(龍顔)이자, 천안(天顔)이자, 성안(聖顔)이다. 이 궁중이라는 곳은 지체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하도 많이 살고 있었던 터라, 꼭 임금과 관련된 말들이 아닐지라도 기괴한 한자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의 신체부위도 일반인들의 몸과 같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귀는 이부(耳部)였고, 입은 구중(口中)이었고, 입술은 구순(口脣)이었고, 눈동자는 안정(眼睛)이었고, 이마는 액상(額像)이었고, 손가락은 수지(手指)였고, 발바닥은 족장(足掌)이었고, 눈물은 안수(眼水)였고, 콧물은 비수(鼻水)였다. 여성의 월경은 환경(環經)이 되고, 버선은 족건(足件)이 되고, 낮잠은 가매(假寐)가 되고, 숭늉은 다(茶)가 되고, 마늘은 대산(大蒜)이 되고, 달걀은 계단(鷄蛋)이 되고, 고추는 번초(蕃椒)가 되고, 쇠고기는 황육(黃肉)이 되고, 꿩은 적계(赤鷄)나 산계(山鷄)가 된다. 무수리(水賜伊)는 나인(內人)에게 세숫물을 드렸고, 나인은 대전마마와 내전마마를 열심히 모셨다. 그 놈의 마마도 여럿이어서, 왕은 대전(大殿)마마이거나 상감(上監)마마이고, 왕대비, 즉 선왕(先王)의 살아있는 아내는 대비(大妃)마마이거나 자전(慈殿)마마이거나 웃전마마이고, 왕비는 중전(中殿)마마이거나, 곤전(坤殿)마마이거나 내전(內殿)마마이고, 세자(世子)는 동궁(東宮)마마이거나 세자마마이거나 동(東)마마이고, 세자빈(世子嬪)은 빈궁(嬪宮)마마이거나 세자빈마마다. 같은 뜻을 담으면서 이 마마 계열의 말보다 일상적으로 더 자주 사용된 말은 마노라 계열의 말들이다. 대비마노라, 대전마노라, 선왕(先王)마노라, 웃전마노라, 내전마노라, 곤전마노라 하는 식으로. 이 `마노라'는 현대어에서 형태도 `마누라'로 바뀌고, 뜻도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말로 바뀌었다. `마노라'말고도 고유어로 짐작되는 궁중어들이 있다. 혼인 전의 왕자녀(王子女)나 왕손(王孫)을 부르는 존댓말인 `아기시', 민가(民家)를 뜻하는 `밧집', 똥을 의미하는 `매화'와 변기를 의미하는 `매화틀' 따위가 그렇다. `밧집'은 어원적으로는 `(대궐) 바깥의 집'이라는 뜻이다. `밧'은 `밖'의 중세어 형태다. `매화'가 고유어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자어 매화(梅花)나 매우(梅雨: 여름 장마)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세이스트 ♠위로 기사제보·문의·의견 opinion@mail.hani.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