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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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wha ] in KIDS
글 쓴 이(By): claudia (가 아님...맧)
날 짜 (Date): 1998년01월21일(수) 02시30분17초 ROK
제 목(Title): Re: 어떤 프로포즈..


어나니에 보면 술취해서 하는 남자의 말을 어떻게 봐야하느냐는
글들이 있었던 것 같던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은 그 남자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알콜에 의해 억제중추가
마비된다나해서 떨려서 못하던 말을 알콜 기운 빌려서 하는 순진파도
있고... 비슷한 이유로 맨정신으로는 못하는 거짓말을 알콜 기운
빌려서 하는 경우도 있고... 술 취하면 후해지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선심성 말을 남발하는 사람... 취해서 감정 억제를 못하고는
싸였던 감정을 터뜨리는 사람... 취해서 하는 말은 진실이고 쌓인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는 계산에 술 먹고 취한 척 이야기하는
사람 등등등... 이것은 여성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술 먹고 그 사람이 프로포즈를 했다면... 거기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을까? 아마도 많은 경우는 프로포즈 같이 뭔가 쉽게
답이 안보이는 것을 술기운이라도 빌려서 라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이러라는 법은 없으니 상황에 따라 본인이 잘
판단하는 수 밖에...

마담X님 글을 보니 서양 사람들은 프로포즈를 마치 어떤 결혼 전의
의례처럼 여기나보다... 우리나라는... 서양식으로 하는 사람도
있겠고... 어떤 좀 더 조용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듯...

하여튼, 마담X님 글을 보면서 온갖 생각...

***

내(limelite)가 claudia에게 했던 프로포즈는 지금으로 보면 연인이
되자는 의미였다... 처음 나는 쉽게 claudia와 연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내가 85학번이고 claudia가 90이었으니 5년차라는
만만치 않은 학번차가 염치를 생각하게 하는데다, claudia는 그
어려운 동문후배였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새까만 여자후배한테
먹을 것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한다는 기분으로 같이 다녔었
는데...
그 때가 92년 12월24일 대선 직후 크리스마스이브였던 듯... 당시
학번들은 대선 직후의 패배감이랄까 상실감 같은 것을 이해하겠지...
오후에 claudia를 만나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헤어져 동문모임
(남자들만의)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득 내가 동문후배만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고민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뭐가 고민이냐고? limelite는 그래도
고루해서 그런 새까만 후배에게 동문이라는 선을 넘는다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선을 내 스스로 깨야하니 고민이 됐겠지...
지금도 "젠장!!! 이게 무슨 난리람!!!"하고 혼자 툴툴거리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는 사이 점점 둘이 같이 다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
가고... 고민고민하면서 이번에는 꼭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했다가 헛탕으로 지나가는 횟수도 늘어갔다...

그러다가 발렌타인데이였을 것이다... 토요일이던가 일요일이던가...
종로의 고려당제과에서 만났는데, claudia가 초콜렛도 사주고 감격
하는 나에게 팔짱도 끼어주면서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고루한
나는 이것이 claudia의 어떤 표현인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후배한테
그런 대접 받는다고 일일이 좋아한다는 표현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단지 기분이 좋고 이제는 뭔가 말을 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개봉 전철역에서 내려 claudia를 오빠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을 가면서... 뭔가 머릿 속으로 복잡한 말을 준비했다가 그런
말들을 꺼냈다... "너를 후배로 생각했는데... 우물.. 이제 내 마음
속에... 쭈물... 들어있는 것 같아... 우물우물..." 겨우 꺼낸 말이
이런 정도였다... 그것도 말은 더듬거리고 고개는 숙이고 눈은 열심히
땅을 쳐다보면서...
claudia는 조금 깔깔거리면서 계속 걸었고, 뭔가 다른 말들을 열심히
해댔다... 스스로도 내 표현이 시원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claudia를 보면서 말을 못알아 들은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좀 이야기하다가 결국 문맥에도 전혀 어울리
지않게 "모르는 척 하지마"라는 내 특유의 툴툴거림(거 왜 실제로 모른
척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마음 알아달라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 있지 않은가?) 한마디를 했지만, claudia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어린 백성은 과연 알아들었을까 아닐까, 혹 선배로서
쪽만 파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으로 잠도 시원치않게 잤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claudia에게 전화가 왔다... 뭔가 우물쭈물하면서
claudia가 꺼내는 말...

"어제 저녁 못알아들은 척해서 미안하다구요... ^-^"

그리고, 몇달 후... 간간히 나는 claudia에게 그런 것도 프로포즈냐,
프로포즈 다시하라는 핀잔을 듣게 되었다... 나도 인정한다... 정말
바보같은 프로포즈였다고... ^-^

***

요새 신세대들은 프로포즈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나처럼
고루한 방식은 아니겠지... 하지만, 한가지만 알아줬으면... 그런
고루한 프로포즈가 나에게는 저 위의 현란한 프로포즈만큼이나 어려웠
다는 것을...

                                                     - limel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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