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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U ] in KIDS
글 쓴 이(By): BADA (내좋은사람D)
날 짜 (Date): 1996년01월22일(월) 01시19분30초 KST
제 목(Title): [퍼온글] <한국인,오늘의초상> 



제목 : <한국인,오늘의초상> 진대제 삼성전자 부사장

      --------  "앞으론 인텔을 집어삼키겠습니다"  ------------.

     하루 평균 벌어들인 순이익이 82억원. 국내 제조업의 간판주자인
삼성전자가 올해 수립한 기록 가운데 하나다. 매출액 16조원, 세후 순
이익 2조5천억∼3조원.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 19%, 각종세금납부액
5천2백80억원, 단일제조업체 최초로 수출 1백억달러 돌파.  반도체 산
업이 올해 공전의 호황을 누림에 따라 삼성전자는 신기록 제조기로 이
름을 날렸다. 매출액 16조원은 재계 순위 6위 그룹인 쌍용그룹의 지난
해 그룹전체 외형과 맞먹는 규모이며  순이익 3조원은 재계 17위 금호
그룹의 작년 총 매출액에 견줄 만하다.

     올 한해 삼성전자의 수출예상액 1백45억달러는 우리나라 전체 수
출액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즐거운 비명의 연속이

었다.  세계적인 컴퓨터 시장의 활황으로 D램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
서 만들기 무섭게 팔아치워 매일 82억원꼴로 순이익을 챙겼다.


     ///// [국보 1호 박사],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별칭
/////.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회사에서 일등공신 한 사람을
꼽으라면  삼성맨들은 주저없이 메모리본부를 총괄하고 있는 진대제부
사장을 든다.

     올해 43살의  진부사장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서는 독보적인 존재
다. 삼성전자 사람들은 그를 [국보 1호 박사]라고 부른다. 기술개발과
설계, 조립, 양산공정, 시장개척과  마케팅  등 전부분에 걸쳐 통달해
있는 그는 반도체 기술에 관한 한 절대적인 인물이다.

     미국 포천지는 93년 그를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가운데 한사람으
로 선정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명망이 높다.


            =====   회사서 정보유출 우려 인터뷰 만류
  =====.

     개발팀회의, 생산공정관리, 세미나, 해외출장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진부사장은 기자들이 만나기 무척 어려운 사람중의 한명이
다.  그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이 한가지 이유
지만 이보다는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온갖 첨단정보들이 외부로 흘
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쪽에서  기자와의 인터뷰를 적극 만류하
고 있는 점 때문이다.

     어렵사리 시간을  쪼개 인터뷰를 수락한 진부사장은  삼성전자가
올해 가장 많은 돈을 벌게 한 공로자라는  평가에 대해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반도체 사업은 속된 말로 돈놓고 돈먹기 장사입니다.  수조원씩
투자를 해야 하며 사업에서 투자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대한 돈을 벌게 된것은 제때에 과감한 투자결성을 내린 오너의 선택
이 가장 중요했습니다}라면서 공로를  이건희회장과 김광호부회장에게
돌렸다.

     진부사장이 삼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5년.  스탠퍼드 대학
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IBM왓슨연구소에 몸담았던 그는 2년반만에 과감
하게 사표를 던졌다. 당시 IBM의 관리담당이사에게 사표를 내놓으면서
그가한 말은 [Swallow Japan(일본을 집어삼키겠다)] 한마디였다.

     {어릴 적부터 소원은 한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
다.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데 미국에 앉아 허송세월을 할 수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국에 돌아가 일본보다 먼저 16메가D램을
생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사표를 던졌죠.}.

     국내 반도체 분야의 선구자인  김충기박사(현 한국과학기술원 부
원장)는  일본을 집어삼키겠다는 그의 호기에 대해 {목구멍 한번 지독
하게 큰 놈}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호기를 몇년
만에 실현했다.

   $$$$$$  33살 한국청년 붙들어두려 갖은 수단 썼던 IBM
 $$$$$$.

     IBM은 당시 33살의 한국청년을 붙들어 두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
원해 설득했지만  황소같은 그의 고집을 당해내지 못했다. 왓슨연구소
에서 2년반 근무할 당시 그는 한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원하는 부서
를 여기저기 옮겨다닐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소자와 집적회로, 설계
등  3개 연구부서를 섭렵했던 그는 각 부서에서 매번 굵직한 특허들을
출원했다. 연구소내 부서이동때마다 연봉인상 해택을 누린데다 연봉인
상 상한선 15%를 다 채우는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다.

     {항간에는  삼성으로 옮겨갈 때 IBM이 저에게 백지수표를 제시했
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
라며 IBM에서 몇달치 급여를 현금으로 줬어요.   퇴직금이라는 개념이
없는 미국기업에서 보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사표 제출과 동시에 삼성의 미국 현지법인 SSI로 자리를 옮


긴다. 첫직책은 4메가D램 개발담당 수석엔지니어. 87년 9월 서울 본사
로 옮겨온 후 4메가D램부터  시작해 16메가D램, 64메가D램의 성공적인
개발을 주도하면서 사내에서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렸다. 89년 이사승
진, 92년 상무승진, 94년 전무승진, 올해 정기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
진해 이사가 된지 6년만에 부사장에 올랐다.

     {개인적으로 반도체와는 천생연분인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갖습
니다. 어릴적부터 그림그리기와 조각, 공예 등을 무척 좋아했지요. 반
도체 설계에  필수적인 학문인 공간기하에는 미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
람이 잘하게 마련입니다.}.

     복잡한 반도체 회로를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사진을 놓고 전문가
들이 몇시간씩 들여다 보고서야 한두가지 문제점들을 발견하는데 비해
그는 불과 수초만에 문제점을 여럿 잡아내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그
가 반도체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경기고 졸업 때였다고 한다.  서울
대전자공학과에 응시, 입학시험을 보러 갈 때 학교에서 마련한 전세버
스에전자공학과 3학년인  경기고 선배가 동승, {대학에 가면 양자역학
과 상대성이론 등을 배우게 된다}는 말에 솔깃했다.

     {고교시절 물리와 수학에 무척 흥미를 가졌어요.  입학시험을 치
르자마자 청계천 헌 책방 골목으로 달려가 영어책과 국어책을 몽땅 팔
고 그 돈으로 대학교 물리, 수학교재를 샀죠. 입학전까지 이 교재들을
다뗐습니다.}  당시로서는 반도체라는 이름도 생소한 때였으며 대학에
서는 진공관에 대한 강의가 행해질 정도였다. 반도체를 전공한 교수도
없었다.  성에 차지 않은 그는 한국과학기술원으로 달려가 청강생으로
김충기교수의 반도체 강의를 들었다.  3학년 때는 후배들을 모아 팀을
짜고  기업체 연구실을 빌려 초보적인 반도체 모형도 만들어보고 웨이
퍼 가공도 해 볼 정도로 반도체에 이미 미쳐 있었다.


  미 반도체교재 [진대제 모델]로 통용되는 박사.

     서울대 대학원 졸업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스탠포드대학에서  [산화막 성장 비스코스
모델]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지금도 미국내
반도체 교재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진대제 모델]로 통용될 정도로 이

름나있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그는 학창시절 줄곧 장학금을 탔다. 국
민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박사를 딸 때까지 등록금 내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학창시절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그는 재미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경남 의령에서 별로 유복하지 않은 집안
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입주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때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던 유력인사의
집에서 입주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이 집의 아들 3명을 서울대에
진학시키자 당시 처음 나온 5천원짜리 신권으로 1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시골에 보내 논을 샀다고 한다.

     {대학원 마칠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한 3백만원쯤 됐습니다.

이 돈으로 용산에 50평짜리 집을 한 채 샀지요. 미국 유학가면서 형님
께 이 집을 드렸는데 아직도 형님이 살고 계십니다.}.

     존경하는 인물로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회장을 꼽는 그는 이


회장과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87년 서울 본사 근무를 시작한 직후
이회장이 기흥반도체 공장을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그날 조간신문에
{국내  반도체업체들이 기술만 베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이회장이 노
기 띤모습으로 나타나 기흥공장 임원들을 불러 모아 호통을 쳤다고 한
다. 이회장이 당시 그에게 {반도체 사업을 1백년 이상 승승장구하도록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묻자 주저없이 {자신있습니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몇달만에 이회장은 작고했다.

     {이회장이 생존해 계신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그때 한 약
속은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렵겠습니다]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약속을 지킬 도리밖에 없게 됐지요.}.

   ))))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골프-테니스도 프로급  ((((.

     그는 집념이 강한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가를 내 틈틈이 치는
골프는 완벽한 싱글 수준이며 테니스 실력도 프로급이다. 그와 테니스
를 쳐한 게임 이겨본 적이 있는 동료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진부사
장의  성품 때문에 몇시간씩 코트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이같은 집념으로 그는 89년 16메가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고 이병철회장과의 약속 가운데 일부를 지켰다.

     90년 16메가D램  시제품을 들고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IBM
이었다.  {IBM 사람들이 시제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지요. 난생 처
음  보는 물건이었으니 당연하죠. 우리도 16메가D램 시제품을 세계 최
초로 내놓은지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마침내 이류 경쟁자라는
이미지를 깬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 언론들은 이를 [쿠데타]에 비유했다. 삼성전자
가  1메가D램과 4메가D램을 양산하고서도 외국업체들이 품질의 신뢰성
을 의심, 사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16메가D램 시제품 개발을 계기로
삼성전자의 이미지가 급상승, 모든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
다. 삼성전자가 이 때를 계기로 말 그대로 발딱 설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반도체를 팔기 위해 더 이상 고객의 팔을 붙잡지 않아도 된
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전자업체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
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등한 입장에서 히타치, NEC 등과 서로의
기술을 맞교환하거나 비교 분석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아직 진정으로 우리가 일본을  앞선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반기술이 취약하고 비메모리 분야에 뒤지고 있기 때문에 앞
으로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다. 그는 4백여명의 엔지니어를 매일 지휘
하고  가끔은 저녁에 집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일을 계속하기도 한다.

틈틈이 일어공부를 하고있다.

     숨가쁘게  변화하는 첨단기술의 흐름을 따라잡고 앞서 나가기 위
해서는 쉬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는  그는 [일일학 일일신]을 좌우명을
살고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인
터뷰를 마치면서 한마디 했다.  {앞으로 인텔을 한번 집어 삼켜 볼 작
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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