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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 Liszt (장 진 웅)
Date   : Sun Nov 15 11:53:09 1992
Subject: 소나기(15년 후): Part 2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은행업무 마감을 하고 수리점에서 고친 자전거를 타고 뜨거운 늦여름
햇살을 받으며 그가 동네 산골 어귀길의 개울가에 도착했을 때 며칠동안 보지
못하였던 소녀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돌에 맞은 머리는 다 나았는지 광목으로 둘러감았던 붕대도 풀고 없었다.
비스듬이 숙인 소녀의 긴 머리카락이 개울물에 닿아 물결따라 움직였다.

청년의 눈에 비친 개울가의 소녀와 맑은 개울물의 삽화같은 풍경은
15년 전의 여름에 그 소녀를 만날 때와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년의 순진함과 수줍음은 달라진게 없었다.
아는 체 하기가 부끄럽고 싫어진 청년은 자전거를 걸쳐메고 허들 경기 하는
육상 선수처럼 징검다리를 달려서 건너 뛰기 시작 했다.

(흐흐흐... 나비같이 날아서 돼지 같은 자세로 날렵하게 징검다리를 건너는
거야!!! 저것이 미처 말 걸 틈도 없게 말이야...)

징검다리 한 개를 밟고 다시 몸을 날려 두 개와 세 개 째를 연속으로 밟고
가운데 쯤에 있는 일곱 개 째의 돌을 밟고 뛰려는 순간이었다. 어제까지 그
자리에 있던 징검다리 돌이 두 개나 그 자리에 없었다.
(악!!! 가랭이 찢어진다아아앗!!!)

``풍덩!!!''

청년은 자전거를 멘 채 물속에 고꾸라 박혀 허우적 거렸다.

소녀가 징검다리 돌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징검다리 한가운데로
다가왔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녀의 왼쪽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였다.

``고거 쌤통 II''

먼저 돼지우리를 들이받았을 때는 ``고거 쌤통 I'' 이었었나?

겨우 자전거를 밀치고 청년이 일어났다. 그 소녀를 본척 만척 한 채
어기적거리며 징검다리를 간신히 건넜다.

청년이 빠진 자전거 체인을 끼우고 물기를 닦아내고 올라타서 개울가를
떠나려 하자 소녀가 징검다리를 건너오면서 말을 했다. 예의 그 환한 웃음은
입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너 저 산너머에 가본 일 있니?''

``없어요.''
(음, 이년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나이도 어린년이...)

``우리 가보지 않을래? 시골오니까 혼자서 심심해서 못견디겠다.''

``시로요.''
(꼬박 꼬박 반말이군... 썩을년같으니...)

``그럼 우리집에 가서 비디오나 같이 볼래? 우리집에 `반금련' 하고
`전나 농염'이란 죽이는 비디오 있다! 오리지날이야!''

``서울친구 현국이네 집에 가서 벌써 봤어요.''
(내참, 꼴에 수준은 높은 모양이군... 그런 것도 보다니...)

``저 산너머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

``무지개가 있어요... 잊혀진 사랑이 있고. 마포대교 새벽같은 음울한
바람이 머무는 곳이예요.''

``어머? 어머? 무지개가 잊혀진 어쩌고저쩌고 바람이라고? 되게 멋진 곳이겠다...
나좀 데려가 줄래? 부탁이야...''

(잊혀진 사랑이 있긴 개코나 있냐? 내가 오랜만에 문학냄새 한번 피워봤다...
얼씨구, 저년 눈동자 풀리는 것 좀 봐라...)

청년은 속으로 소녀가 말하는 것을 시큰둥하게 생각을 했지만 그는 지금 15년
전에 산 너머에 같이 간 그 소녀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지금 대답하는 것이 꿈속에서 대답하는 것이라고 착각이 들었다.
청년의 마음이 흔들렸다. 유년시절 이 곳에서 알았던 그 소녀의 죽음 이후로
그는 여자친구를 가지지 못했다. 15년 전 소녀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줄곧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청년이 소녀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는 어릴적 가슴아픈 사랑을 준 소녀의
이름도 모른채 그녀를 떠나보냈었다.

``응, 내이름은 떡순이라고 해! 떡순! 박떡순! 비교적 섹시한 이름이라고나
할까... 네이름은 뭐니?''

``덧없이 살다가 가을 바람에 늙어 버린 나그네 같은 사내라고 하오.''

청년은 이대목에서 목소리를 배우 말론 브란도보다 더 중후하게 깔았다.
소녀의 눈동자가 더 풀렸다.

자전거를 개울가 옆의 수풀속에 감춘 청년이 앞장을 서서 뛰었다. 소녀가
신이 나서 뒤따라서 뛰었다.

(그래, 15년 전에도 이렇게 저 산너머를 향해서 달렸지.)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를 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청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잠시 허수아비를 흔드는 새에 소녀가 앞장을 서서 달렸다. 소녀는 병약해
보이는 얼굴인데도 달리기를 아주 잘하였다.

청년이 소녀의 뒤를 쫓았다. 소녀의 창백한 뺨이 불그스레 물이 들었다.
열심히 쫓아도 소녀는 아직 저만치다. 청년이 힘을 내서 쫓아갔다. 그래도
소녀의 달음박질은 보통이 아니다. 논둑길을 지나 큰길가를 지나 산 밑의
조그만 길까지 달릴 때까지도 청년은 소녀를 앞서지 못했다.

(여자한테 질 수는 없지.)

청년이 있는 힘을 다내어 소녀를 쫓아갔다. 소녀와 거리가 좁혀지자 청년이
여유스런 웃음을 보냈다. 소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속력을 높였다.
청년도 질새라 속력을 높였다. 그렇게 거의 두시간을 달렸다. 두시간째 앞만
보고 달리던 소녀가 이젠 지쳤는지 길옆의 풀섶으로 누워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청년에게 말을 했다.

``헉헉... 헉헉... 아까 개울가에서 본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직도 멀었니?
두시간이나 달려왔는데...''

``헥헥... 핵헥... 벌써 1시간 40분 전에 그곳을 지나왔어요...''

``악! 뭐라고? 근데 왜 여기까지 뛰었니? 헉헉...''

``헥헥... 헥헥... 앞설라고요... 헥헥...''

소녀가 씩씩 거리며 천년묵은 여우처럼 흰자위만 보이면서 청년을 한참 동안
째려보았다. 소녀의 입가에 맴돌던 빙그레 웃음이 청년의 입가로 옮겨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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