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 popcorn (곽 태영) Date : Sat Jun 27 14:35:11 1992 Subject: 최진실의 이야기 ( 안웃겨요.. ) << 최 진실의 이야기 >>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스타로 단연 최진실을 꼽을 수 있다. 깜찍하고 밝으면서 `진실' 이란 이름처럼 솔 직한 최진실의 모습을 사람들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요즘 최진실은 영화 `스잔브링크의 아리랑' (감독 장길수) 의 막바 지 촬영에 한창이다. 이 영화를 위해 얼마전 최진실은 두달동안 스웨 덴에 머물면서 스웨덴 입양아 수잔브링크가 겪었던 사연들을 몸소 체험 하기도 했다. 최진실이 느꼈던 수잔브링크의 삶, 그리고 최진실 자신의 이야기를 오늘부터 연재한다. --- --- --- --- --- --- --- --- --- --- --- --- --- --- --- --- -- 만남과 헤어짐. 어차피 사람이 혼자 살 수는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도 사람들끼리 의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나는 영화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촬영하면서 더욱 이러한 생각이 절실해진다. 내가 처음 수잔브링크 (한국이름 신유숙) 의 사연을 접하게 된 것은 몇해전 MBC TV `인간시대' 의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보면서였다. 어릴적 스웨덴으로 입양을 가서 파란눈의 양부모와 만나게 된 수잔 브링크. 성인이 된 수잔브링크가 파란눈의 딸과 같이 고국의 딸을 밟 고 한국인 친엄마와 극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 서로 말은 안통하지만 애틋한 혈욱이 정을 나누는 모녀의 모습. 다 시 스웨덴을 향하는 딸 수잔브링크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서 TV 를 보던 엄마와 나는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 나에겐 아쉬운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이젠 정이 들대로 든 헬레나가 곧 스웨덴에 있는 자기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헬레 나는 바로 영화에서 나의 딸 엘레노라역을 맡고있는 5살된 스웨덴 아이. 처음엔 서로 말이 안통한 것은 물론이었지만 곧 헬레나는 나에게 스 웨덴어를 가르쳐 주며 애정을 표시했고 우리 모녀 (?) 는 시간이 지나면 서 정서적으로 교감해나가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장길수감독이 스웨덴의 한 콘서트장에서 발견하고 영화출 연을 제의했다고 한다. 헬레나의 어머니는 이러한 제의에 선뜻 응해 주었는데 거기엔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헬레나의 어머니는 태국인 으로 어릴적 스웨덴으로 입양돼 그후 그곳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내가 스잔브링크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작년 4월 제주도에서였다. 그때 나는 의상 `Si' 의 패션화보를 한창 촬영중이었는데 매니저일을 보아주시는 배병수선생이 기획단계인 영화라 고 하면서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말해주셨다.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수잔브링크는 꼭 제가 할께요." 내가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꼭 하고 싶어했던 것은 어쩌면 수 잔과 내가 걸어온 삶의 조각들이 가지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4살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웨덴으로 입양된 수잔이 낯선 이방에서 겪었던 아픔과 기구한 삶이 경우와 정도는 다르지만 내가 사 춘기 시절에 겪었던 정신적 방황과 통하는 점이 많다고 느꼈던 것이다. 나를 수잔역에 캐스팅한 장길수감독은 처음엔 아직 어리게만 보이 는 진실이가 과연 수잔이 느꼈던 애정의 결핍, 가출과 임신, 자살로 이어지는 고통들을 잘 표현해 낼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정말 수잔의 가슴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에 자신 있게 "잘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수잔...' 의 대본을 받은 것은 4월8일로 예정된 스웨덴로케 를 한달 정도 남겨둔 때였다. 대본의 내용을 검토할 여유도 없이 나는 우선 "정말 큰일났다" 라 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대사를 스웨덴어로 처리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스웨덴어를 익히는데에는 스웨덴에서 영화공부를 하고온 연출부 윤철용조감독이 도움을 주었다. 윤감독은 자신이 직접 대사의 전부 를 스웨덴어로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고 나는 이때부터 워크맨을 항시 휴대하며 뜻모를 스웨덴어를 계속 들었다. 대사를 외운다는 생각보다는 꾸준히 들으면서 스워덴어의 감을 익 힌다는 생각에서 였다. 출국이 가까워 오면서 뜻하지 않은 걱정이 생겼다. 그당시 나는 스케줄이 매우 빠듯했다. 영화 `숲속의 방' 의 촬영 을 마치기 위해 연일 쉴틈없이 촬영에 매달렸고 삼성카파시계 CF 촬영 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숲속의 방' 을 돈암동에서 촬영하던중 나는 온몸에 열을 느끼며 탈진상태가 되어 쓰러지는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병원에서 링게르병을 달고 누워있는 내 마음은 정말 초조하기만 했 다. 출국일은 얼마 남지 않고 해야할 일은 많은데... 다행히도 컨디 션이 회복돼 하루만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이런 일이 알려질 때마다 많은 분들이 애정어린 걱정을 해 주신다. 집으로 보내주는 팬들의 정 성어린 편지에도 이러한 문의가 많다. 이런 걱정에 대해서 진실이는 매우 건강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 다. 과로를 하다보면 온몸에 열이 나는 열병이 생길 때가 있어 나 자 신도 속상해진다. 몸이 아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분들의 걱정과 궁금증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도 내가 예전에 아팠던 이 야기를 말해드리고 싶다. 어릴적 몸이 아파 병원을 드나들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때 였다. 그때 나는 학교전체에서 뜀박질을 잘하기로 소문난 날쌘 아이였는데 한번은 체육대회에서 달리기시합을 하다가 넘어져 무릎 을 다치는 일이 생겼다. 무릎이 퉁퉁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집에 서 약만 바르고 쉬었는데 며칠뒤엔 발목의 복숭아뼈가 아파오면서 논몸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본결과 관절염이었고 병원을 한달넘게 다니면서 통원치료를 했다. 이후 낸가 몸에 이상을 느낀것은 동명 여중 1년때였다.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신체검살를 하던 도중 의사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이 된 엄마가 학교로 달려왔는데 진단된 내용은 놀랍게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것. 엄마와 나는 적십자병원에 가 서 종합진단을 받은 결과 심장병이라했고 그 원인은 바로 국민학교 때 심한 열과 함께 앓았던 관절염이 합병증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 다. 이후 장기적인 심장병 치료가 시작됐고 나로서도 건강에 걱정 되는 점이 많았다. 치료는 매달 한번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것이었는데 지금도 내가 주사바늘에 대한 기피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의 지겨운 기억 때문이다. 치료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선일여고 2학년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완치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 병원출입은 생각도 안했을 정도로 나의 몸은 아주 건강했 는데 시간에 쫓기는 직업상 밤샘 촬영도 하다보니 금년에 과로로 입원을 하는 일이 몇번 생기게 됐다. 몸엔 이상은 없지만 지나친 과로를 했을때 몸에 열이 오르는 `열병' 이라고 했다. 앞으로 더욱 몸관리를 철저히 해 언제나 건강한 진실의 모습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의 스웨덴로케에 앞서 몸에 열이 오르는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엔 나 자신 많은 걱정을 했다. 만일 스웨덴을 가서 몸이 아파오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외국인 인 만큼 치료하는 절차도 신속하지 못하고 매우 복잡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내심 들어 만약을 대비해 상비약을 준비하기도 했다. 스웨덴 출국일이 가까워 오면서 나의 머릿속엔 아름다운 북유럽 의 풍경이 펼쳐졌다. 학창시절 달력에서 보았던 그림같은 푸른언 덕과 집들 말이다. 정말 그곳은 달력의 사진처럼 지상의 낙원같은 곳일까 아니 멋 진 장소만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6월8일로 예정됐더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의 스웨덴로케 출국날짜 는 나의 뜻하지 않은 입원으로 인해 일정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게 다가 이상우오빠와 콤비로 출연하는 삼성카파 CF 촬영도 비가 와서 연 기되는 바람에 더욱 발을 동동 구르게 됐다. 출국을 마냥 연기할 상황도 아니었다. 수잔브링크가 고교를 졸업 하는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데 얼마 안있으며 스웨덴 학교의 방학이 시 작돼 축제분위기의 졸업장면 촬영이 불가능해지기 때문. 일을 서두른 결과 나는 10일 삼성 CF 촬영을 끝냈고 당초 출국전 마치기로 했던 영화 `숲속의 방' 촬영도 제작자인 이장호감독이 일정을 귀국후로 미루자고 흔쾌히 응낙해 줌으로써 출국일을 12일로 최종 조정 할 수 있었다. 그동안 CF 촬영관계로 동남아에 며칠씩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두달 동안이나 장기간 외유는 이번이 처음이라 왠지 벅찬 감흥이 느껴졌다. 이번 촬영엔 엄마도 동행하게 돼 한결 마음이 든든했는데 걱정이 되는 것은 집에 남은 동생 진영이와 `뚜뚜' 였다. 뚜뚜는 바로 우리 집의 귀여운 마스코트역할을 하고 있는 푸들 강아지. 궁리끝에 나는 같은 인트로사무실 소속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고 또 강아지를 끔찍이 좋아하는 최민수오빠에게 뚜두의 보모역할을 맡겼다. 6월12일 5시30분, 나는 스웨덴발 브리티시에어라인에 몸을 실었다. 장길수감독을 비롯한 일부 스테프들은 이미 1진으로 현지에 도착, 촬영을 준비중이었고 나는 엄마와 제작사인 세원필림의 김계성사장, 촬 영감독 등과 함게 2진으로 동승하게 됐다. 스웨덴까지는 24시간 비행으로 중간에 홍콩과 영국을 경유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첫 경유지인 홍콩의 공항에서 였다. 체류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나는 공항내 면세점에서 달력에서만 보아왔던 스웨덴의 풍경을 담기 위한 카메라를 고르는데 열중했다. 모양과 기능, 그리고 가격을 저울질하다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가 탑승시간을 10분밖에 안남겨 두게됐고 나는 최종적으로 니콘카메라를 하나 선택했다. 그런데 구매절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점원은 손 가락으로 장소를 가리키며 확인서를 받으라고 알려주었고 그곳에 급히 달려가보니 확인서와 함게 사은서비스로 물품교환 쿠폰을 주었다. 탑승시간이 가까워왔지만 알뜰한 진실이가 어찌 공짜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고속 뜀박질로 물품교환장소로 가니 예쁘장한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지체할 여유도 없이 기내로 뛰어들어갔을 때는 바로 이륙 직전. 헐 레벌떡 마지막으로 내가 입장하자 스튜어디스가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 읍니다" 라고 멘트를 했고 손님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놓칠세라 오른손으로 브이 (V) 자를 그리며 답례했다. 스웨덴행 항공기는 홍콩을 지나 두번째 영유지인 영국을 향하고 있 었다. 영국까지는 18시간의 장시간 비행으로 나는 이를 대비해 지루함 을 덜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10여권 준비해온것. 나는 신달자의 `노을 을 삼키는 여자', 김성종의 `연인열차', 에릭 시걸의 `닥터스' 등을 갖 고 왔는데 김포공항 서점에서 한권의 책을 추가시켰다. 내가 승미역할로 출연했던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이 소설로 나와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게된 것 이다. 독서와 달콤한 단잠을 즐기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덧 영국공항에 착 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히드로공항에서 또 한차례 생각 지도 않았던 대소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것. 히드로공항에서 우리 일행이 휴식을 취하고 비행기에 오르려는데 촬영감독님이 그만 여권을 분실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담배를 피 우다가 일행이 탑승을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모이는 바람에 여권을 그 냥 놓고 오신것. 일행은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보물찾기에 들어갔지만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히드로 공항에서 분실물을 찾기란 불가는한 일이었 다. 촬영감독이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우리가 스웨덴에 가보았자 촬영 이고 뭐고 말짱 헛일이 될것이 아닌가. 우리는 난감한 심정으로 승강 장을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국검문원이 촬영감독에게 여권제시를 요구했다. 하지만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 우리일행이 짧은 영어로 여권분실 이유와 사정을 설명하기란 수월 치 않았고 결국 우리는 세계공통어인 손짓발짓으로 그간의 사정을 진땀 나게 그려보였다. 다행히도 영국인 검색원이 우리의 보디랭귀지를 이해하며 통과시켜 주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스웨덴 입국수속에 우리는 다시 똑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 에 합작영화문제로 홍콩에 갔을때 여권문제로 곤혹을 치른적이 있었다. 홍콩검색원이 내 여권을 보더니 다짜고짜 나를 조사실로 데리고 가 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여권에 붙은 사진이 미세하게 뜯겨져 있어 위 조혐의를 조사한 것이었는데 결국 오해를 풀었지만 정말 당황했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우리가 몸짓으로 여권을 영 국에서 실수로 잊어버렸음을 설명하자 스웨덴 검색인이 흔쾌하게 통과 시켜준 것. 나는 스웨덴에 대한 첫 인상에 1백점 만점을 주고 싶었다. "탁스 미케!" (스웨덴말로 감사합니다란 뜻) 공항엔 장길수감독 등 1진으로 입국했던 촬영팀이 벤츠차를 대기시 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만 벤츠였지 고급승용차가 아닌 12인승 봉고차로 문짝도 삐걱거리는 완전 고물차였다. 우리는 고물 벤츠를 타고 촬영장소인 후딩에 헬렌베리스 베겐마을 을 향했다. `수잔브링크의 아리랑'의 촬영장소인 후딩에 헬렌베리스베겐마을은 아름 다운 전원도시였다. 녹색으로 펼쳐진 언덕위엔 담도 없이 아담한 하얀집들 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우선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사람이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 사람 들은 낮에도 잠만 자나? 이유를 알아보니 휴가철인 관계로 외국여행을 떠 난 사람들이 많았고 또 대부분 승용차를 갖고 있어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드 물다는 것이었다. 힘들게 발견한 한 스웨덴 사람이 핫팬츠 차림으로 정원의 잔디를 깎고 있 는 모습이 그렇게 한가롭고 여유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 촬영팀은 재스웨덴 한국교포인 유송일씨집을 전세내 본부를 차렸고 엄마와 나는 거기서 몇집 건너 위치한 한국교포 석영이네 집에 여장을 풀었 다. 도착 다음날 우리는 고사를 지냈다. 장감독님이 외국이지만 관례대로 영 화가 잘되기를 바라는 고사를 지내야 마음이 편할것 같다고 말해 시루떡과 향을 준비한 것이다. 어디서 누가 고사의 격식을 차리기 위해 용케도 돼지 머리를 구해왔고 나는 돼지입에 2백크로나(스웨덴 화폐단위, 약 2만원정도) 를 꽃았다. 또 스톡홀름 시내로 들어가 수잔브링크역을 위한 의상구입을 했다. 이미 나는 서울에서 이번 역할을 위해 두 트렁크분의 의상을 준비해 왔지만 현지 의상도 중요할 것 같아 5벌을 새로 샀는데 값이 국내보다 6-7배나 비쌀뿐더 러 패션감각도 별로 뛰어나지 않다고 느꼈다. 첫 촬영은 스톡홀롬 시내의 노천카페에서 진행됐다. 수잔브링크가 고교 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서빙을 하 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나도 한동안 여고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서빙을 한적이 있다. 여고를 졸업할 당시 몹시도 가난했던 집안사정상 대학진학은 생각하지 않았 다. 뭔가 직업을 구해서 집안에 보탬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졸업 을 하고 나니 딱히 할만한 일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 근처의 연신내의 `롯데리아'에서 시간당 600원씩 받 는 아르바이트를 4개월정도 했었다. 손님이 콜라 2잔을 주문하면 주방에 "콜라투"라고 전달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도 나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CF모델 활동을 하던 동생 진영이는 이러한 나의 야무진 꿈에 대해 기를 죽이곤 했다. "누 난 모델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 요즘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누 나 얼굴 갖고 모델을 하려고 그래. 시작해 봤자 열등감만 생길거야." 당 시엔 얄밉게만 느껴졌던 진영이의 충고였다. 카페장면은 여러 대사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시시때때로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스태프진들이 고생을 하 셨지만... 수잔브링크가 스웨덴에서 막연히 고국을 그리며 아리랑을 불렀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스웨덴로케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나는 수잔브링크와 일심동체가 되 어 진짜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나갔다. 나는 이미 서울에서 MBC`인간시대'의`수잔브링크의 아리랑'편 테이프를 구해수십차례 시청하면서 수잔의 걸음걸이, 말할때의 모습등을 유심히 관 찰, 외워버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이러한 외양들보다도 정말 수잔이 느꼈던 것은 진실이가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또 스웨덴말의 발음에도 각별히 신경을 기울였다. 출국전 연출부 윤 철용조감독이 녹음해준 대사를 귀에 닳도록 듣긴했지만 스웨덴인과 같은 확실한 오리지널 발음은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러한 스웨덴어 익히기엔 재스웨덴 한국교포이면서 나의 코디네 이터역을 맡은 송규리씨가 도움을 주었다. 규리씨는 스웨덴어의 발음기호부터 가르쳐 주었는데 속상한 점도 많았 다. 자기 일을 즐기다보니 나의 발음지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 었고 마음이 급했던 나로선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여장을 풀고있는 한국교포 석영이네 엄마한테도 스웨덴말 지도를 받았고 영화속의 상대 스웨덴 배우들에게 대사를 주고받는 리허설 을 많이 해줄것을 요구했다. 특히 스웨덴말엔 우리발음에 없는 "르르.." 는 혀를 굴리는 발음이 많아 힘들었다. 촬영의 초반부는 수잔이 양모한테 학대를 받는 장면이 주를 이루었다. 나의 양모역을 맡은 스웨덴 배우 피아그렌은 `개같은 내인생'으로 알려 진 라세 할레스트룁감독과 영화작업을 함께 해온 유명배우로 영화`행복한 한 시간을 위하여'등으로 유럽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최고스타라고 한다. 또 나의 양부로 출연한 배우 라이시 그렌은 피아그렌과 실제부부여서 스웨덴 현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도 엄마를 속상하게 했을때 가끔 매맞아 본 기억은 있지만 태어나서 정말 그렇게 많이 얻어 터진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의 사실적 묘사를 위해 또 수잔의 아픔을 느끼기위해 나는 정말 피아그렌으로부터 학대받 기로(?)한 것이다. 뺨을 맞고 가방으로 얻어맞고 머리카락은 한움큼 빠지고...,큰덩치 외 국인의 넓적한 손에 "철썩"소리가 나게 맞을 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학대장면이 영화상에서야 10여분 정도겠지만 촬영상으론 3일동안으로 나는 완전 펀치볼이 됐다. 내가 온몸이 탱탱부어 끙끙 앓았음은 물론 가해자 (?) 피아그렌도 손바닥이 아파하고 "어아"...신음하며 괴로워할 정도였다. 때리고 맞는 장면에선 NG도 많이 나게 마련. `수잔브링크의 아리랑'에서 수잔이 양모로부터 학대를 받는 장면을 촬영 할 때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NG가 잇따랐다. 수잔이 학교에서 돌아와 양모에게 배고프다고 말하지만 그가 들은척도 않 고 계속 전화만 걸고 있자 수잔이 혼자 음식을 차려먹는 장면이었다. 이때 양모는 수잔에게 다가와 먹고있던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뺨을 때린다. 양모역을 맡은 피아그렌이 뺨을 후려치려는데 내 입에 먹고있던 국수가 락 하나가 삐져나와 있어 그렌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그렌에게 통역을 통해 "한국속담에 밥먹을 때는 개도 안때린다는 말이 있다'고 하자 그는 더욱 배꼽을 잡았다. 스웨덴 로케를 진행하면서 내가 맞은 이야기만 했는데 딱한번 내가 때린 적도 있었다. 수잔은 윌리엄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어느날 자신 의 고교기숙사 여자친구 에리카가 윌리엄과 애정행위를 나누는 광경을 목 격하고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수잔이 마지막으로 에리카에게 사실을 물 격하고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수잔이 마지막으로 에리카에게 사실을 물 어본 뒤 뺨을 올려치는 장면이 있다. 에리카에게 "진짜 때리겠다"는 양해를 구한 뒤 나는 회심의 일타를 쳤는 데 유난히도 "철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한방을 맞은 에리카는 "오, 쉬트!"라는 외마디 비명을 던지고는 뒤로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에리카는 곧 정신을 차렸지만 이후 계속 NG를 연발했는데 이유인즉 "충격을 받아 대 사를 다 잊어버렸다"는 것. 에리카역을 맡은 스웨덴 배우 멀린 베리아겐은 25살로 현재 스웨덴에서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하이틴스타라고 하는데 벌써 자식이 2명이라고 했다. 베리아겐의 첫번째 남자는 흑인이었고 지금 두번째 애인은 인디언이었는 데 인디언 애인은 시도때도 없이 촬영장을 방문했고 이들의 자유분방한 생 활방식이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베리아겐과 인디언 애인은 쉬는 시간마다 촬영장에서 포옹을 하고 키스 를 하는 등 진한 애정표현을 해 우리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당황 했던 것. 남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꼭 그래야만 하는지... 나는 스웨덴에서 한가지 위험한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스웨덴 남 자들은 덩치큰 북유럽여자보다도 까만머리, 까만눈에 아담한 체격의 동양 여자에 대해 신비스런 감정을 느끼면서 좋아한다는 것. 그러나 진실이는 정절을 중요시 여기는 한국여자. 혹시라도 찝쩍거리기 만 해봐라, 멀린을 KO시킨 매운 주먹맛을 보여줄테니. 뚱녀 말대로 "인상 을 잔뜩 찌푸리고) 한방이면 끝나"다. 가난때문에 4살때 스웨덴으로 입양된 스잔브링크는 두번의 자살기도로 비극의 정점을 이룬다. 첫번째 자살기도는 양모의 학대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수잔은 일기장에 자신의 심경을 적어내려간다.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내가 18살이 되면 저 여자에게 복수를 하리라'. 어느날 수잔은 일기장을 양모 에게 빼앗기고 매질을 심하게 당한뒤 자살을 기도한다. 칼로 자신의 동맥 을 긋는다. 어떻게 칼로 자신의 팔을 자해할 생각까지 들었을까. 두번째 자살기도는 사랑의 상실 때문이었다. 18살이 되자 고교기숙사 에 들어가 에리카란 여자친구를 만나고 그의 소개로 크리스터란 남자친구 를 만난다. 그러나 크리스터는 수잔이 임신하자 떠나버리고 핏줄의 끈을 그리워했 던 수잔은 아이를 낳고 미혼모가 된다. 수잔은 자신의 딸 엘레노라를 귀여해주는 윌리엄이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을 느끼지만 그 역시 에리카에게 뺏긴다. 수잔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목숨은 모질게도 이어진다. 수잔의 기구한 사연을 그리며 가슴이 아프도록 저며왔고 지난날 나 의 아픈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우리집이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게 된 것은 내가 동명여중 3학년때부터였다고 기억된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셨던 아버지는 귀국하자마자 사업에 실패했고 잘못된 꾐에 빠져 노름으로 돈을 잃으셨다. 이때부터 우리집은 기나긴 가난에 고통했다. 고등학교때엔 등록금은 물론 점심도시락도 갖고갈 형편이 못되었다. 고2때 마땅히 살집도 없게된 우리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는 외가로, 그리고 나와 진영이는 고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지하 단칸방 에 살게됐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하며 집안을 이끌어나갔지만 그나마 나의 등록금 련을 위해 처분했다. 고모집에서도 나오게된 나는 이젠 더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약방에서 쥐약을 한봉지 산 나는 죽기를 결심하고 입에 털어넣으며 걸었다. 마땅히 갈곳이 없던 나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영이네 집으로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다음날 지영이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엔 난 분명히 살아있었다. 그날 설사만 계속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약방 아저씨가 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쥐약대신 설사약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 나에게 주신 기회이고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지난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수잔이 겪었던 사랑의 상실과 회복을 보면서, 자신이 증오했던 모든 대상을 사랑으로 포용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삶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다시한번 음미해 봤다. 지영이와는 지금도 제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여고시절 나의 도시락도 장만해주던 의리파 지영이. 지영이는 몇달전 직장동료와 결혼해 원당에서 아기자기한 신혼살림을 꾸미고 있는데 지금도 나는 염치불구하고 지영이의 신방에 놀러가선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스웨덴 로케이션이 10일 정도 지나면서 나는 깊은 향수병에 빠져들었다. 동생 진영이가 끼니는 거르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지... 또 가장 보고 싶었던 것중의 하나가 국내사정과 연예계동정을 담고있는 국내 신문이었다. 나의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을 보는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스태프 진들도 차츰 외국촬영이 고생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저녁시간 맥주 로 하루의 피로를 씻을때도 우리는 "촬영을 빨리 끝내고 무사히 귀국해 삼 겹살에 소주파티를 벌이자"며 건배를 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외국생활의 어려움은 음식문제에서도 두드러졌 다. 우리는 숙소에서 마련한 한식으로 식사를 했지만 음식재료가 틀린 탓인지 맛이 우리나라 오리지널 한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늘 파 고추 등 음식재료를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 식탁엔 자그마치 열셋나라의 음식이 올려진다고 했는데 생선이 들어있는 국은 비릿해 먹 을수가 없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니 몸의 기운도 떨어졌고 두부를 썰어넣은 된장 찌개가 그렇게 그리워질수가 없었다. 이러한 내모습을 애처롭게 생각한 스태프진이 묘안을 하나 짜냈다. 스웨덴 스톡홀롬 시내에 한국음식점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자그마치 우리나라 돈으로 3만원정도하는 된장찌개를 공수해온 것. 특히 그 음식점의 아주머니는 내이름을 현지에 들어오는 한국신문을 통해 잘 알 고 있다면서 신경을 각별히 기울여 음식장만을 해주셨다고 한다. 오랜만에 제맛이 나는 된장찌개를 정신없이 먹고나니 힘이 다시 솟 아나는 기분이었다. 이후 나는 음식장만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현지에서 일제라면을 구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 라면보다 맛이 싱겁고 밋밋한 편. 나 는 여기에 고춧가루를 진하게 풀어넣는 등 갖은 양념으로 `최진실식 라면'을 만들어 촬영팀에게 돌렸는데 모두들 "속에서 열불이 난다"면서도 맛있게 드 셨다. 로케이션을 하면서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턱없이 부족한 수면시간이었 다. 틈만나면 잔다고 엄마로부터 `또자'라는 별명을 갖고있는 나는 하루 5시간정도밖에 못자는 강행군에 몸이 지치기 시작했다. 숙소로 들어온뒤 다음날 촬영 콘티를 짜고 대사를 외우다보면 밤 1-2시 가 된다. 현지의 모든 스케줄상 촬영팀은 아침 8시면 촬영준비를 완료하고 숙소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와 엄마는 아침 7시부터 지겨운 승강이를 시작한다. 엄마는 처음엔 "진실아 일어나, 촬영준비 해야지"라고 애처롭게 사정하다가도 8시가 가까 워오면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협박조(?)가 된다. "일어나, 이렇게 속썩이면 나먼저 한국으로 가버릴테야." 엄마를 생각해서도 그리고 촬영팀 모두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영화를 위해서도 이때는 눈을 번쩍 뜨지 않을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스웨덴 배우들과 언어의 장벽을 넘은 우정을 나 눴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나의 양부와 양모역을 맡은 라이쉬 그렌과 피아그렌은 어떻게 보면 묘 한 관계였다. 둘은 과거 실제 부부였지만 이후 이혼을 하고 현재각 각기 재혼해 살 고있는 상태였다. 촬영팀은 먼저 양모 피아그랜에게 출연을 섭외했는 데 피아그렌이 라이쉬 그렌을 소개해줘 동시에 출연이 이루어진 것. 이들이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 우정어린 공연을 벌이는 모습이 처음엔 무척 이채롭게 느껴졌다. 양부 라이쉬 그렌은 영화에서 처럼 나에게 "친딸같다"고 말하면서 자 상하게 대해주었다. 라이쉬 그렌은 지갑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대 학 다니는 아들이라고 자랑을 했는데 그럴때면 그 아들의 친엄마가 되는 피아그렌이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의 고교기숙사 친구로 나오는 에리카역의 멀린 베리아겐도 아주 친 절한 아가씨였다. 스웨덴의 청춘스타인 베리아겐은 나에게 "남자 친 구가 없냐" "스웨덴의 잉그리드 버그먼이란 배우이름을 들어보았냐" "한 국의 영화계 사정은 어떻냐" "나는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다"는 등 많 은 이야기를 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의 딸 엘레노라역을 맡은 헬레나는 단연 촬영장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똑똑한 아이였다. 헬레나는 연기를 처음 해보는 것이었지만 배 역을 앙증맞게 잘 소화해내며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나와 헬레나가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동시녹음으로 길바닥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나는 헬레나에게 이것 을 밟으면 안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헬레나는 이것을 잘 알아듣고 마 이크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덥석 안기며 재롱을 부리는 즉흥연기를 보여 주어 촬영팀의 감탄을 자아냈다. 나의 첫번째 애인인 크리스터역을 맡은 스웨덴배우는 원래 코미디언이 어서 특유의 코믹함으로 촬영장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한국말을 한번 가르쳐주면 앵무새처럼 똑같이 발음했다. 내가 처음으로 가르쳐준 말이 "너 참 귀엽다" "너 이름이 뭐니"였는데 크리스터는 이를 곧바로 써먹었다. 스웨덴로케를 떠나기전 나는 하나의 만남을 가슴 설레게 그리고 있 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 수잔브링크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나는 출국전 수잔에게 주기위한 선물로 한국의 인형과 도자기를 준비해 두었 는데 우리의 만남은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수잔브링크는 현재 스웨덴 웁살라 신학대학에서 한창 졸업논문을 준비중인 관계로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어느날 나는 식료품 을 사기위해 스웨덴의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수잔브링크의 사진이 크게 실려있는 신문을 발견했다. 나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신문을 한장 사갖고 와서는 코디네이 터를 맡고 있는 현지교민 송규리씨에게 신문기사의 해석을 부탁했는데 전혀 의외의 내용이어서 놀라게 됐다. 그 기사에서 수잔브링크는 이번 영화가 자신의 삶을 과장해 섹스장 면이 과다하게 포함돼 있고 주연배우의 개런티가 자신이 받은 돈보다 턱없이 많다는 것을 항의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했고 제작팀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스웨덴 현지에 내가 이번 영화의 주연배우로 결정됐고 6천만원의 개런티를 받았다는 국내의 보도가 전해진 모양인데 수잔은 누구의 말을 들었는지 이에 대한 항의를 변호사를 통해 해온 것 이었다. 하지만 제작팀은 배우의 개런티와 실제인물에게 주는 감사의 사례 를 연결시킨다는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과다한 섹스장면 묘사만 해도 그랬다. 수잔이 첫남자를 만나 미혼모가 되고 두번째 남 자를 만나 사랑에 실패하는 내용을 그리기 위해선 영화상으로 남녀의 애정장면이 삽입되겠지만 나 자신도 팬들에게 `벗는 영화' 에는 출연하 지 않겠다고 말해온 만큼 과다한 섹스신은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었고 이에 대해선 이미 감독과 충분한 토의를 거쳤었다. 이번 일은 주위의 잘못된 정보와 함께 한국인과 서양인의 문화적 차이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봤다. 실리와 자신의 권리에 철저한 서양인들의 생활방식을 무조건 탓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이러한 오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불식되어 간다는 소 식이 전해져 다행이다. 수잔은 제작진에 편지를 통해 "판단 잘못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못해서 미안하다" 는 내용을 보내왔다. 결국 나는 준비했던 선물을 수잔에게 전해주지 못했고 대신 코디네 이터 규리씨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나는 언제나 좌우명으로 내 이름처럼 진실되게 살겠다고 다짐해 왔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실은 언제나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번 영화를 통해 수잔의 삶을 정말 진실되게 표현하고 싶었 고 수잔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내가 `인간시 대' 를 통해 수잔의 진실을 느꼈듯 수잔도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보면서 그속에 있는 내 진실을 발견하리란 것을.... 스웨덴 로케가 보름정도 지났을때 동생 진영이가 촬영장으로 달려 왔다. 나는 출국전 진영이에게 이번 기회에 외국을 돌며 견문을 넓 히라고 권유했었고, 진영이로서도 우리 팀에 합류함으로써 첫 해외나 들이를 즐기는 셈이었다. 우리는 마치 이산가족을 만난것 처럼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고 오 랜만에 이 세상에 둘도없는 다정한 남매의 정을 나룰 수 있었다. 나는 진영이게게 스웨덴의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주었고 진영이는 내가 궁금 해하는 국내연예가 소식을 미주알고주알 일러주었다. 오랜 해외생활로 지쳐있던 촬영장도 새식구가 들어오자 활기가 솟 는 분위기였다. 진영이는 나보다 2살 아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야자 트는' (반말하는) 사이. 각자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도 모습 이 보이지 않으면 엄마에게 묻는 첫말이 "진영이는?" "누나는?" 일 정 도로 우리남매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지내왔다. 우리 남매는 각자의 활동에 있어서도 출연작품의 대본을 같이 읽 어보고 모니터해주면서 상의하고 걱정해준다. "진영아, 너는 연기하는 티가 나는 것 같애. 보는 사람들이 연기 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실생활처럼 하란 말이야." "누나, 과로하지 말고 몸조심해라. 이 세상에서 건강이 최고야." 진영이는 한번 술이 제법 취해갖고 들어와선 이런 말을 해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누난 늦게 시집갔으면 좋겠다. 우리 오래도록 지금처럼 재미있 게 지내자구." "알았어." 하지만 사람사는데 고운정만 정인가, 미운정도 정이지. 우리남매 는 티격태격 싸우기도 밥먹듯이 한다. 어렸을때는 집안의 전화기 를 집어던지며 맹렬하게 (?) 싸워 엄마한테 "집의 전화를 없애버리겠 다" 는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싸운뒤에 진영이는 휙 집을 뛰쳐나가고 나는 엄마한테 말 도 안되는 떼를 썼다. "나, 재하고는 도저히 한집에서 못살아. 따로 살게해줘" 이렇게 한번 큰싸움을 벌이고 나면 우리는 2주동안 아무말도 안하 는 냉전상태에 돌입했다가 화를 풀곤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싸우기 는 매한가지다. 나는 모든 음식을 잘먹지만 진영이는 음식을 가리는 편으로 이럴때면 나는 부아가 돋워 진영이에게 빈정댄다. "야, 무슨 음식을 그렇게 깨지락 깨지락 먹고있냐. 누가 너한테 시집올는지 모르겠지만 참 불쌍하다." "그런 너는 누가 데려가기나 할것 같애?" 또 진영이가 하루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반격을 가해온다. "오늘 충무로에 갔다 왔는데 누가 너 흉보더라." "누가?" "도대체 어떻게 행동을 하고 다니길래 그런 흉을 보냐말야. 동생 인 내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못다니겠더라." "야, 너 누나도 못믿고 그런 헛소문을 듣고와선 날 몰아세우는 거 야?" 하지만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결국 `남매싸움은 칼로 물베 기' 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영이와 나에겐 잊지못할 추억들이 많다. 삼송리 시골집에서 어 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 남매는 늘 함께 붙어다니며 친구처럼 지냈다. 동네어귀의 강에서는 여름엔 그물을 갖고 물고기를 잡았고 겨울에 는 스케이트를 지치며 놀았다. 또 봄엔 뒷산에 놀러가 아카시아를 따 먹었고 가을엔 하루종일 볏단에 누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볏집이 묻은 옷을 입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선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다. 국민학생이 되어서도 우리 남매는 버스를 타고 30분거리가 되는 불 광국민학교로 등-하교를 늘 같이 하며 단짝으로 붙어지냈다. 그런데 하교길에 내가 진영이에게 했던 미안한 일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각자 토큰 2개씩만 달랑 호주머니에 넣고 통학했는데 활발하게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토큰을 잘 잃어버리는 편이었다. 당시엔 버스에 요금을 받는 차창이 있어서 나는 버스를 타려다 토 큰을 잃어버린것을 발견하곤 "언니, 나 토큰 잃어버렸어요" 라고 겸언 쩍은 듯 말하면서 양해를 구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중간에 수업을 마친뒤 또 내가 토큰을 분실했음을 발견하고 진영이가 공부하는 반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오전 반이고 진영이는 오후반이어서 내가 먼저 진영이의 토큰을 갖고 집으로 간뒤 다시 토큰을 갖고 학교로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나는 엄마한테 토큰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꺼 내면 혼날 것이 두려웠고 그냥 집에서 진영이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깜깜한 밤이 되도록 진영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 고 나는 무서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 한밤에 걱정이 돼서 밖으로 나 가보니 진영이는 학교에서 나와 집까지 버스타고 30분되는 거리를 걸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진영이는 내가 굉장히 얄미웠겠지만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이러한 사정을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만큼 진영이는 어릴적부터 사려깊은데가 있었다. 사춘기시절 우리 남매는 집안형편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 었다. 진영이는 한동안 신문배달도 하고 우리와 육촌이 되는 최재성오 빠의 소개로 CF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내가 슬퍼했던 것 만큼 진영 이의 정신적 방황도 무척 컸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연탓인지 우리 남매가 집에서 마주앉아 소주도 곁들 이면서 이야기를 할때면 보통 3단계 과정을 거친다. 첫번째 단계는 늘 상처럼 가벼운 티격태격이 있지만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추켜세워주고 PR 해주는 2단계가 있게 된다. 그후 각자의 주량껏 술에 취해오기 시작하면 우리 남매는 옛날 이 야기를 하며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저녁에 시작한 술자리가 다음날 새벽 5시쯤이 되는데 엄마는 새벽부터 무슨 청승이냐 고 야단을 치시고 우리는 방에 들어가 곤한 잠에 빠진다. 진영이는 여태까지 3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모두 흥행면에선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진영이는 자기가 출연했던 영화 `산산 이 부서진 이름이여' `있잖아요 비밀이에요2' `열아홉의 절망끝에 부 르는 하나의 사랑노래' 의 관객숫자를 모두 합쳐도 내가 출연한 `나 의 사랑, 나의신부' 한편의 관객숫자에도 못미친다면서 이러다가 영 화출연 섭외가 안들어오는 것 아니냐며 푸념이다. 여하튼 진영이는 영화에 대한 사랑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동안 진영이는 TV 출연 제의도 여러번 받았지만 영화만 고집하 고 있기도 하다. 진영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가 안성기 선배다. 진 영이는 인기에 신경쓰지 않고 안성기선배처럼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배우가 되겠다고 말한다. 진영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중의 하나가 `최진실의 동생 최 진영' 이란 말이다. 진영이는 인터뷰를 할때도 이러한 말이 나오거나 자신의 이야기 가 아닌 누나의 이야기를 물어오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누나의 후광을 입어 인정을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 다는 진영이의 소신이기도 하다. 나는 이처럼 자기의 일을 사랑하 고 열심히 살아가는 진영이의 모습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다. 진영이는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의 스웨덴 촬영장에서도 늘상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며 잔심부름도 하면서 나를 응원해주었다. 진 영이가 하루는 모든 촬영팀이 열심히 일하는데 자신만 특별한 역할이 없이 노는 것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면서 이 기회에 여행을 다녀오 겠다고 했다. 진영이는 여비와 식비만 갖고 파리를 1주일 다녀왔는데 나에 대 한 선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진영이는 숙비를 절약해 나에게 보석 이 장식된 예쁜 팔찌를 사온 것이었고 나는 동생의 깊은 애정에 진정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스웨덴 로케를 하면서 힘들었던 장면은 애정신이었다. 수잔의 첫번째 애인 크리스터가 나를 안고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 는 그의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NG 를 연발했다. 상대배우는 얼굴색이 경직되며 피하는 듯한 나의 태도에 화를 벌 컥냈다. "내가 그렇게 못생겼냐, 왜 나를 피하냐" 며 항의를 하는 것이었 는데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애정표헌을 하는 자신들의 생각으로선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나는 아직 배우로서 진한 애정신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설명해 주었다. 결국 크리스터와의 키스신은 카메라의 위치조정에 의한 트릭으로, 두번째 남자 윌리엄과 의 애정신은 롱샷으로 처리됐다. 스웨덴에서 한국대학생 배낭족들을 우연히 만난 것도 해외로케중 청량제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오전 8시쯤 스웨덴의 한 전철역에서 촬영을 할때였는데 여행객중에 동양인들이 많이 눈에 띄어 무척 반가 웠다. 그런데 이들 여행객들 사이에서 "최진실 아냐?" "어머 정말 그렇네." "맞아 최진실이야!" 라는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나에게 달 려와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배낭을 들고 여행온 우리나라 대학생들 로 정말 타지에서 한국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 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나에게 사인요청을 하고 사진촬영도 같이 하면서 뜨거운 동족애를 나누었는데 스웨덴 배우들에겐 이러한 모습들이 놀랍고 신 선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스웨덴배우들은 아무리 유명스타라고 하더라도 길거리에서까지 팬들이 쫓아다니는 일은 드물다며 한국사람들의 좋아하는 표현히 굉 장히 열광적이라고 말했다. 오전에 만난 이들 배낭족들은 밤늦게까지 우리 촬영장에서 함께 하며 열성스러운 응원을 보내주었다. 우리촬영팀은 금요일 저녁을 이용해 오랜만에 스톡홀롬 시내를 돌아다니며 피로를 씻는 시간을 마 련하기도 했다. 스웨덴은 토요일이 휴일이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의 거리가 가장 활기가 넘치고 흥청거리는 모습이었다. 먼저 우리팀은 맥주를 파는 시내의 한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채로 자신의 흥에 맞추어 춤도 추면서 맥주를 먹는 모습 이 자유분방하게 느껴졌다. 한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부르면서 분위기를 돋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술먹는 것도 폭음을 하는 사람은 드 물었고 큰 맥주컵 하나를 손에 들고 천천히 먹으면서 분위기자체를 즐기는 모습들이었다. 호프집에서 나와 우리는 디스코테크에 갔다. 블루스곡은 없이 빠른 댄스뮤직이 신나게 흘러나왔는데 랩송이 주류를 이루었고 우리 일행은 모처럼만에 화끈하게 몸을 흔들어대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디스코테크에 즐기러 온 사람들중엔 3분의1 정도가 혼자온 것도 이채로웠는데 이들은 서로 초면인데도 자연스럽게 말도 붙이면서 어 울렸고 때로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띄어 우 리를 민망하게 했다. 디스코테크에서 한 스웨덴 남자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어 이상 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뚫어지게 계속 쳐다보고 있어 통역을 통해 이유를 물어봤더니 일종의 데이트 신청이었다. 물론 나는 "노땡큐 (NO THANK YOU)" 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이를 낳는 장면 을 연기하게 됐다. 수잔이 실연의 아픔속에서도 자신의 핏줄과 이어 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미혼모가 되는 장면이 었다. 영화를 통해 아이를 낳는 광경을 많이 보긴 했지만 나는 엄마에게 출산의 과정과 아픔 등을 열심히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한번 그려보았다. 또 아이를 낳는 장면에 관한한 장길수감독도 생생한 경험(?) 을 갖 고 있었다. 장감독은 자신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직접 옆에서 지 켜보았다며 자상하게 연기지도를 해주셨다. 그래서 장감독은 진통을 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소리를 크게 내라" 고 주문하기도 했다. 비록 연기였지만 갓 태어난 아기를 손으로 받아들 때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비함과 경외감, 핏줄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가슴속 에 느껴져왔다. `수잔...' 을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것중의 하나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에서도 내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 이 한번 있었지만 이번에도 흡연장면이 여러번 있었다. 장감독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이렇게 주문을 했다. "김혜자씨가 연기하는 것처럼 담배는 멋있고 맛있게 피워야 한다." 쓸데없이 입으로만 담배를 뻑뻑 멋없이 (?) 빨아대다가 NG 도 많이 냈고 한번은 독한 연기가 코로 넘어가는 바람에 한참동안이나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장감독은 배우가 되려면 "담배도 피워보고 술도 마셔보고 또 사랑 도 해봐야 한다" 고 하면서 촬영기간중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영화 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한국영화가 해외영화제로 부단히 진출 해야되는 이유등 영화전반에 대한 이야기부터 장감독 스스로 겪었던 힘 들었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우리는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장감독은 예전에 다른 직업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현재 영화감 독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좋고 행복하다고도 말했다. 촬영을 진행 하면서 장감독은 배우를 굉장히 아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꾸 NG 가 나고 화를 낼만한 상황에서도 장감독은 "왜 그래요" 란 한마디 정도로 불만을 대신했다. 또 장감독은 시종 명쾌하고 빠른 판 단으로 촬영을 진행해 성격이 급한 편인 나와 통하는 점이 많았다. 나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느리면 답답해지는 편인데 그런면에서는 장감독의 쉴때는 쉬고 일할때는 열심히 몰두하는 화끈한 진행방식이 마 음에 들었다. 여하튼 장감독과 나는 서로 잘 맞는 감독과 배우라고 생각했고 `수 잔...' 이 끝난 후에 다시한번 같이 작업할 기회를 만들자고 약속하기 도 했다. 수잔브링크는 두번째 자살기도의 충격에서 벗어난후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간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질사회에 던져져 소외와 사랑의 결핍속에 고민하던 수잔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기 시 작한다. 현재 수잔은 스웨덴 웁살라 신학대학 졸업반에 재학중이다. 나 자신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청소년시절 늘 기도를 드리며 새로운 힘을 얻었던 생각이 난다. "하나님, 저에게 한번만 힘을 주세요. 한번만 힘을 주신다면 영원히 하나님 은혜를 잊지않고 열심히 살아갈께요." 그당시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문이 열려져 있는 교회가 있으면 혼 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곤 했다. 또 멀리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를 따라가 선 십자가 앞에 서서 나의 간절한 마음을 말했다. 정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가난과 방황을 벗어나 많은분들의 사랑 을 받는 행복한 진실이가 된 것은 나의 신앙이 가져다준 은총이라고 생각 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혼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야 정말 내가 말하고 싶은 것 을 모두 털어놓는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은 어린시절 교회장로로 일하신 할머니의 손 을 잡고서였다. 어려서였겠지만 나는 축제일마다 교회에서 선물을 받을 때가 너무도 좋았다. 부활절때 삶은 계란을 받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 던 내 얼굴표정이 떠오른다. 국민학교때 엄마가 손수 지어준 발레복을 입고 교회의 연극에 참여했던 일도 즐거운 기억이다. 요즘 나는 교회에 자주 못나가는 편이라서 정말 죄스러운 생각이 들때 가 많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며 산다. 촬영현장에서 일이 잘 안풀릴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짜증을 내다가도 곧 마음속으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서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두손을 모으고 내 마음을 전한다. "오만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고 언젠나 겸손한 진실이가 되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 평생토 록 건강하고 진영이도 하는 일이 모두 잘되게 해주세요." 내 생일은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모든 사람이 이때를 기다리 겠지만 나는 생일도 겹치게 되는 까닭에 12월이 더욱 축복스럽게 느껴진 다. 아, 벌써부터 하얀 눈이 기다려진다. 내가 갖고있는 액세서리중 반이상은 십자가 모양이다. 나는 몸에 십자가가 없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늘상 하나 이 상의 십자가 목걸이나 귀고리를 몸에 간직하고 있다. 스웨덴국왕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웁살라의 한 교회당에서 촬영할때 였다. 교회앞에서는 십자가 장식품을 팔고 있었고 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 십자가 목걸이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날 촬영장에는 엄마도 동 행하지 않았고 내 호주머니에도 돈이 한푼도 없어서 목결이를 살 수 없 는 것이 무척 아쉬었다. 촬영팀과 늘상 같이 행동을 해야하는 나로선 여기에 다시 올 수 있 는 기회도 없을 것 같아 목걸이를 사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 일이지만 나는 결국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십자가 목 걸이를 스웨덴 공항에서 목에 걸 수 있었다. 연출부 일을 도와주던 현지 교민이 그날 내가 그토록 목걸이를 사고 싶어했던 모습을 생각하 고 일부러 그곳을 다시 찾아가 종류별로 십자가 액세서리를 사갖고 와 서는 출국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자신도 기독교신자라고 하면서 전해주는 현지 교민의 선물이 나로 선 그렇게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스웨덴 로케이션 기 간중 우리는 한번 신나는 파티를 가졌다. 우리 촬영팀의 선장역을 맡 고있는 장길수감독의 생일파티였다. 우리는 숙소에서 조촐한 케이크를 준비하고 `해피 버스데이 투유' 를 합장했는데 장감독의 부인이 바다건너 배달한 사랑스런 꽃다발이 도 착돼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우리 촬영팀은 신나는 노래 대결로 흥을 돋우었다. 장감독은 추억의 팝송을 멋들어지게 불러 앙코르를 받았는데 역시 이날의 스타는 동생 진영이었다. 술도 적당히 먹은 진영이는 누가 시 키지도 않았는데 3-4곡 메들리로 부르며 독무대를 이루었다. 모두 적당히 술이 오르자 어느 순간 트롯가요가 주류를 이루기 시 작했고 나는 김수희의 `멍에' 를 목청껏 불러젖혔다. 결국 최고가수 에게 시상하기로 했던 담배 한보루는 승부를 못가린채 촬영팀 모두에게 한갑씩 사이좋게 나누어졌다. 스웨덴의 색깔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파란색' 이라고 말하고 싶다. 열대지방이면 야자수 나무가 생각나듯 스웨덴을 생각하면 어디를 가나 펼쳐져있는 파란 잔디와 평화로운 풍경이 떠오를 것 같다. 스톡 홀름 시내 중앙엔 커다란 파란잔디 운동장이 하나 있다. 이곳은 바로 선탠 전용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옷을 훌렁 벗은채 핫팬츠 차림으로 몸 을 태우는데 열중이다. 처음 보았을 때엔 민망하게만 보였던 스웨덴사람들의 핫팬츠차림도 이젠 별로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스웨덴 로케이션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결국 사고 (?) 를 치고 말았다. 스웨덴 현지는 이상기온에 따라 우리가 처음 도착했을때부 터 체감온도가 섭씨 2-3도일 정도로 몹시 쌀쌀했다. 나는 촬영을 쉴 때마다 오리털파카에다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추위를 피했는데 촬영말 기에는 감기에 걸려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됐다. 촬영중 나는 현기증을 일으켰고 밤촬영을 뒤로 미룬채 숙소로 돌 아왔지만 머리는 펄펄 끓어 올랐고 몸엔 오한이 생겨 이불을 세네겹 뒤집어써도 덜덜 몸이 떨려왔다. 예정국 출국일은 가까워오고 촬영분량은 남아있고 걱정되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현지의 병원에 가는 일도 수월치 않은 것이었다. 스웨덴은 의료보험제도가 무척 잘돼 있는 나라라고 했지만, 외국인의 경우 수속절차가 무척 까다로웠고 약국에서 약을 사는 것도 의사의 진단서가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나는 촬영팀이 준비해 왔던 상비약과 현지교민이 구해온 약 을 먹으며 열이 내리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그날 엄마는 나의 머리 맡에 앉아 찬 물수건을 얹어주며 꼬박 밤을 지새면서 간호를 해주었 다. 다음날 아침 몸상태는 어느정도 호전됐지만 목소리가 문제였다. 동시녹음인 관계로 걸걸하게 쉰 목소리로는 촬영을 진행할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이틀간의 휴식을 취한뒤에 남아있는 촬영분을 마무 리 지울 수 있었다. 43일간의 스웨덴로케를 끝내고 돌아오게 됐다. 그 기간동안 촬 영에 중점을 두고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임해왔기 때문에 일에는 후회가 없었지만 제대로 관광을 못한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나는 귀국 비행기에 오르면서 언젠가 다시한번 스웨덴에 와서 평 화로운 이곳의 분위기에 한가롭게 젖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기분은 정말 `푸근함' 그 자체였다. 나의 매니저일을 보아주는 배병수아저씨는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자던 침대에서 자고 엄마가 해주는 된장찌개와 내가 직접한 수제비를 먹으면 몸이 금방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귀국후 3일간 집에서 `먹고자고' 식의 휴식을 취했고 나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아 원기를 회복하게 됐다. 이후 우리촬영팀은 국내촬영에 돌입했다. 바로 수잔이 스웨덴 에서 장목사를 통해 고국의 소식을 듣고 MBC 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딸 엘레노라를 데리고 내한, 한 국의 친엄마와 극적인 상봉을 하는 장면이었다. 43일간의 장기간 스웨덴 로케를 마치고 귀국후 `수잔브링크의 아리 랑' 의 국내 마무리 촬영은 김포공항에서 시작됐다. 26년만에 이루어 지는 수잔과 친엄마의 극적인 상봉과 만남의 기쁨을 뒤로한채 스웨덴으 로 향하는 아쉬운 이별의 장면을 공항에서 찍게된 것이다. 수잔의 친 엄마역은 김윤경선배가, 친오빠역은 안병경선배가 맡게 됐다. 나는 공항장면을 시작하기 전에 배우로서 나의 생각을 장길수감독 에게 말했다. 만남과 이별의 장면을 하루에 촬영하지 말자는 건의였 다. 영화를 촬영할 때는 간혹 죽는 장면을 살아있는 장면 보다 먼저 촬영할 때가 있을 정도로 콘티의 순서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 만 나는 두개의 가슴벅찬 상황을 하루에 연기하는 것은 감정을 잡기가 힘들것 같다는 솔직한 느낌을 말했던 것이다. 공항신 촬영에 앞서 수잔의 딸 엘레노라역을 맡은 헬레나가 태국인 엄마와 함께 한국에 왔다. 헬레나의 숙소는 아리스토리아호텔로 잡혀 있었지만 하루는 내가 헬레나를 우리 집에 초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헬레나에게 무엇을 선물해줄까 고민하다가 내 방에 가득한 인 형들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그중엔 팬들이 나를 위해 정성들여 선물 해준 것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팬들도 이해해주리라 생각에서 나는 헬레나의 양손에 인형을 한아름 안겨주었 다. 헬레나와 나는 보통 눈짓과 손짓으로도 의사소통일 잘 되지만 특히 내가 헬레나의 양볼에 키스를 해주며 잘하는 말이 하나 있다. "여 에스카레데." (스웨덴 말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첫 공항신은 수잔과 친엄마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날 문제가 생긴 것은 수잔의 입국장면에서 같이 공항을 빠져나오는 외국인 엑스트 라의 등장이었다. 외국배우가 한국영화에 출연하는 경우, 취업비자 가 있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는데 이날 출연키로 되어 있던 5명의 외국인 엑스트라중 2명만이 촬영장에 나온 것이었다. 매사에 철저한 장길수감독은 촬영을 진행하지 않았고 결국 헬레나 의 친엄마가 즉석에서 엑스트라로 기용되어 수잔의 입국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엑스트라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영화에 출연한 또 한명의 엑스트라 를 말한다면 나의 매니저일을 보는 배병수아저씨가 공항에서 잠깐 얼굴 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아저씨는 내가 출연한 영화중 `남부군' 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에도 출연했는데 두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 이번에도 흥행이 잘 되 기를 바라는 간절한 의미에서 특별출연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윤경선배와 공연한 공항에서의 만남장면을 촬영할 때엔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잔이 엄마와 부둥켜 안고 26년간의 원망과 슬픔을 눈물로 씻어내는 순간이었다.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의 공항장면은 결국 4일간에 걸쳐 만남과 이별의 순간을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이후 촬영팀은 이태원 서울랜드 남대문 등지를 돌며 수잔의 가족이 며칠동안이나마 행복한 시간을 함 께하는 장면을 촬영해 나갔다. 또 26년만에 만난 수잔 모녀가 한방에서 같이 자며 핏줄의 정을 나누는 장면은 월계동 라이프아파트에서 촬영했다. 특히 국내에서 의 촬영은 스웨덴에서 온 헬레나의 체류기간이 일주일정도밖에 안되 는 관계로 전적으로 헬레나가 나오는 장면에 맞추어 스케줄이 진행됐 는데 헬레나는 출국당일 오전까지 촬영을 하는 바쁜 일정을 보내 무 척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수잔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서울랜드에서 촬영 할때 함께 우리의 음식을 먹고 `바이킹' 을 탔던 일들이다. 헬레나 가 스웨덴으로 돌아가던 날 우리 촬영팀은 모두 공항으로 배웅나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헬레나는 우리의 모두의 얼굴에 키스를 하며 정들었던 마음을 표 시했다. 헬레나는 무척 섭섭한 눈빛으로 내게 "스웨덴에 와서 꼭 다시 만나자" 고 말했고 나는 약속을 하면서도 언제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꼭 쥔 손을 오래도록 놓을 수가 없었다. 촬영을 모두 끝내고 나는 영화진흥공사에서 편집된 필름을 보았 다.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많이 울었지만 필림을 보면서 더 많이 울 었던 것 같다. 나의 어린시절 역할을 맡은 신진희란 아역배우는 정 말 너무나도 슬픈 연기를 잘해내 영화초반을 가슴뭉클하게 만들었다. 진희는 너무 서럽고 실감나게 울어대 `우는연기' 에 관한한 모두 손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름 을 보면서도 후회같은 것은 없었다. 이 작품은 나에게 여러가지로 시험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동안 나는 CF 의 발랄하고 깜 찍한 이미지가 강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많은 분들이 그러한 내 모 습을 사랑해주셨다. 이 작품에서 나는 수잔의 10년간의 삶을 연기했기 때문에 어느때 보다도 많은 연구를 했고 생각하는 연기를 하기위해 노력했다. 이 영화를 하면서 느낀 점도 많다. 수잔이 스웨덴을 떠나기전 인터뷰 를 하는 내용에서도 나타나듯 왜 우리에게 고아수출이라는 불행한 일 이 있어야 하는지 정말 안타까웠다. 또 어릴때 스웨덴으로 갔던 수잔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 사이 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나날들과 극복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를 연기하면서 정말 그가 행복해지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영화를 한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겠지만 나 역시 이러한 심정은 마찬가지다. 추석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의 반응을 생각하며 어떤 대는 밤늦도록 잠을 설치기도 한다. 고생한 촬영팀 모두에게 부디 좋은 결실이 맺어지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43일간의 스웨덴로케이션을 비롯해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을 촬영 하는 동안 나는 다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이 영화 하나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한편으로는 팬들과 만남의 기회가 너무 없었 기 때문에 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통해 새로운 진실 이의 모습으로 팬들에게 식상하지 않은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최근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의 공개방송에 출연할 때의 일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열렬한 환호를 해주어 정말 공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시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보내주는 사랑속에서 나의 행복과 공인으로서의 책 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나 자신도 인기라는 것에 실감이 나 지 않을 때가 많다. 데뷔시절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왜 인기가 높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 게 된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엔 나도 딱 무어라고 대답할 수가 없고 오히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자에게 반문하게 된 다. 나보다 예쁜 사람들도 굉장히 많은데.... `스타일기' 를 통해 나의 어려왔던 청소년시절을 이야기 할때는 정 말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들에 많 은 격려가 있기도 했다. 집으로 오는 편지중엔 "언니가 어려웠던 시절 을 이겨내고 잘된 모습이 참 좋다" 는 내용이 많다. 현재의 삶이 어 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은 일인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방에서 혼자 팬들이 보내준 편지를 읽는다. 그 중엔 나의 촬영스케줄을 물어오며 현장에 와서 나를 보고싶다는 내용도 있고 "꼭 배우가 돼서 언니하고 한 작품에서 공연하고 싶다" 는 내용도 있어 읽을 때마다 연기자로서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정성들여 팬레터를 보낸 분들께 일일이 답장을 못해 드리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 송구스럽다. 시간이 나는대로 나는 편지를 읽고 답장 을 써서 보낸다. 간혹 내가 보낸 답장에 대해 혹시 가족이나 매니저 가 대신 써준 것 아니냐는 질문도 받지만 답장만큼은 정말 내가 깊이 생각해서 쓴다. 가끔 팬사인회에 나갔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인회를 도중에 그만두 게 되는 일도 생기는데 나는 이럴 때엔 주최측에 항의를 하고 이런 사 인회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를 위해 먼 발걸음을 해준 팬을 위해서도 그것은 내가 할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팬들이 보내는 사 랑의 마음 하나하나를 나는 가장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언제나 꾸준히 노력하는 연기자, 겸손한 자세를 잃지않는 연기자가 될 것을 약속드리며 노력하는 진실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사랑해주기를 부탁드린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